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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 안산편

[기타] | 발행시간: 2015.08.27일 17:40



철의 도시에 울리는 아리랑 멜로디

신흥도시와 더불어

안산시는 원래 료양시의 관할에 있다가 1937년에 행정도시로 신설된 신흥도시이다. 그러나 안산철강 등 자원 및 지리우세에 의해 신속하게 발전하여 현재는 우리 성의 3대 도시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지역에 조선인이 살기 시작한것은 지난 세기20년대경이다. "1917년에 리옥서와 김장만이란 두 조선농민이 류시툰에서 수전 20무를 풀었다"는 "안산조선족지"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부터 조선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것으로 추정된다. 또 당시 안산에 있는 소화제철소(안산철강의 전신임)에 조선인이 50~60명이 일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안산지역에 광복전까지 조선인이 무려 1만 4천여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귀국하고 60여가구에 300여명만 남았다. 그러다 새중국이 창립되고 정부에서 수전농사를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각지로부터 조선족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또 여러 한족촌에 가서 벼재배기술을 지도하였다 한다. 해방후 안산지역에 조선족이 가장 많았을 때는 지난 2000년 전국제5차인구보편조사때의 10, 052여명이였는데 현재는 8,011명으로 2천여명이나 줄어 성내 여러 도시중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안산시에는 민족단위로 안산시조선족문화예술관과 안산시조선족학교, 그리고 달도만진이 있으며 민간단체로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안산시조선족로인협회가 있다. 안산시조선족문화예술관(1952년에 설립, 현임 관장 정해룡)은 조선족문화예술을 보급하고 민족의 전통을 전승 고양하는것을 목적으로 달도만진, 민간단체, 학교들과 함께 조선족민속절, 조선족노래와 춤, 미술 시합, 조선족민속유원회, 조선족윷놀이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최해오고있으며 또 중한합동공연, 중한국제서화전 등 국제간 교류 및 협력활동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있다. 2007년 9월 23일에는 료녕성제4회조선족민속절을 안산조선족사회 각계의 노력으로 안산에서 성대하게 펼쳤다.

안산조선족사회의 대형 문화행사에서 주역은 역시 안산시조선족로인들. 안산시조선족로인협회(1988년 설립) 리홍선회장의 소개에 의하면 현재 회원이 500여명에, 립산구, 철동구, 철서구, 달도만진(각 조선족촌로인협회) 등 4개 분회가 있다.

안산조선족은 료양조선족과 마찬가지로 안산지역의 수전농사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949년 "안산시수전관리위원회"가 설립, 조선족 백락이가 위원으로 되였고 1957년 이 위원회에 조선족위원이 10명이나 되였다. 1952년부터 1990년대까지 조선족농촌의 수전면적을 보면 1952년의 2,869무에서 1965년과 1978년의 5,847무로 가장 많았으며 1984년에는 5,412무, 1990년에는 5,235무였다. 1953년 안태록호조조는 벼무당수확고가 1300근에 달하여 당시 안산시기록을 창조했다. 리회장은 안산조선족은 반이상이 달도만진에 거주했었는데 사하(沙河)의 물, 안산철강의 오수를 리용하여 벼농사를 지어왔다고 소개했다.

안산조선족은 수전농사뿐만아니라 안산철강산업의 발전에 한몫을 해왔다. 안산철강회사에 위만시대 조선인이 100여명이였고 해방후에 늘어나기 시작해 80~90년 대에는 300~4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비록 인수는 적지만 이들은 안산철강회사 각 분야에서 기술골간으로 두각을 내밀었다. 그중 전 안산철강회사 총경제사 원동수(80년대 2기 련속 성정협상무위원,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초대회장), 전 안산철강실업만발회사 부총경리 고급공정사 오태영, 안산철강기종설계원 부총공정사 김규, 안산철강철동총병원 주임의사 곽명자(제8기전국인대대표), 이비인후과주임 민종운, 안산철강압연주식회사 랭동압연공장 부공장장 고급공정사 리충진(제9기전국정협위원) 등을 꼽을수 있다.

안산지역에도 항일투쟁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선후 3차 조선공산당을 파견하여 태안 등 지역에서 반침략과 반일투쟁을 진행하였다. 1928년 8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리일질(李一质, 해방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에 가입, 김일성종합대학 학장, 문화상 등 직을 력임했음)을 중공태안특별지부의 선전위원으로 파견, 태안제일소학교 교사 신분으로 학생운동을 지도하게 하였다. 1932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원 리백성을 태(안)료(중)중심현위 현위서기로 파견하여 항일사업을 지도하게 하였으며 1933년에 다시 왕경(王耿,본명 문벽두, 연변 "5.30"폭동의 조직자)을 림시현위서기로 파견하여 파괴된 조직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력사사실들은 "안산시민족지"(안산시민위, 1999년 2월 출간)에 기록되여있다.

안산시에는 선후 전국로력모범 1명, 전국새장정돌격수 2명, 중국공산당제15차대표대회 대표 1명, 성급로력모범 20여명, 고급직함인원 250여명, 국무원특수수당금향유자 10여명을 배출했다.

이밖에 현재 한국장기계에서 "3김"중 하나로, 한국장기대국프로에서 장기해설원으로 활약하고있는 김동학씨도 안산출신이다.


안산조선족사회의 중심지-달도만진

안산시 천산구 달도만진에는 한족, 조선족, 만족, 몽골족 등을 포함한 8개 민족이 집거하고있는데 그중 조선족촌이 8개, 조선족인구는 약 3,000명(2010년 인구조사통계에 근거함)으로 안산시조선족인구의 2/3를 점한다(그 이전에는 반수이상을 점함).

안산도심과 4킬로메터 떨어져있는 달도만진은 원래 이름이 송삼대자진으로 1985년에 송삼대자조선족만족향으로 되였고 후에는 송삼대자진으로, 다시 달도만진으로 개칭되였다. 그 리유에 대해 "송삼"(宋三) 한자발음이 "숭싼"(送山)과 비슷한것도 있지만 진정부가 달도만진으로 이전하면서 심대고속도로의 안산출구 명칭이 달도만(현 안산출구)이여서 달도만의 이름을 빌어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의미도 내포되여있었다고 한다.

달도만진은 안산철강회사와 가까이에 있으며 평원지대에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과 통신이 모두 발달되여 남다른 지리적, 교통적, 인문적 등 세가지 우세를 자랑하고있었다. 달도만진 당위서기 김태복씨(1959년생, 2002년-2012년 진장)는 현재 민족명칭이 없어졌지만 민족정책은 그대로 향유하고있고 이런 우세와 도시화진전에 크게 힘입어 달도만진은 2002년의 빚더미진에서 억원진으로 탈바꿈하였다고 소개했다. 2014년에 재정수입이 5억 6천만원에 달하여 안산시에서도 으뜸진(83개 향진에서 제1위)으로 소문났다.

2006년 안산시경제개발구(성급)가 설립되면서 달도만진은 달도만가두판사처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여 도시화에 가속도가 붙고있다. 그에 따르면 원래 달도만진에 속하던 영풍조선족촌이 오래전에 철서구로 귀속되고 나머지 8개 조선족촌민들도 최근년에 모두 촌민에서 주민으로 되여 민복원(民福园), 예달(睿达)도시화원, 영달(盈达) 등 네개 아빠트단지에 입주하였다. 15년전만 해도 수전이 15만무로 농업대진으로 불리웠던 달도만진은 지금은 수전은 찾아볼수 없고 신흥도시로 재빠르게 발돋음하고있다.

촌민들이 층집에 살고있으나 촌에 아직 집체자산이 남아있으며 촌정부사무실과 로인활동실을 별도로 보유하고있다고 김서기가 설명했다.

달도만진은 안산지역 조선족학교분포 조정에서 크게 기여했는데 달도만지역에 있던 조선족소학교를 통합하고 2006년에 2000만원을 투자하여 조선족소학교 신축청사를 지었으며 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2013년에 이 신축교사를 안산시조선족학교 소학부 청사로 내놓았다. 그리고 련속 2년 진재정에서 소학부 교직원들의 임금과 기타 경비를 충당해오고있다 한다.

달도만진에서는 민속풍정거리와 민족미식거리를 건설하여 조선민족특색이 있는 상가와 식당을 유치하고있으며 또 진정부 산하 민족종교사무실판공실을 특별설치하여 조선족간부 한명을 전문 두어 진의 전반 민족사업을 전담케 하고있다. 과거에는 진에 조선족족간부가 십여명이 되였지만 현재는 서기와 인대주석, 그리고 조리 등 3명뿐이다.

달도만진은 수십년간 안산조선족사회의 대형행사 주최단위의 하나로 되여 2009년과 2014년 련속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집단으로 되였고 김서기는 지난 2009년 국경60주년에 모범집단의 대표로 국무원제5차전국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 참가하여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친절한 접견까지 받은바 있다.

김서기는 행정관리체제가 달도만가두판사처로 바뀌면서 민족정책혜택을 계속 향유할수 있을런지 지켜보야야 한다며 그렇지 못할 경우 민족간부가 더 줄어들가봐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하였다.


통합의 진통, 민족교육을 살리자

2000년전만 해도 안산지역에 조선족소교가 6개, 중학교가 1개로 모두 7 개 있었지만 현재는 안산시조선족학교 단 하나뿐이다. 달도만진에 소재해있는 이 학교는 원래 안산시조선족중학교였는데 현재는 소학부와 중학부, 고중부의 일체화관리를 실시하고있으며 유아원생과 소학, 초중, 고중 학생을 합쳐 400명이다.

안산지역의 조선족교육은 위만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데 1929년에 설립된 조선인보통학교와 1938년에 설립된 일출재만국민학교(광복전까지 일출재만국민학교의 학생수는 800명에 달함)를 꼽을수 있다. 새중국이 창립된후 조선족이 륙속 모여들고 조선족촌이 생겨나면서 조선족중소학교가 신속하게 발전하였다. 그러다 2000년부터 도시진출과 출국로무바람으로 조선족인구가 급감하면서 학교도 부득불 통합을 시작했다. 먼저 안산시립산구우의소학교의 조선족반이 철동구조선족소학교로 통합되고 리삼대자조선족소학교와 송삼대자조선족소학교가 천산구조선족소학교로 되였다가 다시 달도만조선족소학교와 통합되였다. 2006년 9월에 철동구조선족소학교와 철서구조선족소학교가 안산시조선족학교 소학부로 되였으며 2013년에 달도만조선족소학교가 안산시조선족학교 소학부와 통합되여 안산지역에 는 안산시조선족학교만 남게 되였다.

취재에서 안산시조선족소학교와 중소학교의 통합은 순탄하지 않았고 이 과정에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시정부 관계부서에 당시 현황을 반영하고 조률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수 있었다. 90년대말만 해도 안산지역에 조선족소학교가 6개로 학생이 651명에 달하였는데 2006년에는 324명으로 급감하였다. 철동구조선족소학교는 이해 9월 1일 새학기를 맞아 학생수가 15명뿐이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시조협에서는 2005년 7월에 시조선족로인협회와 함께 교육주무 부시장에게 "안산시조선족소학교분포 조정을 다그칠데 관한 건의"를 제출하고 조속히 해결해줄것을 요구하였다. 사실 이에 앞서 료녕성교육위원회와 성민위에서는 각시에1998년부터 민족학교분포를 조정할데 관한 구체적계획을 제출할것을 요구했고 이 요구에 근거하여 성내 기타 시에서는 조선족소학교분포 조정을 끝냈으며 통합후의 규모운영과 운영조건의 대폭적인 개선에 따른 수업수준을 업그레이드하여 조선족소학생이 계속 줄어들어 정상수업에 차질이 빚어지는 등 피동적인 국면을 해결할수 있었다. 드디여 2005년 9월 14일, 안산시조선족소학교분포 조정 관련 시장업무회의가 소집되였고 회의후 "안산시인민정부업무회의요지"[2005] 51호문건이 발표되였다. "회의에서는 시교육국, 시민위에서 제출한 안산시조선족소학교분포조정방안을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3개 조선족소학교를 시조선족중학교와 통합함과 동시에 안산시조선족학교를 설립하고 소학부를 설치하며 소학부는 달도만조선족소학교 신축교사에 둔다. 신설된 안산시조선족학교는 시교육국에서 직접 관리한다." 그러나 후에 이 부시장이 철동구와 철서구 두 소학교의 통합은 동의하고 달도만조선족소학교의 통합은 동의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시조협의 책임자는 원 성정협상무위원의 이름으로 시위서기와 시장에게 사태의 엄중성(철동, 철서구 두 소학교의 150명 학생이 갑자기 상하수도와 변소, 소방시설이 없는 시조중의 낡은 청사로 이주, 9월 1일 새학기에 정상수업을 할수 없음)을 반영하고 이를 조속히 해결해줄것을 청구하는 장편편지를 보냈고 시장은 즉각 시민위주임, 부주임, 시조협책임자와 조선족기업가대표들을 만나서 조선족소학교의 통합과 안산시조중과 다시 통합하여 조선족학교를 설립하고 시에서 관리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2013년 9월 29일 달도만조선족소학교는 안산시조선족학교의 소학부로 통합되였으며 청사는 달도만진정부에서 새로 지은 부지 1만여평방메터에 3,700평방메터 건축면적의 새 청사로 입주하게 되였다.

1957년 9월 15일에 설립된 안산시조선족중학교는 성중점학교로 안산지역뿐만 아니라 료양시현 등 료남지역의 조선족교육을 책임지는 중요학교로 발전하였다. 안산조중은 창립되여 2013년까지 반세기남짓한 기간에 초졸생 5,380명, 고졸생 2,113명을 배출하여 안산 및 료남지역 조선족교육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2000년 대학입시에서 27명이 중점대학에 진학하고 료녕성문과수석, 안산시문과수석이 등이 배출되는 등 기꺼운 성과를 달성하였는가 하면 2014년에도 600점 이상의 학생이 4명이 나 나왔다.

리홍선씨(1964년 안산조중 졸업생)는 전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부 부주임인 리정문씨(1기 졸업생)는 "안산조중졸업생중 행정급이 가장 높았다"며 그는 "안산조중의 자랑이였다"고 했다. 중국의 저명한 조선족작가였던 김학철씨는 그가 지난 1993년 연변주당위 부서기에서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전근할 때 "정문이 잘 가오"라는 글을 료녕신문에 발표하여 그의 강한 원칙성과 청렴성을 높이 치하한바 있다.


"촌지" 우리 민족력사의 한페지

안산시조선족로인협회 리홍선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1980년에 전국적으로 지방지를 쓰기 시작해 안산에서도 5년뒤 "안산조선족지"편찬을 완성했으나 당시 여러가지 원인으로 정식 출간되지 못하고 프린트판의 상, 중, 하로 된 "안산조선족지"(20만자)만 남겼다. 그는 당시 "안산조선족지"편찬위원회 부주필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족사회를 료해하기 시작, 수차 좌담회 소집, 관련자들과의 구체적인 대담, 자료발굴 등을 통해 안산조선족사회의 력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때 안산지역 조선족촌의 력사를 기록한 "촌지"를 쓰지 못한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다행히 당시 "안산조선족지" 편찬위원회 주필을 맡았던 전 안산철강당학교 정치경제학부 교수,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상무부회장이였던 김일경씨가 한국에 갈 때 관련 자료를 주어 그는 시조협판공실이 학교에서 다시 기업가사무실로, 문화관으로 이전할 때도 이 자료를 귀한 보배처럼 잘 간수해왔다.

그러다 4년전부터 달도만진내 공업단지 조성으로 토지가 징용되면서 이 지역에 있던 홍기보, 달도만, 형양기 3개 조선족촌이 완전 철거하고 소영반, 리삼대자는 분산되는 등 달도만진에 집중되여있던 조선족촌이 흩어지고 토지가 거의 징용되는 판국에 이르렀다. 안산지역의 조선족촌은 광복후 서기 시작해 현재까지 모두 9개로 발전하였는데 도시진출과 출국로무바람으로 촌인구가 급감하자 몇년전에 조선족촌끼리 통합해 영풍조선족촌외 3개 조선족행정촌(련촌, 송삼대자촌, 오삼대자촌은 선명조선족촌으로, 달도만촌, 형양기촌은 진풍조선족촌으로, 리삼대자촌, 홍기보촌, 소영반촌은 성신조선족촌으로)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촌재무가 독립채산이여서 말이 통합이지 아직도 거의 단독으로 운영되고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급격한 시대의 변화속에서 "촌지" 편찬의 긴박성과 필요성을 느낀 리회장은 당시 달도만진의 진장이였던 김태복씨를 찾아가 협조해줄것을 부탁했다. 김진장은 물심량면의 지원을 약속, 진내 각 촌주임, 지부서기와 관련 편집소조일군들이 모인 회의를 소집하고 각 촌에서 "촌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지금까지 보면 홍기보, 영풍, 소영반, 련촌, 오삼대자는 모두 자체로 편집소조를 내오고 초고를 완성했고 리삼대자는 자료가 너무 부족해 아직도 초고가 나오지 못했다." 송삼대자는 쓸 사람이 없어서 리회장이 2년남짓 씨름한끝에 프린트 완성판이 나왔다. 그리고 형양기는 아직도 공백상태이고 달도만은 30년전에 쓴 그대로였으며 영풍촌은 자료를 보충해서 다시 쓰기로 하였다고 소개했다.

"촌지"를 쓸 때50~60년대 자료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80~90년대 영풍촌과 송삼대자촌에 향진기업만해도 십여개가 넘었는데 이런 력사들이 제대로 반영될수 있는 자료들도 찾아보기 힘들다는것이다. 그는 "원래 자료가 부족한데다 당시 촌의 견증인으로 살아왔던 로인들이 사망되여 촌지를 제대로 쓰기 쉽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제 우리가 촌지를 쓰지 않으면 조선족촌이 다 사라지고난뒤 그때 쓰려면 더욱 어려울것이며 이 시기를 살아온 우리 세대에서 써서 후세대들에게 남기는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달도만진에서는 각 조선족촌의 촌지가 나온뒤 진에서 통일로 합정본을 만들 계획이다.


취재과정에서 신흥도시 안산시와 더불어 신속하게 발전해온 안산조선족사회는 성내 다른 조선족사회 못지 않게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최근 몇년간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책임자의 부재, 인구의 급감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있으면서도 이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고있는 안산조선족유지들의 노력과 책임감도 실감하였다.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지난 1999년 7월 30일에 설립되여 조선족대형행사 개최외에도 시조선족문화예술관의 대외임대건물 회수, 조선족학교의 통합, 민족간부문제 등 여러가지 조선족관련 굵직한 사안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책임자의 부재 등으로 "준정부"의 역할을 해오던 협회가 침체상태에 빠지면서 조선족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을 보지 못하고있다는 리홍선회장의 소개다.

안산시성화특종내화재료공장 조영일사장은 "안산시의 유일한 조선족학교 교장을 수년간 한족이 맡고있는데 한족교장에 한족선생과 한족학생이 늘고 학교내 주류언어가 중국말이라 한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되야 할지 심히 걱정된다."며 학교교장인선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내세웠고 달도만진 오삼대자조선족촌의 최광남서기는 "우리 조선족촌의 농토가 공업단지 건설로 다 징용되였지만 1무에 4만원의 보상금밖에 받지 못하였다."며 토지징용후 정부보상금의 불합리성을 제출하였다.

이밖에 안산에는 안산시세기천연광천음품유한회사와 안산시성화특종내화재료유한회사 등 30여개의 제조업체와 음식업체가 있지만 시조선족기업가협회가 아직 설립되지 못하고있다. 조선족의 시인대대표와 정협위원도 많을 때는 각기 7명과 9명에서 현재는 1명과 5명으로 현저하게 줄었다. 부처급이상 조선족간부도 2005년까지만 해도 30여명이였는데 현재는 10여명이다.

안산시조선족문화예술관 정해룡관장(전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비서장)은 "시조협의 교체선거로 하루빨리 산재해있는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년내 새로운 회장단 출범을 위해 최선을 다할것이라고 했다.



기자 오지훈 전매

출처: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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