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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46)—상해림시정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8.09일 15:41
1932년 4월 29일 상해 황포강반에 울렸던 멸적의 폭음소리는 아득히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진 커다란 충격은 아직까지도 가셔지지 않고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로신공원의 기념정자인 매정을 찾아와 윤봉길의사를 기념하고있다. 사람들은 일제침략자들에게 정의적인 일격을 가한 윤봉길의사의 업적과 헌신적인 정신에 경탄을 표하면서 숙연히 머리를 숙인다.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 일제의 야수적인 폭압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하여주었던 윤봉길의사의 장쾌한 거사는 조선반일투쟁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질뿐만아니라 중국인민의 항쟁도 크게 고무해주었다. 아울러 조선민족은 불굴의 민족이고 견강한 민족임을 세인들에게 과시해주었다.

중국국민정부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인 독립운동을 알게 되였고 그 힘을 알게 되였으며 물심량면으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주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상해로신공원 매원의 기념정자는 1994년에 축조되고 2002년 12월 29일부터 대외로 개방하였다.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홍구공원, 지금의 로신공원에서 남쪽으로 15분쯤 걸어가면 상해의 유명한 문화명인거리인 다륜로(多伦路)에 이르게 된다. 여기는 중국의 쟁쟁한 현대문학거장들인 로신, 모순(茅盾), 곽말약(郭沫若), 엽성도(叶圣陶) 뿐만아니라 정령(丁玲), 유석(柔石)을 비롯한 중국좌익작가련맹(中国左翼作家联盟)의 주요인사들이 문학창작활동을 하면서 족적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다륜로의 중국좌익작가련맹 옛터 기념관.

좌익작가련맹의 렬사들동상.

1930년 3월 2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문화단체인 중국좌익작가련맹이 바로 이 거리에서 창립대회를 소집하였다.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있던 조선인 혁명가이며 리론가이며 문필가인 김규광(김성숙)도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찍 북경에서 《혁명》잡지를 꾸렸고 후에는 조선민족통일전선활동과 조선의용대창설을 적극 주도하면서 《민족전선》과 《조선의용대통신》을 주필하기도 하였다.

고풍적인 거리를 가노라면 량켠에 대부분 2,3층 되는 작은 건물들이 줄지어있다. 우층은 주민들의 거주용으로 사용되고 1층은 도자기, 서예작품, 문방구 같은것을 파는 매점으로 되어있었다.

다륜로 201농(弄) 2번지에 이르면 3층으로 된 서양식 작은 건물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좌익작가련맹 유적지이다. 유적지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있었다.

기념관간판이 있는 문을 들어가면 정원이 나타나고 정원을 걸쳐 건물에 들어서면 농촌에서 흔히 볼수 있는 소학교교실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은 흑판 하나가 정면에 붙어있고 그 에는 검은 교탁이 놓여져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기다란 나무걸상이 한줄에 4개씩 두줄 놓여있었다. 벽에는 좌익작가련맹의 주요인물들인 로신, 심단선(沈端先), 전행촌(钱杏村), 전한(田汉), 정백기(郑伯奇), 홍령비(洪灵菲)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들은 모두 좌익작가련합회의 상무위원이였다.

중국좌익작가련맹의 기수였던 대문호 로신은 조선유지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었고 조선의 독립투쟁과 혁명활동을 많이 동정하고 지지해주었다. 상해시절 로신은 많은 조선청년들을 만나 동방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지하고 문학창작에 진력할것을 이야기했다. 당시 동아일보 상해특파기자로 있던 신언준선생이 로신을 방문하고 로신방문기를 썼다. 방문기는 중국 신문화운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참고자료로 되고있다.

20세기 30년대 중국 사상문화전선의 전투적인 기치로서 중국혁명사와 현대문학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긴 좌익작가련맹이 이토록 간소한 곳에서 열렸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힘들고 엄연했던 당시의 환경을 느낄수 있었다.

상해에서의 조선인 혁명활동과 독립운동은 두 줄기로 파악할수 있다. 하나는 림시정부수립과 그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림시정부외 기타 혁명단체의 활동이다.

상해답사에서 만났던 상해복단대학 한국연구센터의 석원화(石源华) 교수는 30년대 상해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상황에 대하여 비교적 전면적으로 소개해주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다음 한국 교민들이 가장 많이 간 곳이 중국 동북입니다. 그 다음으로 상해에 비교적 많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상해는 한국에서 바다 길로 멀지 않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낡은 중국의 상해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조계지가 있었습니다. 조계지는 중국정부에서 독립되여 그 관할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각국 정치망명자들, 혁명자들이 상해에 모여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한국을 놓고볼 때 많은 교민들 특히는 비교적 중요한 직업혁명가들이 상해에 집결하게 되였습니다. 맑스주의를 신앙하든지 무정부주의를 신앙하든지 혹은 자본주의민주주의를 신앙하든지 조선봉건왕조의 복벽을 주장하는 사람이든지 부동한 신앙과 주장을 가진 많은 정치인들이 모여왔습니다. 상해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주요표징은 1919년 4월 3.1운동이후 상해에 수립된 한국림시정부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지는 1919년 림시정부자리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적지는 지금 찾을수 없습니다...》

인터뷰를 하고있는 상해복단대학의 석원화교수.

상해림시정부 옛터의 간판.

동방의 최대높이의 동방명주(东方明珠) 방송탑이 하늘높이 솟아있고 거대한 금융무역빌딩이 위용을 자랑하는 상해포동(浦东)지구는 급속한 중국경제장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황포강을 사이 두고 포동의 대안은 서양식 옛건물이 즐비한 금융중심지인 외탄(外滩)이다.

《3.1》운동이 있은후 상해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림시정부의 출범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려운형(吕运亨), 현순(玄楯), 선우혁(鲜于赫)을 비롯한 지사들은 상해에 림시 사무소를 정하고 림시정부설립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11일 설립된 상해 한국림시정부의 첫 지점이 보창로(宝昌路)에 생기게 되였다.

지금 상해에는 보창로가 없다. 보창로는 후에 하비로(霞飞路)로 바뀌였다가 지금에는 회해중로(淮海中路)로 고쳤다. 기재에 따라 원 보창로 321번지나 329번지에 따라 회해중로에 가서 찾아보았다. 다행히 번지수는 바뀌지 않아 림시정부옛터는 대체적으로 확인할수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대형백화점이 들어앉아있었다.

답사팀은 상해의 한국림시정부유적지를 찾아갔다. 급격히 변화되는 외부환경과 내부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하여 림시정부는 많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그 사무지점도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다. 1919년 10월 상해의 일본인 세력은 림시정부가 폭탄 제조를 비롯한 폭력활동을 주도한다는 구실로 림시정부를 프랑스조계지에서 축출할것을 조계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뒤 1922년 김익상, 오성륜의 유명한 다나까 저격사건이 있은후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림시정부는 영미조계지로 옮겼다. 지금 상해에 남아있는 림시정부유적지는 림시정부가 상해를 떠나게 되는 1932년까지 마지막으로 머물고 사무를 보던 곳으로서 보경리(宝庆里) 4번지에 위치했다. 보경리 4번지는 지금의 상해시 로만구(盧湾区) 마당로 306농 4번지이다.

도산 안창호(앞 가운데)를 비롯한 림정요인들.

1921년 림시정부 의정원 요원들.

회해중로에서 작은 골목길인 마당로(马当路)를 따라 300메터쯤 걸어가다가 마당로와 흥업로(兴业路)가 만나는 십자길에서 조금 더 가면 보경리 4번지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상해 전형적인 석고문(石库门)식 건물의 3층 가옥 한채가 있다. 검은 칠을 한 널문에는 동으로 된 문고리가 두개 있었고 거기에는 마당로 306농 4번지라는 주소가 밝혀진 하늘색 패쪽이 붙어있었다. 답사팀의 조선옥기자의 리포트다.

《여기는 1926년부터 1932년사이 상해림시정부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함께 일제의 탄압도 가심해졌습니다. 3.1운동의 민족독립정신을 가일층 발양하고 이어나가기 위해 각지에 널려있던 림시정부를 통합하여 일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프랑스조계지에 통합된 새로운 림시정부를 건립하게 되엿던것입니다. 1993년에 복원되여 대외로 개방한 이 청사는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거치는 명소로 부상했습니다.》

문을 들어서니 건물벽에 《대한민국림시정부옛터》라고 밝혀져있었고 작은 비석 하나가 있었다. 유적지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 있었고 많은 소중한 사진과 비디오영상자료로 림시정부의 력사를 관광자들에게 자상히 소개해주고있었다.

《3.1》운동의 결실인 한국림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성립되였다. 당시 로씨야, 상해, 서울 등지에 6개 림시정부가 각기 설립되였는데 국민의 념원에 따라 상해의 림시정부에 통합되였다. 상해림시정부는 《림시헌법》을 비롯한 법규를 제정하고 외교, 재정, 군사, 교육면의 노력을 기울렸다. 초기에는 국무총리제를 실시하고 리승만을 국무총리로 선거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리동휘, 법무총장에 리시영, 재무총장에 최재형(崔在亨), 교통총장에 문창범(文昌范)을 둠으로써 정부의 체제를 갖추어 출범하였다.

그후 다시 대통령제, 국무령제, 국무위원제를 실시하다가 상해를 떠나 중경에 간후로 국무주석제를 실시하였다. 리승만이 계속 미국에 있었기때문에 림시정부는 처음부터 혼잡을 거듭하였다. 리동휘, 신정, 박은식, 리상룡(李相龙), 홍진(洪震), 김구(金九)등이 선후로 림시정부를 이끌어나가는 견인차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내부 각 파벌의 분쟁은 끊임없었던탓으로 자체의 영향력과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림시정부의 간소한 집무실.

상해 답사팀(좌로부터 김철, 조향란, 조선옥, 최룡수교수)

림시정부는 상해에서 13년간 머물러있었다. 중국에서의 림시정부활동은 세개 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단계는 정부에서 조선국내에 관원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조선 각지에서 일본총독이 임명한 관리와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조직이 방대하고 목표가 컸기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여 실패하고말았다. 두번째 단계는 폭력적 암살행동을 개시하였다. 림시정부에서 애국지사나 의사들을 파견하여 일제 기관, 공장을 파괴하고 일본침략군 두목을 사살하게 하였다. 이 단계의 가장 큰 성과는 리봉창의사의 일본천황 습격행동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이였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은후 일제의 수색이 심했기때문에 림시정부는 상해에 발을 붙일수 없어 상해를 떠나게 되였다. 그리하여 림시정부는 세번째 단계의 투쟁에 들어가게 되였는데 이 시기는 중국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체의 군력을 키우는데 주력하게 되였다.

상해에 림시정부가 있게 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자들과 지사들이 상해에 모여왔다. 그리고 림시정부와 같지 않은 정견을 가진 사람들도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20세기 20, 30년대 상해는 조선혁명과 독립운동의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 상해에 모여온 조선지사들은 중국 현대력사의 전과정에 관여하였다. 《5.4》운동, 《5.30》운동, 북벌전쟁, 광주봉기, 중화쏘베트활동, 항일전쟁 중국의 중요한 력사사변에 모두 활약적인 조선인의 그림자를 보게 되였으며 이들은 중국혁명과 아울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여 굴함없이 싸웠던 것이다.

보경리 4번지 림시정부청사는 지금은 잘 보수되였지만 당시에는 작은 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사람씩만 겨우 올라갈수 있는 나무 계단, 침대 세개밖에 놓을수 없는 침실 그리고 작은 회의실과 검소한 주방은 모두 독립지사들의 어려운 삶을 보여주고있었다.

중국의 최대도시 상해시의 옛 골목길에 자리한 한국림시정부 유적지는 중한수교이후로 많은 한국인들이 찾아오고있다. 최근 10년사이만 하여도 련인수로 60여만명 관광자가 이곳을 찾아왔고 한국 로무현대통령을 비롯해 대통령 세분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유적지를 떠나면서 답사팀은 국제화로 나아가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상해의 림시정부유적지가 협력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훌륭한 역할을 계속 잘 발휘하기를 희망하였다.

/ 김성룡

편집/기자: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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