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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45)—의사 윤봉길

[기타] | 발행시간: 2011.08.09일 11:47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피압박인민을 이끌고 토지혁명을 진행하고 제국주의와 국민당반동파와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홍군은 2만 5천리 장정을 거쳐 섬북으로 진출하였으며 지하전선의 우수한 공산당원들도 당조직을 확보하면서 반제애국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조선의 우수한 혁명자들은 중국정세변화에 비추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망국의 한을 지니고 중국 상해에 망명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은 상해림시정부를 중심으로 험난한 투쟁을 계속해왔다. 비록 중국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있었지만 자체로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새로운 투쟁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있었다.


(권립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우리 민족의 혁명대오에는 리철부나 김산처럼 공산주의기치밑에서 당의 지하사업에 종사한분들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윤봉길처럼 반일민족주의기치하에 우리 민족의 헌신적인 정신을 잘 체현한분들도 많았습니다.》

윤봉길의사와 그의 안해 그리고 두 아들.

윤봉길의사가 한학을 배울 때의 도서들.


매헌(梅轩)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08년 조선 충청남도 례산(礼山)에서 태여났다.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学校)에 입학하였지만 일제의 노예교육이 싫어서 1919년 스스로 학교를 중퇴하였다.

《3.1》 독립운동이 고조되는가운데 어린 그의 마음속에도 애국사상이 불타올랐다. 그는 전통적인 민족교육을 받기 위해 사설(私设) 서당인 오치서숙(乌致书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학을 배우면서 그는 국내 진보적인 잡지와 신문을 열심히 읽으면서 선전적인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농민들의 운명에 남다른 애착심을 가진 그는 농민들을 위해 독서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에 고심하였다.

1929년 윤봉길은 월진회(月进会)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고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농촌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억압, 탄압하에서 농촌운동을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대장부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노라》라는 명언을 남기고 떠났다.


(권립 교수) :《1930년 갓 스물세살에 난 윤봉길의사는 일제와의 결사적인 투쟁을 굳게 맹세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고생을 하면서 일제에게 치명타를 안길 기회를 노리고있었습니다.》


중국 각지를 전전하던 윤봉길은 1932년 봄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홍구공원부근에서 야채장사를 하다가 림시정부 국무위원이며 상해 한인교포(韩人侨胞) 단장으로 있던 김구를 만났다. 당시 김구는 침체상태에 처한 림시정부와 독립운동에 활력을 부여하기 위해 의렬투쟁을 주도하고있었다. 드디여 기회가 왔다. 상해에 진입한 일본군이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을 맞으며 성대한 천장절(天长节) 의식과 상해점령 승전축하식을 가지기로 했던것이다.

이날 행사는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园)에서 진행하게 되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입장권만을 가지고 행사를 관람하라는 보도가 상해 매일신문에 실렸다. 김구와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군 수뇌를 사살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침략군은 중국 동북을 강점한데 이어 상해에 대한 대거 침공을 개시하였다. 격전은 상해교외의 갑북(闸北)에서 진행되였다. 국민혁명군 애국장령인 장광내(蒋光鼐)와 채정개(蔡廷锴)는 19로군을 거느리고 막강한 적들과 완강히 싸웠다. 치렬한 혈전은 33일간 지속되였고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침략군은 세번이나 통수를 교체하였다. 국민정부의 타협정책으로 하여 19로군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항전은 중국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을 저지시켰다.


상해를 강점한 일본침략자들은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경축행사를 진행하였다. 일본군사령관 시라가와(白川义则) 대장, 해군 함대사령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谦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쯔(重光葵), 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贞次), 주중 총령사 무라이(村井仓松), 민단간부 도모노(友野盛)를 비롯해 상해에 있던 일제군정요인들이 모조리 행사에 출석하였다.

홍구공원의 의거를 위해 김구와 윤봉길은 주밀한 계획을 짰다. 행사 며칠전부터 윤봉길은 홍구공원행사장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는 어느 곳이 주석대이고 어느 곳이 검열대이며 어느 곳이 경계선이며 어느 곳이 관중들이 설 자리인가를 세밀하게 파악하였다.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가 조직한 애국단(爱国团)의 신분으로 맹세하였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诚)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언을 남기고 최후를 준비하였다.

4월 29일 김구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새 손목시계와 김구의 낡은 시계를 바꾸고 몸에 지녔던 돈을 전부 김구에게 넘겨주고 홍구공원으로 떠났다.

멸적의 결의를 다지는 윤봉길의사.

김구(왼쪽)와 윤봉길 의사.


(권립 교수): 《4월 29일 오전 상해 홍구공원에는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폭탄을 들고 홍구공원에 들어섰습니다. 검열대에는 일본의 군정요인들이 서있었습니다.》


오전 7시 50분에 즈음해 윤봉길은 공원안에 들어가 미리 보아두었던 유리한 지점에 서서 폭탄을 던질 시간을 기달렸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검열대를 중심으로 일본관민이 둘러서있었다. 검열대 좌우로는 일본 륙군, 해군 방대가 호위해섰고 그뒤로 몇메터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있었다. 일반인은 그뒤에 서게 되였다.

11시 20분에 공식행사가 시작되였다. 대회식순이 있은후 축하하러 온 외국인이 다 떠나고 일본인만 남아서 검열을 진행하려 하고있었다. 11시 40분이였다. 이 시각을 기다리던 윤봉길은 드디어 폭탄덮개를 열고 앞으로 나갔다. 그는 앞사람을 헤치고 2메터 나아가 주석대로 폭탄을 던쳤다. 폭탄은 노무라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쯔의 면전에 명중하여 폭발하였다.

굉음과 함께 폭탄연기가 사라졌다. 일본군사령 시라가와대장은 몸에 많은 파편을 맞고 신음하다 5월 24일 숨졌다. 제9사단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게 되였고 해군총사령인 제3함대사령인 노무라는 실명하고말았다. 뿐만아니라 주중공사 시게미쯔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였고 거류민 단장인 카와바다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검열대에 있던 총령사 무라이와 민단간부 도모노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일제의 경축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였고 윤봉길의 폭탄투척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태연하게 서서 폭탄투척이 가져다준 전과를 흐뭇하게 검증하고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일제군경에게 피체되여 상해 일본헌병대에서 갖은 혹형을 받았다.

5월 25일, 일제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는 윤봉길을 사형에 언도하였다. 이해 11월 18일 윤봉길은 오사까의 형무소로 압송되였다가 12월 19일 오사까교외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적탄을 맞고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권립 교수):《윤봉길의사는 그해 12월 19일에 만 스물네살의 아까운 나이로, 그러나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빛나는 한생을 마쳤습니다.》

윤봉길의사의 폭탄에 아수라장이 된 일제 천장절경축주석대.

일제헌병들에게 연행되는 윤봉길의사.


중국 상해홍구공원에서 폭탄이 터진지 어언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과 조선 인민은 민족의 지사 윤봉길을 잊지 않고있다. 지금도 상해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매원이 있어 중국과 조선인민들이 참관하고 기념하고있다.

답사팀일행은 윤봉길의사 의거현장을 찾아 상해로신공원으로 갔다. 로신공원은 상해시동북쪽의 사천북로(四川北路) 2288번지에 위치했다. 이 로신공원이 바로 당시의 홍구공원(虹口公园)이다. 1956년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작가인 로신을 기념하기 위해 로신의 골회를 이곳에 이장하고 그곁에 로신기념관을 만들면서 로신공원으로 변했다.

공원에는 윤봉길을 기념해 만든 매원(梅园)이 있다. 공원호수가에 자리잡은 매원입구에는 돌 두개로 만든 비석이 있었다. 작은 돌에는 한자로 《윤봉길의거 현장. 1932.4.29》이라고 씌여있고 큰돌에는 중문과 조선문으로 된 《윤봉길의사 업적 소개》글이 새겨져있었다.

매원에 들어서니 검은기와에 나무로 축조한 2층 정자가 있었고 처마에는 《매정(梅亭)》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있었다. 28평방메터 정도인 일층에는 《매헌(梅轩) 윤봉길의사 생애사적전시회》 전시장으로 되여있었다. 윤봉길의사의 생애와 사적을 사진으로 알기 쉽게 전시한 곳이다. 정면에는 윤봉길의사의 독사진이 전시되여있었다.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겼으며 한손은 의자손받이에 놓고 다른 한손은 무릎에 올려놓은 전신사진이였다. 두눈은 부드러운 빛을 띄였지만 한일자로 꾹 다문 입술은 강인함을 보여주고있었다. 그리고 꿋꿋이 편 허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우려는 그의 드팀없는 의지와 투지를 나타내는듯싶었다.

전시실에는 거사 준비과정으로부터 의거전의 선서장면, 의거전 김구와 바꿔 찬 회중시계, 의거에 사용했던 물통형폭탄과 도시락형폭탄, 선서문 그리고 의거현장을 돌아본후 이날의 감회를 시로 적은 《신공원에서 답청하며》라는 시고, 사형직전의 모습....그의 위대한 의거가 모두 사진으로 전시되여있었다.

상해로신공원(옛 홍구공원)에서 사적지를 소개하는 력사고문 최룡수교수(오른쪽).

윤봉길의거현장의 기념석.

로신공원의 윤봉길의사의 기념정자 《매정》.

매정의 윤봉길의사 사적전시.


사형직전 일본헌병들이 윤봉길의사의 눈을 가리고 십자모양의 나무형틀에 묶는 모습과 처형직후 일본헌병이 쏜 총탄이 윤봉길의사의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한 처참한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을 보며 오랜 세월이 흐른후에도 결코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민족의 영웅 윤봉길의사의 장렬한 최후로 하여 눈시울이 뜨거워남을 어쩔수 없었다. 특히 의사의 안해 배용순의 사진과 두 아들 종과 담의 귀여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날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기꺼이 떠났던 열혈사나이의 대의정신에 숙연한 마음 금할길 없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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