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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실의 발상지 두만강 유역을 이야기한다/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3:00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훈춘 삼가자만족자치향에 있는 배우성(裴優城)

배우성 裴優城)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왼쪽부터 조성일, 정창권, 김관웅, 리태근

송어가 많이 잡히는 두만강과 훈춘강의 합수목

지난 4월 24일, 나는 內子와 함께 두만강 하류에 자리 잡은 훈춘 삼가자만족자치향에 있는 裴優城을 답사하는 길에 올랐다. 이제는 훈춘까지 고속도로가 뚫렸기에 한 시간 남짓하니 훈춘시가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훈춘시재정국의 훈춘 토박이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우리는 곧장 배우성으로 행했다. 10여분 지나서 우리가 탄 두 대의 승용차는 배우성에 닿았다. 지금은 배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이 동네를 琿春市 三家子滿族自治鄕 高力城村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흔히 고력성이라고들 하지만 淸나라시절에는 裴優城이라고 했고 元明시기에는 奚關城(조선조 초기에는 원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이라고 했다.

배우성 남문 앞에 내려서 성을 둘러보니 정방형의 토성이였다. 누누 수백년의 풍우로 하여 성벽이 많이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면에서 어떤 구간은 3메터 이상은 더 되어 보였다.『琿春史志』에서는 배우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배우성은 현소재지에서 바로 서쪽으로 약 20리 상거하였다. 사방형으로서 그 한 면의 길이는 180장이고 성벽북쪽은 높이가 3자 이상이다. 성밖에는 성황당이 있는데 그 넓이가 2장 5척이 되고 깊이가 3,4척이 된다. 사면에 각각 문 하나씩 있고 남문밖에는 옹성이 있는데 그 우에는 흙으로 쌓아 만든 보루가 19개 있다.”

배우성은 주변은 강물이 얼지 않는 봄, 여름, 가을에는 주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겨울이면 주로 메돼지, 노루, 사슴 같은 산짐승을 사냥해서 먹고 살아온 여진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살기 좋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배우성의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훈춘강이 있고, 서쪽 5리 떨어진 곳에 두만강이 바다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해동이 되기만 하면 두만강입구와 이어져 있는 동해로부터 송어, 련어 같은 수많은 바다고기들이 알을 슬러 강을 거슬러올라오고 토종고기 또한 많이 잡히는 고장이 바로 두만강과 훈춘강의 합수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연한 훈춘벌과 그 훈춘벌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과 울창한 수림은 漁獵族인 여진인들의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이였으리라.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이니까 누구나 탐내는 고장이라 력사상에서 이 고장에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빈번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군복무를 하던 지난 세기 70년대 초반에 나는 바로 팔련성 옛터와 멀지않은 8.1농장에서 1년 동안 벼농사를 한 적이 있었다. 송어가 올라오는 봄철이 되기만 하면 우리 련대에서는 바로 배우성이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로 송어를 사러 가군 했다. 그 송어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3.40년대에는 이 두만강과 훈춘강의 합수목에서 송어철에 송어가 바다에서 올라오기 시작하면 달구지로도 미처 실어 나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성은 연변만이 아니라 훈춘에서만도 그 규모가 별로 대단한 성곽유적지는 아니다. 바로 배우성 서쪽으로 2,3리 상거한 곳에 금나라시기의 溫特赫部城 유적이 또 있고, 또 서북쪽으로 2,3리만 더 가면 발해시절의 도읍지였던 동경룡원부의 유적지인 팔련성 옛 성터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성곽들의 규모는 모두 배우성보다 더 크다. 그러나 성곽 유적지는 크다고만 해서 유명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작아도 그 속에 중요한 력사사실과 력사인물들의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어야 유명해지는 법이다.



해관성(奚關城)은 淸나라의 王業이 시작된 곳

주지하다시피 만족공동체는 명나라식의 녀진, 주요하게는 建州 女眞으로부터 발전되였으며 淸나라 皇室의 조상은 바로 建州衛의 斡朶里부락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면 이 斡朶里부락은 어디에서 발원했는가?

원나라시기 斡朶里부락을 포함한 여진족의 세 개 부락은 지금의 흑룡강성 依蘭, 湯源, 樺川 등지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세 부락은 元末에 이미 원래의 거주지로부터 남하하여 지금의 길림성 훈춘현과 조선의 경흥, 경원 일대에 이동하여 왔다고 한다. 바로 두만강하류에 이동하여 온 이후에 청나라황실의 시조인 童猛哥帖木兒(?--1433)와 그의 부친 童揮護는 훈춘의 해관성에서 태여났던 것이다. 그 뒤에 斡朶里부락은 다른 한 녀진부락인 兀狄哈부락을 습격을 당해 두만강을 건너가 경원, 경성 일대에서 떠돌다가 약 洪武 20년 좌우(1388년 좌우), 고려의 重臣인 李成桂의 招撫를 받아 阿木河(또는 斡木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그럼 이 阿木河(또는 斡木河)는 어느 고장인가?

阿木河(또는 斡木河)는 조선의 사서들에서는 흔히 吾音會라고 기록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會寧이다. 火兒阿(조선의 력사문헌들에서는 兀良哈이라고 기록했음)부락과 斡朶里부락은 모두 阿木河(또는 斡木河) 일대에서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前者는 좀 더 서쪽으로 지금의 룡시시에 속하는 삽합, 지신 백금 그리고 화룡현, 연길시 일대에서 살았는데 지금도 智新과 三合鄕 사이에 오랑캐령이라는 지명이 당년 오랑캐(兀良哈)부락이 이고 장에서 살았던 력사사실을 립중하고 있다. 後者는 오랑캐 부락의 동쪽인 지금의 회령과 그 印의 조선 함경북도 지방에서 널려 살았다. 그때 오랑캐 부락의 두령은 阿哈出이였고, 斡朶里부락의 두령은 童猛哥帖木兒였다.



조선문헌들에 기록된 童猛哥帖木兒의 래력

중국의 사서나 문헌들보다는 조선쪽의 史書나 文獻들에서 청나라의 황실의 시조 童猛哥帖木兒의 래력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기록되여 있다. 이를테면 우에서 언급한 것처럼 童猛哥帖木兒와 그의 부친 동휘호의 출생지를 명확하게 밝힌 것은『李朝世宗實錄』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만강유역의 여진인들은 고려인들과 오래 동안 지리적으로 밀착해서 이웃으로 살아왔고 고려왕조와 밀접한 련관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조선왕조의 건국서사시인『龍飛御天歌』의 기록에 의하면 斡朶里豆漫(즉斡朶里의 수령)인 夾溫猛哥帖木兒(“갸온멍거터물”이라고 조선어로 기록했음) 의 姓은 夾溫(갸온)인데 바로 금나라시기의 夾溫(갸온)으로서 漢姓으로는 佟 또는 童인데, 한성을 붙여서 중국의 적잖은 史書들에서는 童猛哥帖木兒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많은 정보들은 斡朶里부락은 금나라 여진인들의 한 갈래의 후예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童猛哥帖木兒는 지금의 중국 훈춘에서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慶源 등지에 떠도는 사이에 리성계를 따라서 왜구를 퇴치하는 전투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기에 고려말기에 고려조정으로부터 鏡城 등지의 萬戶로 冊封되였으며 후에는 高麗朝廷의 允許를 받아 阿木河 부근의 北峴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금의 회령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로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심지어 만족의 조상신화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滿洲源流考』,《清秘史》라는 淸나라시기의 正史의 記載에 따르면 滿族은 長白山 동남쪽에 있는 부쿠리산(布庫里山) 아래의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가에서 기원되였다고 한다.

佛库伦者,长白山下一夷女也。……一日佛库伦与其长姊恩库伦、次姊正古伦,三人同浴于布库里山麓布尔湖里池,忽有鹊衔朱果,置库伦衣。佛取吞之,遽入腹,遂有孕。寻产一男,名布库里雍顺,而爱新觉罗为之姓。…… 既长,其母凌空而去,而别以小舫置儿其中,俾浮达彼岸。登陆折柳枝及蒿为坐具,端坐其上。适其地有三姓争为雄长,一人因取水至岸边,见之大奇。诘其所有来。小儿遂妄言:"我天女所生,将以定尔乱。"众益惊异,遂交手为舁, 引为酋长,并以女百里妻之。于是雍顺居长白山东俄漠惠之野俄朵里城,袭女真之旧称,号曰满洲。……

어느날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날아내려 이 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맞이는 은쿠룬(恩庫倫), 둘째는 정쿠룬(正庫倫), 셋째는 부쿠룬(佛庫倫)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목욕을 마치고 못가의 뭍에 오르자 신령스러운 까치가 붉은 색 나는 열매를 물고 날아서 지나가다가 부쿠룬(佛庫倫)의 옷우에 떨궈 놓았다고 한다. 그 색깔이 맑고 아름다운지라 부쿠룬은 심히 소중히 여기면서 거지고 놀다가 그만 입안에 넣었다고 한다. 옷을 입으려고 하다가 그 열매가 그만 배속으로 삼키게 되어 즉시에 감응을 받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쿠룬은 두 언니들을 보고 “나는 배가 무거우워져서 언니들과 같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지 못한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 라고 말하자 두 언니는 “우리들은 령단묘약을 먹어 죽을 리는 없다. 이건 아마도 하늘의 뜻이다. 네가 몸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서 하늘에 날아올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고는 부쿠룬을 내버려두고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부쿠룬은 후일에 사내애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말을 하고 신속하게 장성하여 갔다. 그 애의 이름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라고 지었다. 그 어미는 아들을 보고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 다름이 나니라 너로 하여금 어지러워진 나라를 평정하게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서 태여난 그 연유에 대해 일일이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배 한척을 주면서 물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그 땅에 이르게 되는데 선녀는 말을 마치자 별안간 사라져 버렸다. 그 아들은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인가가 있는 곳에 닿았다. 강기슭에 오르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의자를 엮어 만들고 홀로 그 우에 앉아있었다. 이 때 장백산 동남쪽의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에 있는 오도리(鄂多里, 성곽이나 부락의 이름)부락 내부에는 세 성이 있었는데 서로 제가 우두머리노릇을 하겠다고 종일 서로 살상을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마침 한 사람이 물을 길으려고 강가에 나왔다가 부쿠리옹순을 보고는 그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음을 보고는 부락에 돌아가서 여러 사람들을 보고 “자네들을 다투지 말게. 내가 물 길으러 갔다가 범상치 않은 남자를 보았는데, 아마도 하늘이 이 사람을 낸 것이 틀림없네. 모두 가서 그 분을 배알하도록 합세”라고 말했다. 세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는 싸움을 멈추고 같이 가서 그 사람을 배알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이상하서 물었더니 그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부쿠룬님이 낳은 사람이고 성은 애신(愛新, 한어로는 金이다) 죠로(覺羅, 성임)이고 이름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라고 부르네. 하늘은 나를 내려 보내여 너희들의 내란을 평정하라고 했는니라.”라고 말했다. 이렇게 어머니가 부탁한 대로 말했더니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면서 “이 분은 걸어서 가시게 해서는 안되오”라고 하면서 서로 손과 팔을 결어서 가마를 만들어서는 옹위하여 마을로 돌아왔다. 세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싸움을 중지하고 부쿠리옹순을 상전으로 모시고 백리네 가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고 그 호를 만주라고 정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만주의 시조이다.

이 신화는 아주 청소한 신화로서 신화 현장의 지명도 완전히 고증할 수 있다. 어머후이(鄂漠輝는 지명으로서 吾音會의 부동한 音譯임)에 있는 오도리(鄂多里, 성곽이나 부락의 이름으로서 斡朶里의 부동한 音譯임)부락은 바로 지금의 회령을 중심으로 하고 雄據하고 있었던 童猛哥帖木兒가 酋長을 하였던 斡朶里부락을 가리킨다. 어머후이(鄂漠輝)는 만족어로서 조선왕조 초기에는 오음회(五音會, 지명임)라고 기록하였다.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와 오음회(五音會, 지명임) 는 중국과 조선에서의 동일한 만족 지명에 대한 부동한 음역이다. 후에 세종대왕이 두만강변에 륙진을 설치하고 나서는 오음회(五音會)를 회령(會寧)이라고 고쳤는데, 오음회(五音會)라는 이 지방이 안녕해 지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세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올량합(兀良哈, 오랑캐), 올적합(兀狄哈, 우디거), 알타리(斡朶里, 오도리) 이 세 녀진족 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밖에도 “장백산 동북쪽에 있는 부쿠리산(布庫里山) 아래의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이 있다”고 했는데 “장백산 동남쪽”이라고 해야 맞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백산 동남쪽에 있는 三池淵은 가장 큰 못으로서 선녀가 내릴만한 곳이고 또 그래야만이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 거기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언이폐지하면 “만족시조신화”의 발생 현장은 바로 두만강의 상류, 중류지역이다. 그리고 이 만족의 조상신화의 행위주체는 바로 斡朶里부락의 사람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두만강유역의 녀진부락들을 쟁취하기 위한 明과 麗朝 사이의 암투

고려는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북방의 령토를 확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조선반도의 동북면에는 바로 여진인들이 살고있는 고장이였다. 고려는 여진인들에 대해 招撫와 무력에 의한 驅逐이라는 두 가지 책략을 구사하였다. 특히 전자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반도 동북면의 여진인들에 대한 고려조정의 招撫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古論豆蘭帖木兒(고란두란터물)가 자기 부락을 이끌고 고려에 몸을 의탁한 사실이다.

古論豆蘭帖木兒(1331-1402)는 바로 원래의 女眞姓은 佟이였는데 李豆蘭인데 후에 李芝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李豆蘭은 이로부터 童猛哥帖木兒과 성이 같음을 알 수 있는바 斡朶里부락 출신임을 알 수 있다. 1371년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北靑에 거주하며 李씨 성과 靑海를 본관으로 하사 받았다. 1380년, 리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阿只撥道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 1385년 리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하여 宣力佐命功臣으로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였다. 1388년 威化島의 回軍에 참가하였으며 후에는 리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조선조 개국의 一等功臣으로 봉해지기도 했다. 두만강유역의 여진인들을 초무하는 과정에서 오래동안 여진인들과 같이 살아오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李子春과 그의 아들 李成桂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공양왕 때, 兀良哈과 斡朶里가 고려의 왕성에 찾아오니 리성계는 이들을 모두 자기 집에서 대접허여 그들을 성심으로 복종하게 하였다.

동시에 리성계는 조선조의 왕업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두만강유역의 여진인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 어쩌면 두만강유역의 여진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선조의 건립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였다. 바로 이러하였기에 리성계는 1392년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자기를 옹위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수백 명의 여진인들에게 포상을 내리게 되였던 것이다.

태조는 즉위하여 이들에게 千戶와 萬戶의 직책을 헤아려서 주고, 李豆蘭으로 하여금 女眞을 불러 안심시키도록 하니, 머리를 출어 헤치던 풍속이 모두 冠을 쓰고 허리띠를 매는 풍속을 따르고, 짐승 같은 행실을 고쳐 예의의 가르침을 익혀 나라 사람들과 서로 혼인을 했다. 그리고 세금을 내고 부역을 지니 편호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또 추장에게 부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모두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孔州이북에서 甲山까지 고을과 진을 설치하여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또 학교를 세워 경서를 가르치니 문무의 정치가 이에 모두 행해졌다. 사방 천리에 있는 것이 모두 판적에 들어갔다.

포상을 받은 여진인들중에는 청나라 황실의 肇祖인 童猛哥帖木兒도 있었다. 그는 倭寇와 싸움에서 세운 軍功으로 鏡城 지방의 만호로 위임되였다. 명나라 영락 6년(1405년) 조선 조정에서는 童猛哥帖木兒에게 淸心丸, 蘇合丸, 천 같은 약품과 물건을 下賜하였다. 이밖에도 조선 조정에서 자기가 령도하는 斡朶里부락에 식량, 소금, 철, 된장 같은 생필품들을 조달하여 주므로 조선 조정을 위하여 힘을 다하겠다고 결심을 표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童猛哥帖木兒와 그가 이끄는 斡朶里부락의 여진인들을 懷柔하여 동북면을 안정시키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세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斡朶里부락이 살고있는 두만강 동쪽 연안 일대를 조선의 관할하 에 넣을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명나라 조정에 요구했다. 童猛哥帖木兒는 조선 조정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므로 “우리들은 조선에 귀순하지 20여년이나 됩니다. 조선은 또 大明을 따르면서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들이 하필 대명을 섬길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조선 조정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사실 童猛哥帖木兒의 동생들이나 기타 친척들 중에는 조선녀자를 안내로 맞아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청나라 황실의 피에는 조선인의 피도 섞여있음이 분명하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倭寇를 정벌하는 면에서나 朝鮮朝의 建國에 커다란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남북도의 道民들의 피에는 여진인의 피가 많이 섞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조정은 리씨 조선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다 자기 백성으로 만들고 나아가서는 두만강 넘어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만강유역의 여진인들을 복판에 놓고 명나라와 조선 조정에서는 줄다리기를 시작하였다. 영락초년으로부터 명나라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에 대한 招撫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朝鮮의 北進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명나라 조정에서는 1403년에 여진인들이 살고있는 두만강유역에 건주위(建州衛)라는 행정구역을 새로 설치한다. 총명한 童猛哥帖木兒는 조선 조정에 향해서는 자신의 충성이 변함없다고 하면서도 실제상에서는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고 명나라의 도읍에 가서 入朝하였으며 마음은 명나라 조정에 넘어가서 建州衛의 지휘로 되었다. 명나라에 대해 童猛哥帖木兒는 겉으로는 순종하지 않는 척 했지만 내심으로는 복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조정과 명나라조정 사이에서 묘하게 兩 다리 걸치기를 하면서 명나라와 조선 조정으로 얻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자기의 부락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명나라 조정의 이런 조치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 좋아할 리 만무했다. 1406년, 당시 조선 조정의 重臣이였던 權近은 태종 李芳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전하께서 충성을 다 하여 큰 나라를 섬기는 정성으로 천제의 환심을 얻으려고 한 것은 헛된 일이였나이다. 천제께서는 우리나라의 동쪽 구석에 건주를 설치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숨통을 조이고 우리나라의 오른쪽 팔을 묶어 놓으려는 것이옵니다. 우리나라의 밖에는 雄藩을 세워서 우리나라 백성들을 유인하고 우리나라 내부에는 異寵을 더해 우리나라의 방어를 해체시키려고 하는데 그 의도를 정말로 알기 어렵사옵니다.”

권근의 이 말은 당시 조선 조정의 우려와 근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제상에서는 명나라의 영락황제가 두만강유역에 건주를 설치하려한 의도와 목적을 보여주었다.

조선조의 태종 리방원은 童猛哥帖木兒와 명나라 조정 사이의 관계를 리간시키려고 하는 외에도 慶源에서 벌렸던 여진인들과의 무역을 페쇄하면서 명나라 조정에서 건주위를 두만강에 설치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했다.

이로부터 조선과 두만강 녀진부락 사이에는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여 兀狄哈 등 여진부락과 조선 사이에는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리하여 童猛哥帖木兒와 조선 사이에도 모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대책은 “진심으로 훈도하고 유도하여 여진인들이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하지만 만일 복종하지 않으면 위엄으로 다스리는 것”이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이러한 대책은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건주녀진의 세력이 날로 강해져 조선 동북면의 안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六鎭開拓과 두만강 녀진의 실패

조선 조정은 건주녀진을 자기의 관할하의 백성으로 만들려는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무력을 동원하여 두만강 동쪽 연안의 만주부락들을 두만강 유역에서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는 1433년 童猛哥帖木兒가 兀狄哈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야 조선함북 회령에서 50여리 상거한 豊山面에 매장되였다. 그 후 조선 조정에서는 더욱 빈번히 군사를 풀어서 두만강 동쪽 연안에 살고있는 斡朶里부락을 두만강 건너 서쪽 연안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조선은 두만강연안에 경흥, 경성, 온성, 종성, 화령, 부령 이 六鎭을 개척했다. 이때로부터 두만강 동쪽연안은 조선의 판도에로 완전하게 들어가게 되었던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童猛哥帖木兒의 아들인 범찰과 동산 등은 부락을 거느리고 조선에서 쫒겨나서 지금의 료녕성 신빈현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명나라 정통년간(1436-1449)의 建州衛의 主體를 이루었으며 후일의 만족의 주체적인 힘으로 되었다. 童猛哥帖木兒의 6대손이 淸나라의 기틀을 세워놓은 천고의 영웅 努爾哈赤이다.

淸나라 皇室의 조상인 童猛哥帖木兒와 그가 이끌었던 斡朶里부락과 고려, 조선과의 밀접한 교류관계는 백년 남짓이 이어졌었는바 그 관계는 처음에는 아주 긴밀하고 원활하였지만 나중에는 전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童猛哥帖木兒가 이끌었던 斡朶里부락은 끝내 두만강유역에서 쫒겨나서 부득이 조선의 북부변계인 두만강 유역을 떠나게 되었다. 이 한 단락의 조선과 두만강녀진 사이의 관계사는 努爾哈赤 시대의 後金과 朝鮮의 관계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바로 180여년 전에 두만강연안에서 쫓아냈던. “野人”이라고 수백년 동안 멸시를 했던 이 건주녀진한테 조선은 1627년, 1637년 두 차례에 걸쳐 참패를 당하고 서울이 함락당하고 임금이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조선함북도와 연변지역에 지금도 가득 널려있는 여진인들이 남긴 성채와 유적들과 조선 함경북도의 경원, 경흥, 종성, 회령 등 여러 군들 그리고 연변지역의 민간전설이나 민담들에는 아직도 斡朶里부락 및 淸太祖와 관련된 많은 전설이나 민담이 많이 류전되여 있는 것이다.

차를 차고 돌아오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력사의 강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나는 조선조의 유명한 명기 황진이의 시조를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두만강은 수많은 력사의 비밀을 안고 소리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두만강 유역의 력사의 진실을 파헤쳐 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리라. 그 력사의 진실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함양하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리라.

2009년 5월 3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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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비연예인과 결혼했던 가수 백아연이 이번에는 임신소식을 전해 많은 축하를 받고 있다. 지난달 30일, 백아연은 자신의 SNS를 통해 임신 5개월 차 초음파 사진을 공개했다. 그녀는 "저희 가족에게 선물같은 아기천사가 찾아왔다"며 임신소식을 전했다.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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