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빈소 훈수 정치’ 눈길
이완구에게 “대통령께 건의…밖에서 자랑 말라”
김무성에게 “대통령 잘 도우면 반대급부 있을 것”
문희상에게 “여야 싸워도 밖에선 같이 놀아야”
특유 인생론도 “대통령 하면 뭐하나, 다 거품…”
21일 별세한 부인 박영옥씨의 빈소를 지키고 있는 9선 경력, 정치 9단의 말들은 강퍅한 현실 정치를 잠시 되돌아보게 했다. ‘구순 노 정객’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문상객들을 맞을 때마다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맞춤형 훈수정치’를 선보였다.
24일에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빈소엔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대표와 문희상 전 비대위원장,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 김상현 천용택 안택수 전 의원 등 여야, 전·현직 정치인들의 초당적 조문이 이어졌다. 일본 정계의 거물 오자와 이치로 생활당 대표도 찾았다. 조문객들의 면면에서 ‘굴곡진 50년 정치사’를 읽을 수 있었다.
제이피는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휘하에서 ‘만년 2인자’로 족해야 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빗대 “나는 골프를 쳐도 늘 세컨드 샷이 잘 맞는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2인자 처세술’엔 유별난 대목이 있다. 이완구 신임 국무총리를 보자 “대통령께 할 말이 있으면 조용히 건의 드려라. 밖에 나와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대통령께 쓴소리를 하겠다’고 호언했던 이 총리에게 넌지시 ‘직언의 기술’을 설파한 셈이다. ‘자기 정치’를 하려고 대통령을 이용하지 말라는 가시도 살짝 박혀 있다. 김무성 대표에겐 “박 대통령을 잘 도와드리면 반대급부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겐 “박근혜 대통령을 가끔 찾아뵙고 외롭지 않게 해주세요. 다 외로운 자리입니다”라고 당부했다.
‘3김’은 각각 나름의 언어로 정치의 본질을 정의했다. 김영삼은 정치를 세력으로 봤고 김대중은 정치를 생물이라고 정의했다. 김종필은 정치를 허업이라고 했다. 제이피는 조문객들에게 자세한 풀이를 내놨다. “정치는 키워서 가꿔 열매가 있으면 국민이 나눠갖지 자기한테 오는 게 없으니 정치인 자신에겐 텅텅 빈 허업이고 죽을 땐 ‘남는 게 있어야지’라고 한탄하면서 죽는 거다. 정치인이 열매를 따 먹겠다고 그러면 교도소밖에 갈 길이 없다.”
여야 중진들에겐 대화와 소통을 주문했다. 이날 아침 문희상 의원에겐 “여야라는 게 (안에서는) 싸우지만 밖에 나와서는 술 먹고, 경사가 있으면 같이 기쁘게 놀고 그렇게 가야 하는데 근래는 여야 간에 저녁 먹는 경우도 없는 거 같다”고 했다.
특유의 인생론도 폈다. 그는 “대통령 하면 뭐하나. 다 거품 같은 거지. 천생 소신대로 살고, 자기 기준에서 못했다고 보이는 사람 죽는 거 확인하고, 거기서 또 자기 살길을 세워서, 그렇게 편안하게 살다 가는 게 승자”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정치는 남가일몽, 한바탕 꿈”이라고 했다. 1997년 대선에서 ‘디제피(DJP)’ 연대로 패한 이 전 총재로선 제이피에 대한 앙금이 없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직접 빈소를 찾았다. 제이피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사촌 처제인 박 대통령 대신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고 서먹서먹한 관계가 이어졌다. 이밖에도 제이피와 애증이 얽힌 숱한 정치인들이 조문했다. ‘빈소정치’가 맺힌 앙금을 풀어주는 해원의 실타래가 된 것이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