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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철호선생을 추모하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4.19일 15:07
로혁명간부이며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고문인 변철호선생은 2016년 4월 3일 저녁 9시 10분에 88세를 일기로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청명절인 4월 4일 오전에 장춘시혁명렬사기념관 렬사탑앞에서 혁명렬사들에게 헌화와 묵도를 마치고 층계를 내려오다가 뜻밖의 비보를 접한 우리모두의 마음은 쇠덩이같이 무거웠다. 그 순간 선배이고 동지이며 스승이고 지기인 그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도 그지없이 허전하였다.



2013년 10월, 길림신문사 기자의 취재를 받고있는 고 변철호선생.

변철호선생의 일생은 평범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일생이며 파란만장하면서도 보람찬 일생이였다.

1928년 4월 24일, 조선 중강에서 한 빈천한 농가의 아들로 태여난 그는 어려서 중국으로 건너왔고 일찍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1946년 8월에 통화시에서 리홍광지대 교훈대대에 입대하였고 《4보림강》전역시기에 민운사업에 참가하였다. 1947년에는 해룡현 토지개혁공작대에 참가하였고 조선민주련맹 해룡현공위 선전위원을 담임하였으며 그해 12월 19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8년에는 료서성인민정부 민족과에 전근되였고 동년 8월에 회덕현인민정부 민족과에 파견되여 현정부 직속당위 조직위원을 겸임하였다. 1950년 봄에 그는 길림성당위 조직부로 전근되였다.

그는 어디에 가서나 헌신적으로 사업하였고 승승장구로 진보가 남달리 빨랐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했던가, 아니면 운명의 조화였던가. 그해 여름에 그는 본인의 인사서류에 이상이 있다 하여 회덕현에 돌아가서 현당위 지도자와 분쟁이 있었고 결국엔 두 조선족간부의 음모를 벗어나지 못했다. 부당한 비판을 받고 억울하게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처분까지 받아 1년간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혁명에서의 좌절은 누구에게나 원통한 일이지만 그의 좌절은 동족상잔의 결과라니 더욱 통분하였다.

확고한 신념과 견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변철호선생은 역경속에서도 추호의 동요도 없이 황소처럼 꾸준히 배우며 부지런히 사업하였다.

그는 1951년 여름에 출옥하여 공주령시 전업건설위원회에서 문서로 일하다 1953년에 길림성행정간부학교의 학원으로 있었고 공주령시인민정부 민정과의 과원으로 있었다.

1956년에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1960년 7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선후 장춘시조선족중학교와 장춘시제56중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89년에 정년리직할 때까지 장장 30년간 줄곧 교육사업에 충성을 다 바쳤다.

변철호선생은 1983년에야 비로소 억울한 루명을 벗고 당적을 회복하였다. 루명을 쓴채로 꼬박 33년이란 긴 세월의 어두운 터널속을 숨가쁘게 달려온 그였다.

정년리직한후의 변철호선생의 후반생은 더욱 평범하지 않았다.

재직때부터 항일전쟁시기와 해방전쟁시기의 조선족영웅인물과 혁명렬사들에 관한 자료수집과 조사연구를 해온 변철호선생이다. 그는 남영전시인의 평가처럼 “장춘조선족력사연구가” 로서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의 겸직연구원으로 초빙받았으며 《중국조선족발자취》라는 8권으로 된 총서 제5권의 부주필을 맡아 성공적인 출판, 발행에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변철호선생은 장춘시남관구조선족로인협회를 창설, 제1임 회장으로 다년간 봉사하였다. 1993년부터는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제3기, 제4기 부회장을 담임하고 6년간 로인사업에 정진하였다.

변철호선생은 1994년부터 필자와 채규억회장을 모시고 《로인문고》 (후에 《로인생활》로 개칭)를 창간하고 1997년까지 4년간 총 20기를 발행함으로써 중국조선족사회에 로인잡지가 없던 력사의 공백을 메웠다. 선후《로인문고》잡지사의 주최로 두차례 동북3성 조선족로인협회 경험교류회를 소집하여 경험을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

1997년 2월 6일 섣달 그믐날 변철호선생은 로인잡지의 발행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동분서주하다가 얼음판에 넘어지면서 다리를 크게 상했다. 그후부터 불행하게도 그는 지팽이신세를 떠날수 없는 종신불구가 되였다.

변철호선생은 2001년부터 몇몇 지기들과 함께 《장춘조선족》이라는 민족력사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5년간 로심초사한 끝에 어렵사리 완성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빛을 보지 못하고있다. 올해 2월까지만 해도 그는 나와 만나거나 통화할 때마다 《장춘조선족》을 운운했지만 끝내 그 책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영영 눈을 감고말았다.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하고 우리와 영별한 고인을 생각하면 죄송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장춘시 민위 함영일부주임께서 올해안에 꼭 출판되도록 책임지겠다 하니 고인도 하늘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위안이 되였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변철호선생은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창시자이며 2010년부터는 이 클럽의 고문으로 있었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의 계승발전에 남다른 관심을 둔 그는 중앙인민방송국과 중국국제방송국의 우리말 방송의 가장 열성 높은 애청자였으며 《길림신문》, 《장백산》 등 우리 말 간행물의 가장 열성 높은 애독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변철호선생님은 우리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방송인들과 추억의 력사를 함께 써오신, 그리고 병환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우리 방송을 잊지 않으시고 대필을 통해서라도 편지를 보내주시는 참으로 고맙고 존경스러운분”이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도 “변철호선생님은 한평생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살아오신분입니다. 또한 8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저희 방송에 매일 귀를 기울이시며 소중한 건의를 제출해주곤 합니다. 이처럼 충실한 애청자가 계신다는것은 우리 방송의 재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치하하였다.

변철호선생과 필자는 남다른 연분이 있다고 할수 있다. 우리는 연변대학 어문학부에서 4년 동안 학창생활을 함께 보낸 제8기 동기 동창이다. 그는 중문을 전공했고 나는 조문을 전공하였기에 한 학급은 아니였지만 여러모로 인상이 깊었다. 그는 우리와는 달리 수년간 사업하다가 진학한 간부출신의 대학생이였고 우리 학부의 유일한 털보 대학생이였으며 당시 연변대학의 교장까지 겸임한 주덕해주장의 부인 김영순녀사와 한 학급의 학우였다.

그는 대학 또는 학부에서 진행된 대형행사때마다 거동이 남달리 로숙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1960년 8월에 함께 졸업하면서 그는 장춘으로 배치받았고 나는 통화로 배치받은 후 꼬박 30년 동안 상종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 봄에《장백산》잡지사가 장춘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다시 만나게 되였고 서로 손잡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는 시종 《장백산》잡지의 충실한 애독자이자 유력한 후원자로서 잡지사의 모든 식구들과 접촉이 잦았다. 우리는 중국조선족의 로인잡지를 꾸려야 한다는 공통한 착상으로 《로인문고》잡지를 창간하였고 4년간 함께 헌신적으로 출판발행을 위해 뛰여다녔다.

우리는 바둑문화 역시 민족문화의 일익이라는 동일한 인식으로 길림성조선족바둑협회를 설립하고 각종 바둑대회를 함께 개최하였다. 우리는 장춘조선족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고 력사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다년간 함께 고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을 함께 꾸준히 이끌어왔다. 그러다가 근년에 와서 체력이 점차 쇠약해지면서 그는 종종 “올해를 넘기지 못할것 같다”고 걱정해왔고 그때마다 필자가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가면 안됩니다.”라고 고무격려하면 “그래, 그래.” 하고 통쾌히 대답했었다.

지난 년말에 그는 자기가 수십년동안 애써 수집하고 정리한 보귀한 자료와 도서들을 꽁꽁 묶어서 우리 클럽에 넘겨주었다. 우리는 경건한 심정으로 목록을 재정리하고 소중히 보관하였는데 무려 여섯박스가 넘었다.

변철호선생은 우리 곁을 영영 떠나갔다. 그의 별세는 우리 장춘조선족사회 더 나아가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의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

비록 그의 신체는 이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그의 애국, 애족, 애민의 고귀한 품성과 불요불굴의 정신 그리고 성실하고 강직한 영상은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을것이다.

고 변철호선생님이시여, 고이고이 잠드소서.

/김수영 2016년 4월 18일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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