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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북만성위 비밀련락원 량재문의 전기적경력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2.03.17일 12:47
항일명장 조상지와 어깨겯고 싸워온 조선족 항일투사

  (흑룡강신문=하얼빈) 동북지역 14년간의 항일전쟁은 중국인민이 외래침략에 맞서 싸운 한편의 서사시일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 소련 등 나라 인민들이 공동으로 일본침략자를 격패시킨 감동적인 서사시이기도 하다. 동북항일전쟁사에서는 존경할만한 무수한 항일영웅들이 나타났는데 량재문이 바로 그중의 한사람이다.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항일에 투신

  량재문의 원명은 량재서이며 리명철, 양학봉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량대인, 양대인이란 별명을 쓰기도 했으며 '날아다니는 사람(飞毛腿)’이라 불리기도 했다. 1908년 7월 21일 한국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태여난 그는 1913년 어린 몸으로 아버지 량운환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와 선후로 료녕성 단동, 개원과 흑룡강성 연수, 주하를 전전하며 지주집 머슴살이를 했다.

  '9.18'사변후 일제는 조선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마수를 뻗쳐 동북을 함락하였다. 량재문의 아버지는 일제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다섯식구를 거느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연수를 거쳐 조선인이 많이 살고있는 주하현 마의하 동쪽에 이르렀을 때 중공주하현위 서기인 김석휘를 만났다. 김석휘는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한국이 망한지 20년이 되는데 돌아간다고 해도 망국노를 면치 못할것이요, 그리고 돌아가다가 일본놈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일본놈과 싸워 보지 않으시려오?"라고 하며 만류했다. 이렇게 되여 량재문은 동생 량재춘, 량재일과 함께 주하현 마의하 하동에서 반일청년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것이 1932년 3월이였다.

  그해 5월 그는 공청단에 가입했으며 단지부위원, 흑룡궁단지부서기, 중공 주하중심현위 련락원 등 직을 력임했다. 그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항일을 선전하면서 반일회원을 양성했다. '9.18'사변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는 김석휘, 주신양 등 주하중심현위의 책임자들과 함께 2천여명을 조직해 대규모 반일시위행진을 단행함으로써 일제와 위만군의 통치를 타격했고 민중들의 항일투지를 고무했다.

  시위행진이 탄압된후 적들은 량재문을 잡으려고 날뛰였다. 량재문을 잡지 못하자 놈들은 그의 어머니와 동생을 잡아다 고문했다. 량재문의 어머니 박씨는 밀양태생으로 순박한 주부였는데 아들의 행방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흉악한 일본군은 그녀를 군도로 찔러죽이고말았다. 량재문의 동생 량재춘도 놈들의 고문에 정신착란이 일어나 인사불성이 되고말았다. 이는 일제에 대한 량재문의 원한을 깊게 했고 항일의 결심을 굳혔다. 그는 항일에 참가한 동생 량재일에게 집에 돌아가 아버지와 정신착란인 량재춘을 돌보게 하고 자신은 계속 항일활동을 했다.

1946년 량재문과 그의 부인이 함께 찍은 사진

 항일선전을 확대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항일활동에 참가하도록 동원하기 위해 그는 식솔들의 1년 식량인 벼 50석을 팔아 300원을 장만하여 종이와 유묵을 사서 대량의 반일전단지를 찍어 연수, 목란, 방정, 통하, 오상, 일면파 등지에 뿌림으로써 각지의 항일조직을 건립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일으켜 주하중심현위와 공청단현위의 표창을 받았다.

  1933년 봄, 그는 흑룡궁에 파견되여 단지부서기를 담임한후 한어가 서투르고 인맥이 없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지의 한족농민을 도와 수전농사를 지어주고 결의형제를 맺는 등 방법으로 많은 반일회원과 공청단원을 양성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항일골간으로 되였고 학귀림 등은 이름난 항일명장으로 되였다. 량재문은 또 현위의 지시에 따라 저명한 항일영웅 리추악(李秋岳, 원 현위 부녀위원), 김백파(원 현위서기)와 당원들인 김로흔, 김선기, 김기동, 김해룡, 권선희 등 20여명의 항일골간들을 마의하 하동에서 흑룡궁 등지로 안전하게 전이시켰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 창설

  1933년 상반년 량재문은 중공주하중심현위의 지시에 따라 의형제인 개명지주 학지주를 통해 주하현위 군사위원인 리계동(조선족 로혁명가)을 의용군 손조양부대에 성공적으로 파견했다. 리계동은 착오적으로 당적을 제명당하고 홀홀단신으로 손조양부대에 잠입한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 조상지와 함께 부대를 항일부대로 개조시키려 했다. 노력이 실패한후 리계동이 비밀리에 양성한 공산당원 왕덕전(王德全)은 적의 특무가 조상지를 살해하려 꾀하고있다는 긴급정보를 리계동에게 알렸고 리계동은 바로 이 사실을 비밀리에 조상지에게 알린후 왕덕전 등 7명과 함께 장단총 11자루를 갖고 손조양부대를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량재문은 조상지와 주하중심현위의 련락임무를 수행하면서 조상지의 제일 믿음직한 친밀한 전우로 되여 조상지가 주하동북반일유격대를 창설하기 위해 진행한 첫 전투부터 시작하여 그후의 허다한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는 제일 위험한 정찰임무를 맡으면서 동북항일련군제3군의 창조와 발전에 특수한 기여를 하였다.

  바로 이 7명을 골간으로 한 13명은 1933년 10월 10일 주하동북반일유격대를 창설, 조상지가 대장을 담임했다. 이 부대가 바로 널리 이름을 떨친 동북항일련군 제3군이다. 13명의 대원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이 작은 부대는 반년만에 450여명의 전사를 거느린 하동지대로 발전했으며 1936년에 이르러 10개 사, 6천여명으로 발전해 동북항일련군 11개 부대가운데서 인원이 가장 많고 전투력이 가장 강한 부대로 되였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량재문은 중기관총수와 포수로 적들과 싸우면서 수차 사선을 넘나들었다. 1933년 12월 대량하전투에서 그는 조상지와 함께 일본군과 위만군 40여명을 쓰러눕혔고 1933년 강가로공격전투에 참가했으며 1934년 6월 빈현공격전투에 참가할 때 삼차하에서 300여명의 일본군과 400여명의 위만군을 만나 격전끝에 일본군 50여명과 위만군 60여명을 격살, 아군은 5명이 살상된외 무사히 포위를 뚫고 나왔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150명(그중 유격대원 70명, 개편된 의용군 80명)밖에 안되였는데 주하유격대가 창설된후 치렀던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1934년 9월 오상성공격전투에 참가했는데 아군은 2개 대대였고 적은 3개 련대였지만 밤낮 하루동안의 격렬한 전투를 거쳐 성을 빼앗았다. 1934년말 오상성을 재차 공격했는데 량재문과 다른 한 유격대원은 야음을 타 일본군의 초소에 잠입, 보초병을 죽인후 부대가 쳐들어가 단잠에 빠져있는 적들을 몽땅 무장해제하고 3개 련의 적을 포로했다.

  겹겹의 봉쇄를 뚫고 비밀련락임무 출중하게 완수

  량재문은 항일에 참가하면서부터 비밀련락임무를 맡았다. 부대가 장대해진후에도 별다른 통신설비가 없었으므로 주하현위에서는 그에게 전직 비밀련락원을 맡겼다. 당시 일본군은 '삼광정책(이른바 모조리 죽이고 빼앗고 불사르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봉쇄를 엄밀히 하여 무인지역을 만들고 특무, 반역자를 리용하여 비밀련락소를 파괴했다. 그러나 량재문은 침착하고 지혜롭게 적들의 봉쇄선을 뚫고 부대와 지방을 무수히 오가며 조직에서 맡긴 련락임무를 출중하게 수행해냈다.

  원 항일련군 선전과장 우보화(于保和)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1935년 봄, 적들은 유격구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우리와 외부의 련락은 현위 련락원인 량재문이 책임졌다. 그는 조선족이였는데 기민하고 도로사정에 밝았으며 근면하게 당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며 당에 충성하였으므로 동지들은 그를 아주 높게 평가하며 그에게 '량대인(梁大人)'이란 별호를 달아주었다. 주하단위서기 주신양도 '량재문동지는 현위 교통원으로 매우 충성스럽고 적극적인 좋은 동지'라고 칭찬했다."

  1936년 여름 풍중운 등이 거느린 중공주하현위가 페허로 된 하동유격구를 철수해 탕원으로 전이할 때도 량재문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길안내를 하여 적들의 겹겹의 봉쇄를 뚫고 안전하게 탕원현 모아산 제3군 밀영에 도착함으로써 두 중심현위가 합병하여 중공북만림시성위를 구성하는데 기여했다.

1932년 8월 30일, 파언성을 함락시킨후 찍은 사진. 조상지(앞줄 중간)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다. 1년후 그는 항일련군 제3군을 창설하였다.

  1936년 9월 18일 중공북만림시성위가 성립된후 량재문은 또 성위 비밀련락원 겸 국제련락원을 담임했다. 같은 해 10월 5일 북만림시성위서기 풍중운과 선전부장 장란생의 소개로 량재문은 중국공산당원으로 되였다. 1937년 동북항일련군 제3군 계찰처 부처장을 겸임하면서 그의 임무는 더욱 중해졌고 어려워졌다. 그의 발길은 성위 주둔지 탕왕하후방근거지를 중심으로 남쪽의 주하에서부터 서쪽의 해륜, 북쪽의 가음에서 동쪽의 밀산에 이르기까지 수만리에 닿았고 항일련군 3, 4, 5, 6, 8, 9, 11군과 길동성위지간을 도보로 무수히 오가면서 천신만고로 북만성위의 중요한 문건, 정보와 지시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전달했다. 항일로전사 리민은 이렇게 회고한다. "량재문동지는 내가 1936년 겨울 이춘시 호량하에 있는 제6군 밀영에서 알았지요. 그때 량재문은 북만성위 련락원 겸 국제련락원이였는데 사업을 훌륭하게 잘해 항일전쟁기간 뛰여난 기여를 했지요.”

  량재문은 비밀련락원으로 있는기간 정보를 거침없이 전달하였을뿐 아니라 한번도 적들에게 발견되거나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항일사업에 어떤 손실도 끼치지 않았다.

1937년 겨울, 량재문은 국제련락원으로 중공북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총사령 조상지(1936년1월28일 탕원현 길흥구(吉兴沟)에서 소집한 '동북반일련합군정련석확대회의'에서 조상지를 동북항일련군총사령으로 선거했음)의 파견으로 국경을 넘어 소련홍군 원동군구 사령 블류하르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1938년 2월 북만성위의 파견으로 두번째로 소련으로 건너가 조상지와 만나기로 했는데(1938년 1월초 조상지가 소련에 도착하자마자 1년반 갇혔음) 뜻밖에도 소련측에1년반이나 갇혀있게 되였다. 후에 '오해'가 풀린후 소련홍군 국경사령부에서 항일소분대의 정찰과 특수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는 흑룡강성북부의 가음현에서 길림성동남부의 훈춘현에 이르기까지 수천킬로미터의 변경선을 무수히 오가며 일본군의 공사와 병력배치 및 군사요새 등 정황을 정찰하면서 위험한 특수정찰임무를 순리롭게 수행했다.

4년간의 천신만고를 거쳐 소련홍군이 동북을 진공하여 최종 일본파시스트를 소멸하는데 극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소련홍군의 선두부대와 함게 목단강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흉악한 일본관동군이 무릎을 꿇고 투항하는 최후의 승리를 보게 되였다.

량재문(앞줄 오른쪽 두번째)일가의 가족사진(두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 사람이 본문 작자 최광엽임).

  일본이 투항한후 그는 소련홍군 목단강주둔 위술사령부의 작전참모 겸 번역으로 있었으며 후에 목단강군구 후근부 부부장, 탕크수리공장 공장장 등 직을 맡았다. 1948년 송강성 민정청 민족사무과 부과장으로 전근했고 1950년 3월 병으로 휴양하게 되였다. 1955년 흑룡강성 화천현민정국 국장으로 전근했으며 1959년 화남현위생국 국장으로 있다가 1965년에 리직휴양했다.

  1979년 11월 량재문은 71세를 일기로 병사, 그의 유골은 가목사시혁명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최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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