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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가장 아름다운 녀교장이라 부른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10.31일 16:31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37)

《중국농촌교육기적》 만든 리석채조선족소학교 교장 김죽화 만나

《리석채조선족소학교는 리론과 실천을 결합한 중국농촌교육의 모범이고 중국농촌교육의 기적이며 중국민족교육의 기치이고 중국기초교육의 시범이다.》 - 유네스코련합회 부주석 저명한 교육가인 도서평에서


김죽화 프로필:
[1948년 12월 10일, 료녕성 신빈태생.

1968년,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 졸업

1985년, 료녕성 무순시교육학원 중문학부졸업

1978년, 전국최년소특급교사( 29세) 당선

1985년부터 현재 료녕성 무순시리석채조선족소학교 교장 겸 당지부서기.

[정치직무]

중공 료녕성위원회 6, 7, 8기 후보위원, 전국청년련합회 5, 6기 상무위원, 중국공산당 제12차, 제13차, 제14차 대표대회 대표, 제9기, 제10기, 제11기 전국인대 대표로 당선.

[영예 ] -

첫패의 공훈교사, 전국 《10대우수교원》, 전국교육계통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 전국새장정돌격수, 전국《3.8》붉은기수, 전국《5.1》로동메달획득자, 국무원특수수당금수혜자, 전국민족교육선진개인, 전국민족단결선진개인

1999년 12월, 그의 가정은 전국《5호》모범가정으로 평선.

올해 61세라지만 그녀는 외모가 젊고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학교 꾸리고 아름다운 교육으로 아름다운 제자를 배양하는 교장 아름다운 가정 꾸리는 주부, ... 나는 한 시골학교 교장을 만나보고 이세상 가장 아름다운 녀성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바로 한달전인 2009년 10월 1일, 국가교육부의 요청으로 전국 1600만명 교원들을 대표하여(총 69명 교원대표중 일원)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60돐 축제》에 참가한 영광을 지닌, 장장 41년간 시골에 뿌리박고 농촌조선족교육발전을 위해 일체를 바쳐온 한 녀교장 - 그녀가 바로 료녕성 무순시리석채조선족소학교 김죽화교장(61세)이다.

모든 교원이 시급이상 모범인 《전국명문학교》

김죽화교장을 따라 리석채조선족소학교에 들어서니 《중국명문학교》란 붉은 글발이 한눈에 안겨왔다. 바깥교정부터 학교 대청, 복도... 어데나 빈틈없이 충분히 리용한 공간에는 《세계 196개 나라의 국기, 56개 민족, 1040개의 성구, 39개 교통표지, 제자규, 3자경, 좋은 행위습관, 행위방법...》 등 5대특색교정문화를 개설하였는데 《학생의 종신발전을 위한》 학습에 유조하도록 교정전체에 지식문화가 흘러넘쳤다. 특히 이러한것들은 《빛갈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유치원의 3살짜리 어린이로부터 소학교 1학년-6학년까지의 모든 학생들이 모두 머리속에 장악하고 실천에 옮기고있을뿐만아니라 모든 교원들, 지어 60세인 교장까지 례외가 아니라는것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김교장은 《저는 교장으로서 ‘교원에게 요구하는 모든 일은 교장부터 실천해야 하고 학생에게 요구하는 모든 일은 교원부터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교육원칙을 줄곧 견지해왔지요.》라고 말한다. 이런 원칙하에서 김교장은 우선 자신부터 두주일간의 시간을 리용해 《3자경》, 《제자규》를 다 외우고 부교장에게 검사를 마친다음 교원들에게 한달내에 다 외우도록 요구했다. 어떤 교원들은 외워도 인차 잊혀져 못 외우겠다고 하자 김교장은 외우는 방법까지 가르치면서 완성시켜 모두 교내시험에 합격했단다.

뿐만아니라 지금도 김죽화교장은 방학이면 교원들을 이끌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조선어, 수학, 한어》 18개 교재와 교수요강을 연구한다. 그리고 교원마다 교수안을 짜게 한후 한교원, 한교원씩 무릎을 맞대고 교류를 진행한다. 교수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친히 교편물까지 연구하여 만들면서 지도한다. 또 섞갈리기 쉬운 글자, 단어들을 몽땅 수집하여 《한어보통말기초지식》 교재를 편찬했으며 교원들을 준확하게 빨리 장악할수 있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지도한다. 그는 《교원이 한글자, 한문제를 틀리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단지 한글자, 한문제에만 한하는것이 아니라 몇십명 학생들의 죄인으로 된다》며 늘 교원들에게 경종을 주면서 최고수준의 교수로 수업효률을 높이도록 요구해왔다.

교장부터 솔선수범하니 이 학교 교원들은 100%가 동북3성, 성급, 시급의 모범교원이다. 이럴진대 모범교원 손끝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덕지체미로》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훌륭한 학생일수밖에.

반날만에 선전부장 사직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다

6형제 맏딸로 태여난 김죽화는 어려서부터 전교의 《우수생》이였지만 가난한 가정형편을 헤아려 대학꿈을 접고 사범학교를 지망했다. 1968년 김죽화는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애들에게 도시애들보다 못지 않은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꿈으로 무순시 순성구 리석채촌에 돌아와 교편을 잡게 되였다.

사업에 참가한지 얼마 안되여 학교에서는 김죽화에게 저급학년 한어교수를 맡겼다. 교수과정에서 그는 한족학교의 교수방법을 본딴 한어과가 조선족어린이들에게는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함을 발견하고 조선족어린의 특점에 맞게 《한어학습특수법칙》을 모색해냈는바 끝내 조선족어린이들의 한어학습에서의 4가지 난점을 귀납하고 《6가지를 끌어내는 방법》을 총화해냈다. 이 교수법은 우리 나라 조선족소학교 한어교수분야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는바 동북3성에서 전면적으로 김죽화의 교수경험을 보급시켰다.

1985년부터 김죽화는 교장사업에서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능력은 무순시정부의 인정을 받아 1993년 7월, 중공 무순시위로부터 무순시 순성구위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런데 김죽화는 반날동안만 사업하고는 시위서기에게 사직서를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도사업은 저에게 알맞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교원사업이야말로 적격입니다.》 그러자 시위서기는 안타까워 《잘 생각해보시오. 이는 김죽화동무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택입니다. 조직에서는 동무가 당을 위해 더욱 큰 공헌을 하기를 바랍니다.》하고 재삼 만류했지만 김죽화는 《나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것입니다.》고 주장했다.

농촌소학교 교단에서 장장 41년, 25년 교장으로 있은 김죽화는 감회가 깊다. 도시에 진출할 기회도, 승진할 기회도 많았지만 어릴 때 가정이 곤난한 탓으로 여러번 학업을 포기당할번 했던 그였기에 추호의 주저도, 후회도 없이 농촌학교에 뿌리를 박고 자신의 《꿈》을 현실로 가꿔왔다.

교육계를 들썽한 학생평가방안



교장으로 부임된 김죽화는 《미래 지구촌의 제1촌민은 여기서 나온다!》, 《일체는 어린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학교운영리념과 목표를 세운 다음 전면적으로 자질교육 대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교육창신을 진행해왔는바 국가에서 규정한 필수과정 외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과, 영어과, 컴퓨터과, 바둑과, 조선족음식료리특수로동과, 도서열람과, 미술제작과 등 7가지 특색과를 개설하였다. 이 7가지 특색과는 학생들의 종합자질을 높이는데서 다른 학과가 대체할수 없는 특수한 작용을 일으켰다. 특색과를 개설하는 첫날부터 40분간의 수업시간을 모두 35분으로 줄이고 그 5분간을 특색과에 적용했다. 뿐만아니라 7가지 특색과를 학교정식과정표에 넣고 참답게 수업하고 참답게 검사하고 평가하여왔다.

김죽화는 《무용과를 개설한 목적은 무용을 잘배워 춤노래에 능한 인재를 양성함과 동시에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일생동안 자신심을 갖게 하자는것이였다》면서 그 보람을 자랑차게 여긴다. 학교 무용대는 여러차례 료녕성을 대표하여 북경에서 열린 《전국중소학생예술절》활동에 참가하여 특등상, 일등상을 따냈고 일본,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출국공연을 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특히 잊지 못할 날은 2007년 6월 18일에 65명 학생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마음과 마음 잇기 예술단》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무대에서 대형가무 《행복의 아리랑》을 공연한것이란다.

이로부터 농촌아이들은 예술의 저점에서 선생님과 전문가들의 지도하에 예술의 최고봉을 알게 되였다. 아이들은 이후 의지가 굳세여져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목표에 이르지 않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악바리》정신을 양성하였다. 죽화는 《나는 아이들의 이러한 정신을 학습 및 옹근 인생의 려정에서 발휘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7가지 특색과를 개설한것은 교사들을 힘들게 하였지만 학생들은 실제적인 혜택을 얻었고 학부모들은 만족을 얻었으며 우리는 사회에 보답하였다.》며 가슴벅차 말한다.

또 김죽화가 내놓은 자질교육 학생평가방안은 교육계를 들썽했다. 《덕지체미로》 5계렬의 40개 종목 특장생평가를 견지해왔는데 《3호학생》은 우선 《꼬마효자효녀》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런 학생평가방식의 개혁은 85%에 달하는 학생들이 꼬마 효자, 효녀, 꼬마규률모범, 단결합작모범, 꼬마체육가, 꼬마수학자, 꼬마바둑능수, 꼬마탁구능수, 꼬마외교가, 꼬마독서왕, 꼬마로동능수, 꼬마미식가 등 영예를 안게 되였고 100%에 달하는 학생들이 격려를 받았다.

《중국농촌교육의 모범이며 기적입니다》

김죽화는 21세기 합격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교육기금회도 세워 자신부터 모범이 되여 장려금으로 탄 돈과 호주머니의 돈을 털어 지원했는바 그 의연금이 지금까지 무려 30여만원에 달한다. 학교사업을 위해 일체를 바치는 그의 헌신정신은 전 촌민을 감동시켰으며 전 촌민들도 학교를 위하는 일이라면 모두 지지하고 관심하고 일심협력하여 도와 나섰다. 이에 국가교육위원회의 한 교육전문가는 이 학교의 《3결합》교육과 전민이 학교를 꾸리는 이 경험을 《김죽화와 리석채현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교장으로 있은 25년간, 김죽화는 피타는 노력과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지난날 볼품없던 자그마한 이 농촌소학교를 현재 유치원부터 소학교까지 일체화된 9년일관제학교로 부상, 부지면적이 1만 5207평방메터, 건축면적이 6150평방메터, 운동장면적 1만 581평방메터에 달하는 규모에 선진적인 교수시설을 구전히 갖춘 특색학교를 꾸려왔다. 김죽화와 하나같이 똘똘 뭉친 39명의 우수교원들은 300여명의 재간둥이들을 키워가면서 련속 22년간 《성모범학교》란 영예를 받았으며 2002년에는 《전국명문학교-600개소》의 반렬에 진입, 2009년에는 《전국교육계통선진집단》, 《국무원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집단》의 영예를 안았다.

2004년 유네스코련합회 부주석이며 중국 저명한 교육가인 도서평은 《리석채조선족소학교에서는 전면적으로 자질교육을 실시하고 학교과정을 개설하였으며 평가방식을 개혁하여 교정문화를 강화시킨 외 학교의 일체 사업을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데 둔 이 모든것은 리론과 실천을 결합한 중국농촌교육의 모범이고 중국농촌교육의 기적이며 중국민족교육의 기치이고 중국기초교육의 시범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본 자민당 간사는 이 학교를 참관, 고찰하고나서 《리석채조선족학교의 교육으로부터 중국의 교육이 참으로 대단하다는것을 볼수 있다. 우리 일본의 교원, 학생들은 중국의 교육을 따라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교육과 민족교육의 풍채를 국외에 선양



기자에게 학교 교정문화를 소개하고있는 김죽화교장

김죽화는 1985년 11월 중국청년대표단의 일원으로 일본 방문을 떠났다. 일본 환영식 연회석에서 일중우호협회의 몇몇 재일본 동포들이 전국청년련합위원회의 상무위원의 신분으로 참가한 김죽화를 보고 그의 앞에 다가오더니 《일본에 있는 우리 70만명 재일동포들은 정치적지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10억인구인 중국에서 파견한 대표단가운데 조선족녀교사가 있을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말 우리 전세계 동포들의 자랑입니다!》라며 감개해하며 말했다.

1985년 이래, 김죽화는 선후로 10여차례 출국고찰방문과 학술교류를 진행해오면서 대표단 단장의 신분으로 방문가서는 번마다 출중하게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는 그의 능란한 외교능력과 기민한 지혜, 풍부한 지식과 심후한 수양과 갈라놓을수 없었고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갈라놓을수 없었기때문이다.

2005년 11월, 김죽화는 일본외무성에서 이 학교를 방문오자 열정적으로 맞이하였고 학교 《새별예술단》의 장끼를 선보이며 다함없는 정성을 쏟았다.

김죽화는 《때론 어른들이 할수 없는 일을 어린이들이 해낼수 있는것이다. 어린이들의 기특한 표현은 중일 두나라 학생들간의 교류를 촉진하며 따라서 중일친선을 강화하는 출발점으로 된다》는것이다. 아니나 다를가 어린이들의 기특한 표현은 일본 방문단을 감화시켰는바 일본 외무성은 어린들을 일본에 초청해 일본의 학생들과 교류활동을 갖는 마당을 마련해주었다. 일본 자민당 다께베 쯔또무의 말에 따르면 일본정부측에서 대형 어린이방문단을 초청한것은 사상 류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새별예술단의 일본방문기간 다께베 쯔또무는 한 만찬회에서 《일중친선을 이어가자면 정부에만 의거할것이 아니라 민간적인 교류를 많이 가져야 하며 어른들만 할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교류도 이루어져야 한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이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이들은 중일친선교류의 금다리였다. 그동안 일본 자민당 다께베 쯔또무는 이 학교의 《명예교장》으로 초빙되였고 명예교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학교에 후원금을 보냈으며 사천문천지진때도 선참으로 지원을 했다. 그리고 역시 이 학교 명예교장이며 료녕성교육기금회의 유일한 외국인리사인 일본 후지계기주식회사 이또 세이시사장은 5년동안 교육사업에 200만원을 기증했고 많은 빈곤학생들을 후원했으며 희망소학교 3개소를 세워주었다.

모범 며느리 모범 안해 모범 어머니



1970년 김죽화는 북경광업대학을 갓 졸업한 박춘걸과 결혼을 하였다. 그들은 조선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27세 꽃나이에 청춘과부로 된 시어머니와 큰시아버지, 큰시어머니가 작은 오두막 두칸 집에서 함께 살아왔다. 후에 세 딸까지 본 이들 부부는 8식솔의 대가정으로 되였다. 20년간 세 로인을 정성껏 모시면서 세 딸을 보살펴야 하는 김죽화인들 그 고생이야말로 이루다 말할수없이 눈물겨웠다. 특히 남편이 방문학자로 일본에서 학술연구를 진행하는 2년간, 죽화는 혼자서 저녁늦도록 세 로인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로인들이 잠든후에는 밤을 패며 교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이른 새벽 4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러다보니 그의 수면시간은 줄곧 고작해야 4, 5시간밖에 안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급교사, 공훈교사, 전국청년련합회 상무위원, 전국로력모범 등 영예를 수두룩이 안았다.

김죽화는 결혼해서 받은 첫달 로임부터 줄곧 시어머니에게 몽땅 맡겼으며 무엇이나 시어머니뜻에 따랐다.

갓 시집올 때 김죽화는 시어머니가 옷이 없는것을 보고 례장받은 옷 두견지를 시어머니에게 주었다. 그러고나니 봄철에 자신은 기지옷을 벗고나면 인차 적삼을 입을 처지였다.

한번은 북경에 전국청년대표대회에 참가하러 가게 되였는데 죽화는 입고나설만한 옷이 없어 난감했다. 그는 시어머니가 주는 소비돈으로 시어머니에게 새옷을 사주고 자신은 몇해전 시어머니에게 해주었던 초라한 화학섬유옷을 입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때로부터 김죽화는 옷깃이 닳아서 보풀이 일면 그 옷을 바느실로 여며서 입고 3년동안 7차나 북경에 가 큰 대회에 참가하였고 중앙수장의 접견도 받았다.

김죽화는 고혈압이 엄중한 환자였다. 1979년 북경회의에 참가해야 했으므로 그는 평소 모은 돈으로 큰 마음을 먹고 의사의 건의대로 《우황강압환》을 50원에 두통을 샀다. 당시 50원이면 죽화의 한달 로임이였다. 그 비싼 약을 입에 넣자니 죽화는 아까워 먹지 않고 역시 고혈압으로 시름시름 앓는 시어머니에게 드리고 자신은 1원짜리 약을 사서 먹었다.

죽화가 시어머니에 대한 충성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죽화는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운신하지 못하자 작은 침대를 사서 눞여놓고 목욕을 깨끗이 씻어드렸으며 아침, 저녁으로 하신을 약솜으로 깨끗이 씻어드렸다. 지난해 88세에 저세상으로 가면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으뜸 며느리》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88세에 저세상으로 가면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최고의 며느리》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김죽화와 남편 박춘걸은 간고한 가정환경에서도 세 딸을 훌륭한 인재로 육성했다. 세 딸이 소학교에 따닐 때 있은 일이다. 한번은 세 딸이 기차타고 고모네 집에 놀러갔었는데 차표 한장을 적게 사가지고 빠져나왔다. 이 일을 안 김죽화는 그 자리에서 세딸을 데리고 역전에 가서 사과를 하게 한후 표값을 치르게 하였으며 성실하게 자라야 한다는 도리를 일깨워주었다. 현재 큰딸 박경하(39세)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회사에서 사업하고있다. 일본 류학 아르바이트하는 중에서도 조국의 재해구와 빈곤학생들에게 선후로 10여만원의 돈을 의연해오면서 300여명의 빈곤대학생을 해외의 지원으로 조학금을 받게 하였으며 외자기업을 통해 리석채조선족학교에 83만원에 달하는 시설을 개설하게 했다.

무순경찰학교를 졸업한 둘째딸은 박경애(36세)는 우수한 인민경찰이며 셋째딸 박경선(34세)은 중국인민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생공부를 마친후 일본회사에서 근무하고있다.

남편 박춘걸도 매년 교사절, 교내운동대회때면 봉사에 적극나서 돕는다. 지난해에는 교사절을 맞으며 교원장려금으로 2만원의 돈을 선뜻 내놓았다.

중국자질교육의 열쇠: 중소학교평가표준과 시험제도

김죽화는 련속 3기 전국당대표, 전국인대대표로 있으면서 농촌교육, 민족교육, 자질교육에 대한 건의를 많이 제기하였다.

올해에도 11기 전국인대2차회의에서 그는 《국가에서 자질교육과 응시교육의 가장 적합한 결합점을 찾아 하루속히 자질교육의 내함에 부합되는 조작성이 강하고 효과적인 중소학교 교육평가표준 및 시험제도를 출범할데 대한 건의》 등 관건적인 7가지를 제기하였다.

그 리유를 김죽화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부에서는 20여년간 자질교육을 추진하였지만 아직 뚜렷한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원인은 《점수》나 《승학률》을 중시하면서 일원화된 교육평가표준을 계속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껏 많은 부분에서 자질교육의 《전면발전 촉진》이나 《인간위주》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하였다.

중소학교 교육현실은 매우 잔혹하다. 많은 학생들은 극도로 《힘든 상태》에 있으며 지어 유치원의 아이들도 힘든 상태에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도 따라 힘들고 교사들은 더욱 힘들다. 3억여명의 학생은 3억여가구의 가정을 말하는데 이렇게 볼 때 중화민족의 3/4인구가 극도로 《힘든 상태》에 처해있다고 볼수 있다. 이런 심각한 《힘든 상태》에서 오랜기간 자질교육을 웨쳐왔지만 아직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있는데 이는 학교, 정부 교육부문에서 교육의 관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자질교육을 추진시키려면 자질교육을 법정교육임무에 편입시킬 때 동시에 상응한 평가체계를 제정하여 출범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나는 국가에서 자질교육의 내함에 부합되면서 자질교육에 따르는 조작성이 강하고 효과적인 중소학교평가표준과 시험제도를 출범시킬 건의를 제출하였던것이다.

편집/기자: [ 신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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