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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의 꿈을 안고 중국서 30년간 항일투쟁 견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12.09일 08:21
한국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 리범석의 전기적 경력

  (흑룡강신문=하얼빈) 저명한 독립운동가 리범석장군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름난 항일영웅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나라의 독립과 중국의 항일전쟁을 위하여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30여년간 일본침략자와 영용히 싸워온 전기적인 경력, 특히 중국항일전쟁의 첫 시작인 치치할 '강교항전'에 참가하여 중국군민과 어깨겯고 피흘리며 싸워온 영웅사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손중산의 소개로 운남강무당에 입학

  리범석 (李范奭) 은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서울중로에서 리문하(李文夏)와 연안 리씨(延安李氏)의 아들로 태여났다. 호는 철기(铁骥), 자는 린남(麟男)이며 왕운산(王云山), 리국근(李国根), 리국진(李国镇) 등 이름도 사용한적 있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왕족으로,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의 17대 손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리범석이 8살나던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명령이 하달되였다.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대한제국 군인 정태규가 군대 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당하는것을 목격하면서 리범석은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게 되였다.

  후날 그는 이를 신의 계시인지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1915년 여름 한강에서 수영하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학생들을 물색중이던 려운형(吕云亨)을 만나 국제정세와 독립운동계의 소식을 듣고 중국망명을 시도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뒤 리범석은 1915년 11월 19일 서울남대문역전에서 저녁 11시 20분에 신이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역을 떠나자 그의 머리에는 허다한 물음표가 머리에 떠올랐다.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될가? 얼마나 멀리 갈가? 미래는 어떠할가?……아, 모든것을 운명에 맞길수 밖에!

  기차는 16세 한국소년의 조국광복의 꿈과 리상을 실고 중국대지로 질주했다.

  1915년 11월 25일 상해역에 도착하자 그의 큰 매부 신석우(申锡雨)와 한국 혁명의 거두 신규식(申圭植) 및 조용하, 조성환, 신채호 등 한국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리범식은 상해프랑스조계(法租界)의 어양리(渔阳里)에 있는 신규식의 집에 류숙하며 신규식과 손중산 중국 국민당정부의 총통 서신을 나르는 통신병으로 일했다. 손중산이 령도한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한 신규식은 손중산의 자택에서 멀지않은 곳에 거주해 있었다.

  후날 리범석은 이 기간의 경력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손문선생을 만난것은 1915년이였다. 그때 그이는 '삼민주의'를 집필하고 있었다. 그때 손문선생은 40여세밖에 안되였는데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앉은 자세가 위엄이 있었으며 목소리와 태도는 아주 친절하였다. 그때 나는 손문선생과 신선생의 서신을 나르는 일을 했다. 어느 하루, 손문선생이 나보고 신선생과 무슨 관계인가고 물었는데 중문을 전혀 모르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중문을 배워야 할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중국어 공부에 매달렸다."



  손문은 그에게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생각이라면서... 일본에 대항해 싸울 용기가 있느냐?"고 거듭 물었다. 그 후 그는 손문의 천거로 그가 혁명간부를 양성하던 운남륙군강무학교 기병과에 12기로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륙군강무당 제12기 기병과를 졸업한 리범석은 중국군 건해자(乾海子) 기병련대에 견습사관으로 또한 8개월간의 견습기를 거쳐야 했다.

  4월, 한국 국내에서 발생한 3.1 만세운동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한 리범식은 국내 항일투쟁에 투신하고저 직접 독군 당계요를 찾아가 "각하께서 이번에 저희들의 귀국을 허락해 주시면 조국이 독립한후 우리 민족은 당신의 은덕을 영원히 기억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계요는 그들의 한국독립운동참여 뜻을 헤아리고 비자문제를 선뜻 해결해주는 한편 상해로 가는 려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청산리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호되게 족치다

  리범석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급급히 갓 성립한 대한민국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그에게 림시정부의 군무처를 맡으라는 권고했으나 리범석은 1919년 10월에 상해를 떠나 신규식, 리동녕, 안창호 등의 추천으로 리시영(李始荣)이 창건한 만주 봉천성 유하현(지금의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 있는 서간도신흥무관학교에 가 고등 군사반 교관겸 교학대장으로 일하면서 김광서(金光瑞), 신팔균(申八均), 지청천(池青天)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전력했다.

  1920년 3월, 그는 독립군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의 부름을 받고 성준용(成骏用), 김훈(金勋, 1921년 6월 운남강무당 제16기에 입학,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를 단임했음)과 함께 도보로 수천리를 강행군하여 북간도 왕청현(汪淸县) 십리평에 본부를 둔 북로군정서로 가 련성대장(练成大将)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5월 사관련성소를 창설한 뒤 600여명의 생도들을 모집해 독립군 장교로 육성시킴으로써 전투력이 가장 뛰여난 한갈래 독립군 부대로 되게 했다. 이는 후날 한국독립군이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 주요 요인으로 되였다.

  1920년 10월 21일, 리범석은 보병 1개 대대를 인솔해 가지고 청산리 백운평에서 유리한 지리 지형을 리용해 일본 토벌군 주력부대를 강타하여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대전과를 올렸으며 그 후에도 김좌진과 함께 북로군정서군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를 치렀는데 번마다 큰 승리를 거뒀다.

  그후 흩터져 왕청현으로 이동했는데 거기에서 다시 김좌진의 본대와 합류한후 북만주의 밀림과 산을 넘어 연해주 이만으로 북상하였다.

  대한민국림시정부(당시 림시정부의 북간도 시찰원으로 파견된 안중근의사의 동생 안명근의 현지 답사보고)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은 1200여명의 전사자와 2100여명의 부상자를 냈고 독립군측은 130여명의 전사자와 220여명의 부상자만 냈을뿐이다.

  후날 리범석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보기드문 전투사례이다……우리에게는 우수한 사관학교학생, 영용무쌍한 정신, 교포들의 물심량면으로 되는 지지와 방조가 있었기때문이며 우리가 지형에 대해 익숙하고 지휘력량도 적들보다 더 강하였기때문이다."

  그때 21살 밖에 안된 리범석은 사실상 전선사령원 역할을 했었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영웅사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혁혁한 승리를 거둔 청산리대첩은 일본군국주의에게 회멸성 타격을 안겨 국내외를 진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1920년부터 계획한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계획과 작전 그 자체를 무위로 만들어 놓아 한국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어 놓았다.

  1920년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초에 부대별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중국-소련 국경에 있는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독립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리범석은 중국, 러시아 등지를 전전하다가1923년 5월에는 김규식(金奎植), 고평(高平) 등과 함께 중국 연길현(延吉县) 명월구(明月沟)에 가 고려혁명군(高丽革命軍)을 조직, 리범석은 기병사령(骑兵司令)으로 활약했다.

  1925년 7월, 그는 김좌진장군의 전보를 받고 해림으로 가 김좌진장군을 도와 대일 투쟁을 하였다. 이해 9월, 리범석은 해림을 떠나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오길밀(吴吉密)에 와 재차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했다. 하지만 천신만고로 발전시킨 이 결사단은 1928년에 이르러 또다시 일제와 중국군벌의 진압으로 373명이 희생되고 17명 밖에 남지 않았다.

  1929년 가을, 리범석은 부득불 '김광두'라는 가명으로 만주에서 외몽골로 가 수렵생활을 하면서 일본특무기관의 눈길을 피하였다.

  중국군민과 함께 치치할 '강교항전'에 참가

  2년후인 1931년에 리범석이 외몽골로부터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 때는 세계를 놀래운 '9.18사변'이 일어나 일제가 순식간에 동북 여러 지방을 점령하고있을 때였다.

  일본관동군은 침략 작전을 시작하여 5일만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료동(辽东), 길림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이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이는 전 중국인민들의 거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10월엔 동북남부를 점령한 후 11월에는 당시 흑룡강성 소재지였던 치치할을 점령하려 시도하고있었다.

  1931년 11월 4일, 바로 이 위급 관두에 흑룡강성 대리주석으로 임명받은 마점산장군이 령도하고 지휘한 이름난 치치할 '강교항일전쟁'이 중국인민무장항일의 첫 총소리를 울렸다.

  37일간 지속된 '강교항전'에 일본군은 보병, 포병, 공군 등 병력을 초기의 몇천명으로부터 3만여명으로 증가하여 동시참전 병력은 무려 1만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마점산장군이 지휘할수 있는 병력은 모두 합쳐 1만 3000여명으로 동시참전할수 있는 병력은 일본군 병력의 4분의 1도 안되는, 고작 3000여명 밖에 안되였다. 게다가 병기를 보면 일본군은 중포, 비행기, 탱크, 장갑차로 무장했지만 마점산장군의 부대는 보총에다 소량의 기관총으로 무장했을뿐 후원병력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력량 대비가 현저한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적군 1만여명(그중 일본군 6000여명, 괴뢰군 5000여명)을 살상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려 국내외를 들썽해 놓았으며 전국인민들의 항일애국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마점산장군이 지휘한 '강교항전'은 '9.18'사변이후 중국군대가 처음으로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투로 일본침략자의 방자한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중국 14년 항일전쟁의 첫 시작, 제2차 세계 대전의 서곡(序曲)으로 빛나는 력사 한페지를 남겼다.

  하지만 한국의 한 직업군인이 리범석과 그가 인솔한 고려혁명군결사대대원들이 중국항일전쟁의 첫 시작으로되는 치치할 '강교항전'에 참가하여 중국군민과 어깨겯고 싸워온 영웅사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강교항전' 당시 마점산장군의 작전과장으로 맹활약한 이가 바로 후날 한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담임한 리범석장군이다.

  '강교항전'을 앞두고 만주리(满洲里)중동철로서부선의 호로군(护路军)사령인 소병문(苏炳文)이 그 일대에서 활동하고있는 리범석을 불러놓고 "당신이 청산리전투를 지휘한것을 알고 있소. 이번엔 우리도 일본침략군과 싸워야겠으니 우리를 도와 일본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해줄수 없겠는지요?" 라고 물었다. 리범석은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당연히 협조해야지요!"라고 흔쾌하게 대답했다. 후에 소병문장군은 리범석을 마점산장군에게 소개하자 마점산장군은 리범석을 즉시로 작전과장으로 임명하였다.

  태래현 강교진 (泰来县江桥镇) 에서 '강교항전"이 개시되자 리범석은 즉시로 중국군대와 함께 전투에 투입하여 작전을 지휘하였다. 특히 11월 17일 삼칸방(三间房)진지에서 있은 일본군과의 혈전은 전반 '강교항전'전역의 관건성 전역이였다. 이 관건적인 전역에서 리범석은 고려혁명군을 이끌고 직접 전선에나가 여러차레나 적들의 진공을 물리쳤다.

  당시 일본군은 비행기, 땅크, 장갑차를 앞세우고 전례없는 화력으로 우리 진지를 향해 총공격을 해왔다.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흑룡강성잠편(暂编)1려 2퇀은 아예 놈들과 육박전을 벌렸다. 필사적으로 방어를 했지만 적들이 공격을 당해낼수 없어 진지를 당장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였다. 그런데 맹공격해오던 적들이 갑자기 비실비실 철수하기 시작했다. 전투를 지휘하던 마국충(马国忠)련장이 이상해서 주변을 관찰해보니 옷차림도 통일되지 않은 한 소부대가 일본군에게 맹렬한 불벼력을 안기고 있었는데 사격이 준확하고 소조별 돌격도 매우 조리있게 조직하고 지형 지물을 아주 교묘하게 리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맹사격에 견딜수 없어 일본군은 마침내 없는 전부 철수했다. 마련장이 직접 달려가 보니 리범석이 인솔하는 고려혁명군이였다.

  작전과장 리범석이 직접 전선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원숭곡(苑崇谷)려장은 매우 감격해 하면서 곧바로 2퇀 진지에 달려왔다. 리범석은 그에게 프랑스에서 만든 탱크는 포탑결합부인 '목아지'에다 견고한 물건을 집어넣으면 쇠덩어리가 된다고 알려주었다. 원려장이 즉각 용감하고 행동이 민첩한 전사들을 선발, 탱크에 올라가 쇠드릴같은 철공구를 포탑결합부에다 던져넣게 했다. 리범석의 말대로 탱크는 즉시 무용지물이 되다싶이 되였다.

  적들은 후원부대는 계속 증파했다. 항일군은 오전 10시까지 고지를 사수하다가 상급의 지시대로 질서있게 세칸방진지에서 철거하였다.

  후날 마점산이 '거짓 투항'하여 만주국의 국방장관이 되였다가 군비를 장만한후 또 다시 항일에 나설 때 리범석은 마점산부대의 대령(上校)고급참모로 승급하였다.

  1932년 6월, 마점산이 인솔한 의용군은 란서(兰西)에 집결하여 할빈을 진공할 작전을 세웠다. 그때 성지원(程志远)려장이 할빈 진공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미심쩍은 생각이 든 마점산은 사람을 파견해 성지원려장이 혹시 일본군에게 매수당하지 않았는지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적임자를 찾을 수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마침 리범석이 손에 문건을 들고 그를 찾아왔다. "참! 왜 이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지? 지혜롭고 기민하며 일본말까지 잘하지 않는가!"

  마점산은 즉시로 리범석더러 성지원려장에게 가 약속한 시간대로 할빈진공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리범석은 아주 기꺼이 임무를 접수하고 몇몇 조선족전사들과 함께 일본군복을 갈아입고 떠났다.

  성지원은 아주 열정적으로 리범석일행을 맞아주었다. 그런데 술좌석에서 리범석은 술안주를 나르는 병사가 어딘가 수상해 보였으며 성지원도 말할 때면 그 병사의 눈치를 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가 위만군 복장을 차려입은 그 병사는 일본말까지 제법 잘 했다.

  리범석은 성지원이 이미 일본군에 완전히 통제당했음을 인츰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척하고 큰 소리로 떠들며 닥치는대로 먹고 마셨다.

  밤이 깊이지자 리범석은 함께 간 조선족전사들을 조용히 깨워가지고 보초병 두명을 비수로 찔러 쓰러뜨린후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안가 일본군이 추격해왔다. 리범석은 전사들을 데리고 죽기내기로 뛰면서 추격해오는 일본군들을 향해 사격해 10여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호란현 경내에 이르렀을 때는 전사들이 모두 희생되고 리범석 혼자만 남게 되였다. 손등,어깨, 왼쪽다리 세곳이나 부상을 입은 리범석은 완강한 의력으로 해룬에 도착하여 성지원이 변절한 정보를 제때에 마점산장군에게 알렸다.

  한동안 치료를 거쳐 리범석의 상처가 호전되자 마점산장군은 리범석을 찾아와 편지 한통을 넘겨주면서 치치할 뢰가 골목 103번지에 사는 복씨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이 편지를 뜯어보라." 했다.

  리범석이 떠나가자 곁에 있던 부관이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아 "총지휘님, 그 자그마한 뢰가골목에 어떻게 103번지까지 있을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마점산장군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한국인인 그가 중국의 항일전쟁을 위해 피흘려 싸우다 전우들은 모두 잃고 혼자 남았소. 더 이상 그를 희생시킬수 없지 않소. 그래서 내가 일부러 떠나 보낸거요. 편지를 뜯어 보면 내 마음을 알게 될거 요."라고 말했다.

  얼마후 마점산장군이 간남(甘南)을 거쳐 자란툰(扎兰屯)에 있는 사가(谢珂)지휘부에 갔을 때 뜻밖에도 그곳에서 리범석을 다시 만났다.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

  "전번에 그 편지를 못지 못했소? 내가 편지에다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지 않았소.어찌하여 여기에 왔소?"

  "총지휘님, 그 편지를 본후 저는 손홍유(孙鸿裕)퇀장을 찾아서 여기로 왔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공동한 원쑤입니다. 그자들은 다 소멸하지 않고서는 밥도 먹을수 없읍니다. 조선에 돌아간다고 해고 굶어죽게 될 것은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리범석은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해져 있는 마점산 앞에 다가 와 인사를 하면서 대답했다.

  1932년 12월에 이르러 일본관동군의 토벌이 갈수록 더 빈번하고 심해져 동북경내의 항일투쟁을 견지할수 없게 되였다. 마점산부대와 소병문부대의 주력도 거의다 상실되였다. 하여 부득불 남은 병력 7000여명을 거느리고 만주리를 거쳐 소련에 들어갈수 밖에 없었다.

  그때 당시 소련정부에서는 중국에서 건너간 항일부대를 모두 시베리아의 톰스크에다 집중시켰다. 동북항일의용군은 톰스크에서 1933년 4월까지 머물어있었다.

  고급 참모 리범석도 소련 톰스크로 갔다. 중국어, 러시아어, 일어에 능통하고 인물 체격 또한 출중한 30세 열혈의 청년인 그는 그곳에서 우연한 기회에 한 폴란드 망명자의 딸 올레리아(奥蕾利娅)를 알게 되였고 얼마안가 그녀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였다.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슬픈 비극으로 끝났다.

광복을 맞아 한국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1933년 6월, 리범석은 중국군사대표단의 신분으로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이집트를 시찰하고 상 해에 돌아온후 대한민국 림시정부 주석인 김구선생을 만나보았다.

  그때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상해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폭사(爆死)시킨뒤라 그동안 림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던 장개석이 "4억 중국인이 못해낸 일을 조선인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하면서 대한민국 림시정부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림시정부 광복군이 결성되자 리범석은 김구, 지청천과 함께 광복군에 참가해 리청천장군은 광복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리범석은 초대 참모장에 취임하게 되였으며 그 이듬해에 광복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 4월, 광복군의 각지대 개편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였던 그는 광복군 제2 지대장을 자원하여 겸했다. 그후 서안(西安)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교육훈련과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성립되자 리범석은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부 장관에 취임되였다. 이후에도 그는 주중화민국대사와 내무부장관직을 담임하기도 했으며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리승만의 견제로 락선했다.

  1963년 3월 1일 박정희정부는 리범석장군의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1969년 5월,박정희대통령은 그를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으로 임명했다.

  1972년 5월 11일 오전 5시 45분, 리범석은 심근경색으로 서울 명동의 성모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72세. 리범석장군의 장례는 5월 17일 서울남산광장에서 성대한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고 유체는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 묘역에 안치됐다.

  "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인것이다." 리범석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인 '우둥불'(1971년)에서 조국을 떠올리며 한 이 명언은 지금까지도 세인들에게 깊은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최광엽

  (본문 작자는 흑룡강성민간문예가협회 조선족분회상무부주석, 중국보고문학학회 유일한 조선족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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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위씨네 사당》 한문판 신간 발표 및 작가 허련순 기자간담회 장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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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동북도서교역박람회가 한창인 가운데 연변인민출판사는 2024년 5월 18일 오전 9시, 국가길림민족문자출판기지 전시구역에서 장편소설 《위씨네 사당》 한문판 신간 발표 및 저명한 조선족 녀작가인 허련순의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위씨네 사당》한문판 신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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