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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달이 떠오른 구화산 석굴의 비사 [제29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12.16일 10:32
(흑룡강신문=하얼빈) 지장보살의 도장인 구화산에 가기 전에 뜻하지 않던 에피소드가 생겼다. 김교각(金喬覺)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한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김씨 성의 예술인을 연변 행차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의 '증명서'는 용담(龍潭) 김씨의 족보였는데, 이 족보는 계림(鷄林)의 박혁거세부터 가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김교각은 신라 국왕의 왕자인데요, 권력다툼을 피해 중국에 건너왔다고 합니다." 김호남 씨는 그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말했다.

김교각과 한 성씨라고 전한다면서 김호남씨가 내놓은 족보의 일부.

  실은 족보에 글로 적혀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김교각이 한 성씨라고 알게 된 후 주변 지인들에게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김교각은 신라 국왕의 큰 아들이며 왕권의 미련을 벗어던지고 24살 때 당나라에 들어왔다는 것. 실제로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남겼다고 하는 시 '수혜미(酬惠米)'에는 그가 본디 왕자라는 구절이 나오며 청(淸)나라의 '전당서(全唐書)'에도 김교각은 '신라국 왕자'로 출현한다. 이에 따라 김교각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의 큰 아들 김수충(金守忠)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김교각과 동시기의 당(唐)나라 역사서 '구화산화성사기(九化山化成寺記)'는 "신라 왕자의 김씨의 친족(近屬)"이라고 기록하며 또 '송․고승전(宋․高僧傳)', '신승전(神僧傳)'은 "신라왕의 가까운 일가(之屬)"라고 기록하고 있는 등 시야비야의 논란거리가 있다.

  용담 성씨의 족보에 형체가 떠오르지 않듯 김교각의 주변에도 늘 실체를 밝히기 어려운 이야기가 뒤따르고 있다. 안내를 맡았던 성철(聖哲) 스님은 구화산 부근에 김씨 마을이 있다고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성철 스님은 구화산에서 불교공부를 했고 또 구화산에서 승적(僧籍)을 올렸던 연변 태생의 조선족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김씨라고 하는데요, 그들의 족보에 따르면 1,100여년 역사가 된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성씨는 물론 시간적으로 김교각과 아귀를 맞춘 듯 딱 떨어지고 있었다. 김교각이 일국의 왕자라면 기필코 수행자가 많았을 것이며 그들의 군체는 김가촌(金家村) 같은 이런 촌락을 이뤘을 수 있다는 것.

  김가촌은 옛 이름이 남계(南溪)이며 일명 남계고채(古寨)라고 하는데 구화산의 동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정도 상거한다. 삼면이 산에 둘리고 외길로 바깥과 통한다. 원주민은 모두 김씨이지만 기실 남흉노 휴도왕(休屠王)의 왕자 김일제의 후예라고 한다. 대륙에서 '제일 마지막 흉노부락'인 셈이다. 촌민이 소장한 김씨 족보에서 중국 제2역사서류관의 연구원이 1998년 우연하게 발견한 사실이다.

구화산 동쪽 동지현의 김씨사당.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金日磾)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중신(重臣)으로 신임을 입어 김씨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족보에 따르면 당나라 때 진사(進士) 출신의 김씨 후손이 안휘성(安徽省)에서 관직을 맡았고 그의 후손이 황소(黃巢) 봉기의 난을 피해 건덕현(建德縣) 즉 지금의 동지현(東至縣)에 이주하였다. 이들이 바로 남계 김씨이며 지금까지 약 70대를 이어오고 있다. 와중에 김씨의 7대조는 한나라 말 요동으로 피난한 것으로 문무왕비와 장안의 비림에서 발견되었다.

  "남계 김씨는 신라인이고 나중에 족보가 위조되었다고 하던데요." 성철 스님이 이렇게 항간의 '음모' 설을 전했다.

  옛날 김교각의 수행자가 일부러 심산에 터전을 잡은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후손이거나 정부가 그 무슨 남모를 원인으로 남계 김씨의 족보 자체를 위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교각 친속은 구화산에 오르기 전에 벌써 버젓이 나타나고 있다. 산기슭에는 김교각의 외삼촌이 살고 있었다는 이성전(二聖殿)이 있다. 이성전은 일명 구화묘(九化廟)라고 하는데, 옛날 구화산에 오르는 북쪽 등산로에 위치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덕왕이 재위한 후 아들 김교각을 데려 오려고 소우(昭佑)와 소보(昭普) 두 외삼촌을 구화산에 보냈다. 청(淸)나라 때의 '청양현지(靑陽縣志)'는 두 신하라고 그들의 신분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김교각의 불심에 감복하여 함께 수행했다는 것. 속인으로서 술과 고기를 금할 수 없었던 그들은 늘 하산하여 입가심을 했다. 두 외삼촌은 지금의 구화산 이성촌에 일생을 마감했으며, 지인들은 이들을 기념하여 이성전을 지어 기념했다. 그 후 술과 고기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던 구화산의 승려는 늘 기회를 타서 '이성회(二聖會)'에 들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구화산의 이야기를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구화산은 김교각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리고 있지만, 실은 그 전부터 벌써 반도 승려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화산에 제일 먼저 발자국을 찍은 반도의 승려는 신라의 김교각이 아니다. 백제 31대 왕인 의자왕(義慈王) 12년(652), 의각 스님이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잠시 후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때 의각 스님은 구자산(九子山)에서 3년 동안 수행했다고 한다. 한국의 고대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의각 스님이 불법에 밝으며 '반야심경'을 독송하여 눈과 입에서 광채가 뿜겼다고 전한다. 의각 스님은 655년 옥불과 나한을 모시고 귀국한다. 이듬해인 의자왕 16년, 의각선사는 금오산(金烏山)의 향천사(香泉寺)에 가람을 열고 대륙에서 바닷길로 모셔온 옥불상과 나한을 봉안했다. 의각 스님이 장소를 물색할 때 금까마귀가 산중턱에 날아가 물을 쪼아 먹던 곳이 바로 이 금오산의 향천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의각 스님은 뒤미처 신라의 김교각이 그의 뒤를 따라 구화산에 온 후 세상에 하도 소문이 나서 그의 산과 같은 그림자에 형체를 가리게 된 것이다.

백제 의각 승려가 구화산의 옥불을 봉안했다고 전하는 향천사의 전경.

  잠깐, 이야기의 장소가 헷갈리는 것 같다. 의각 스님이 정진수행을 했던 구자산이 바로 훗날 김교각이 수도했던 구화산과 동일한 이름이다. 옛날 아홉 애기가 엄마 몸에 한데 모여 재롱을 하는 것 같다고 해서 일명 구자암(九子岩)의 구자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나라 때 시인 이백(李白)이 9개의 봉우리의 산의 모양이 마치 아홉 연꽃 같다고 해서 "영산개구화(靈山開九化)"라는 명구를 지은 후 세간에서 구화산으로 달리 불리게 되었다. 이백은 구화산 부근의 만라산(萬羅山)을 감돌아 흐르는 청계하(淸溪河)에서도 푸른 강을 노닐며 또 절세의 시구를 마취암(馬嘴岩)에 남겼다고 한다.

  "이백이 벼루를 씻던 곳이 강기슭에 있는 진주사(珍珠寺)의 묵지(墨池)라고 합니다." 성철 스님이 하는 말이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진주사는 당나라 때 세운 고찰로서 일찍 민국(民國, 1912~949) 때 전란에 의해 파괴되었다. 2003년, 성철 스님이 현지 정부의 인견으로 이곳을 찾아왔으며 고찰을 재건했다.

  이야기가 그만 또 다른 데로 흐른 것 같다. 기실 구화산의 불교의 시작에도 반도가 아니라 대륙 저쪽 천축의 명승이 나타나고 있다. 진(晉)나라 때의 인물이라고 하는 이 명승은 원래 그 이름이 미상이라고 불교전적 '신승전(新僧傳)'이 기록하고 있다. 늘 목배(木杯)를 타고 강을 건너서 세간에서는 배도(杯渡) 선사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름처럼 신이한 행적을 많이 남겼던 배도 선사는 부용령(芙蓉嶺)의 기슭의 구자산 즉 구화산에 초가로 된 암자를 만들고 불교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당나라 개원(開元) 7년(719), 24살의 김교각은 바다를 건너 대륙에 왔으며 종당에는 구화산에 도착했다. 김교각은 산에 오른 후 동애봉(東崖峰)의 동굴에서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이 동굴이 바로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지장동(地藏洞)이다. 이때 김교각은 백토(白土)에 쌀을 섞어 밥을 지어 먹었는데, 그의 이런 고행수도에 보는 사람마다 감동을 받았다. 이에 출자하여 구화산에 있었던 단호(檀號) 승려의 옛 곳에 화성사를 재건했다.


김교각이 본격적으로 불법을 설파했던 화성사, 낭낭묘는 이 사찰이 바로 앞에 위치한다.

  김교각은 화성사에 들어간 후 제자들을 인솔하여 물길을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했다. 사찰의 주변에는 모두 볍씨를 뿌렸다. 볍씨는 필시 김교각이 당나라에 들어올 때 갖고 왔던 벼 종자 황립도(黃粒稻)일 것이라고 성철 스님이 말한다.

  신라 하늘의 둥근 달은 신라의 하늘에만 뜨는 게 아니었다. 이때 김교각은 또 고국에서 차나무 금지다(金地茶)와 소나무 오채송(五釵松)의 종자를 갖고 왔다고 '구화산화성사기'가 전하고 있다. 김교각은 구화산 차도의 명실상부한 시조로 되는 것이다.

김교각이 차 종자를 구화산에 갖고 와 심은 것을 기리어 세운 기념비.

  화성사 앞쪽의 연못은 바로 그때 만든 저수지라고 전한다. 방생지(放生池)는 이름은 훗날 물고기를 공양하면 이 못에 놓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생지의 바로 앞쪽에는 또 우물이 있었는데, 탑을 세워 '낭낭탑(娘娘塔)'이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김교각의 고행 소식을 접한 모친이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왔다고 한다. 모친은 울다 못해 눈이 멀었으며, 효성이 지극한 김교각은 우물의 물을 따다가 모친의 물을 닦았다. 드디어 모친의 눈이 밝아졌으며 훗날 사람들은 이 우물을 '명안천(明眼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

  그러나 성철 스님이 하는 이야기는 이와 달랐다. 구화산에 찾아온 사람은 모친이 아니라 김교각의 아내라는 것. 일각에서는 또 왕자 시절의 연인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낭낭탑의 우물에는 낭낭과 김교각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깃들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각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담긴 우물.

  정원(貞元) 10년(794), 김교각은 99살 나던 때 갑자기 불도(佛徒)들에게 고별하고 원적(圓寂)했다. 이때 산이 진동하고 바위가 깨졌으며 새들이 울고 화광이 치솟았다고 전한다. 열반 후 김교각의 육신은 석함(石函)에 보관했다. 입적한 3년 후 석함을 다시 열어보니 시신이 마치 살아있는 육신과 같았다고 한다. 구화산 최초의 등신불(等身佛)이었다. 비가 많고 습한 안휘성의 기후에는 이해하기 힘든 기적이었다. 불도들은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에 따라 김교각이 곧 지장보살의 시현(示現)이라고 인정, 석탑을 세우고 육신을 석탑에 공양하며 김지장으로 존숭했다. 김교각은 그의 평생 서원이 중생구제였는데, 이로써 마침내 지장왕(地藏王) 보살이 되어 중생과 영원히 함께 된 것이다. 달마(達麻) 대사나 육조(六祖)대사에게도 없었던 보살의 칭호를 붙인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구화산은 원근에 명성을 날렸으며 차츰 오대산(五臺山)의 문수(文殊), 아미산(峨眉山)의 보현(普賢), 보타산(普陀山)의 관음과 아울러 지장보살의 응화(應化) 도장으로 되었다.

  구화산은 전성기에 사찰이 5백여 개 되었다고 불교협회 관원 왕욱봉(王旭峰) 씨가 말했다. 현재 구화산에는 아직 대외에 개방하지 않고 있는 후산(後山)의 사찰을 포함하여 공식적인 불교장소가 99개, 승려가 600여명 된다고 한다.

  "제가 공부할 때 불교학원의 학생만 해도 80여명 되었습니다." 성철 스님이 이렇게 덧붙였다.

  이때는 사찰에서 종소리가 높던 1994년 그 무렵이었다. 불교학원에는 조선족 불자도 적지 않았다. 현재 대륙에는 성철 스님처럼 사찰의 주지로 있는 조선족 승려가 여럿이다.

  그러나 왕욱봉 씨가 불교협회에 오던 1979년 구화산에는 관객조차 가물에 씨앗 나 듯 했다고 한다. "입장료가 35전이었는데도 사람이 없었지요. 관리처 직원의 노임이 20위안이었습니다."

  그때 산 정상으로 통하는 흙길로 트랙터가 적재함에 사람을 싣고 올랐다. 아스팔트가 통한 건 그 후의 1993년 무렵이며 입장료도 현재는 천정부지의 190위안에 이르고 있었다. 구화산은 더구나 사찰과 불자보다 그 주변의 상가, 관광객으로 붐비면서 도심의 번화가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이윽고 구화산을 떠난 후 성철 스님이 전생의 인연을 이었다고 하는 진주사에 갔다. 사찰은 옛 구화산 불국의 운치를 청정한 유곡의 숲과 물에 그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옛 감로수가 무량한 이 천년의 우물에는 아직도 신라의 둥근 달이 잠겨 있을까.

감로수가 넘치는 우물에서 성철 스님이 옛 우물 이름자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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