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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산지구에서의 한국(조선)독립운동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9.23일 09:31
지난 8월 8일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 한국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와 할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에서는 공동으로 '흑룡강지역 항일독립운동 학술대회'를 성대히 개최하였다.대회에서는 한국 고려대 노길명명예교수, 원할빈시민족종교사무국 서명훈국장, 원밀산시정부 맹고군부시장 등 5명이 주제발표를 하였는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베일에 가려져 있거나 또는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 흑룡강지역에서의 우리겨례 독립투사들의 장렬하고 빛나는 력사를 재조명하였다.본사는 오늘부터 3기에 나누어 그중 3편의 론문을 소개하려 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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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강신문=하얼빈) 청나라때 밀산지역의 면적은 현재 면적의 근 배로 약1만 5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있는 흥개호는 금나라때에는 북금해라 불 렀고 청조 가경년대부터 흥개호라 불렀는데 총면적이 4380평방킬로미터로 그중 중국 부분의 호수면적이 1080평방킬로미터이다. 흥개호는 대소 흥개호로 나누는데 그 사이에 있는 모래언덕에는 6000년 전의 숙신인(肃慎人)들이 생활했던 유적지 '신개류 문화 유적지(新开流文化遗址)'가 있다. 거기에서 서북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해발 574미터로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봉밀산이다.

  조선인들은 100여년전부터 이 땅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한국(조선) 해외 반일무장투쟁 최초기지 '한흥동'과 '십리와'

  한국독립운동 력사에서 10-20년대에 창립한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가 여러곳이 되지만 최초 기지는 1909년 중국 동북지구 밀산 봉밀산 기슭 흥개호반에 세운 '한흥동'이다.

  '한흥동'은 지금의 밀산시 백포자향 림호촌 3조 지역을 말하는데 그 지리적 위치로 보면 북쪽으로는 봉밀산을 등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흥개호와 린접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러시아 륙지변경과 잇대여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1905년 11월 일제는 조선황실을 강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나라와 민족이 고난에 처한 생사존망의 관두에 무수한 애국지사들은 일본 침략자를 항격하고 나라의 주권을 찾는 독립운동에 일떠섰다. 특히 1910년 이후 의병항전으로부터 독립군의 항전으로 전환되여 새도운 독립운동의 리념과 전술로 '독립전쟁론'이 형성되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에서 실시한 무단통치와 날로 가중되는 무단탄압으로하여 국내의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은 엄중한 좌절을 당하였으며 길이 막히였다.

  이런 정황하에 구체적 방략으로 형성된것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고 그를 바탕으로 '독립전쟁론'을 구현해야 한다는것이였다. 1909년 2월에 미주에서 건립된 국민회를 주도로하는 애국지사들은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의 형세와 방략을 연구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국외무장투쟁기지를 건설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독립운동 국외무장투쟁기지에서 한민족의 근대적 력량을 길러 그 힘으로 기회를 보아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진행하는것이 국가독립을 회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인정했다. 그 기지에서 산업을 일으켜 생활안정과 경제토대를 마련하면서 한편으로 청소년들을 조직하여 근대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켜 민족의 무장력량 광복군과 민족운동의 근위대를 양성하며 이 기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국내동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면서 해외에 있는 전체 한민족을 조직화하고 무장화시켜 간다면 언젠가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진행할수 있고 최후로 한민족의 국권을 회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과 방략의 첫 실천자는 리상설이다.

  리상설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조선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태여났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리상설(당시 관직은 의정부 참찬)은 의분에 역적을 처단하고 매국조약을 파기할것을 주장한 상소문을 다섯차례 올림과 동시에 떳떳이 관직을 사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1906년 4월에 리상설은 애국지사 리동녕, 정순만등과 함께 중국 상해를 거쳐 중국 룡정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한국 근대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친히 서장을 담임했다. 1907년 6월 리상설은 리준, 리위종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체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주권수호를 위한 국제외교를 시도하였다.

  1906년 8월 9일 리상설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활동으로하여 일제의 괴뢰로 전락한 한국 친일정부의 결석판결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1909년 리상설은 러시아 시베리아 연해주에 망명하여 리동녕, 리중호, 정재관 등 동지를 규합하여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구의 한국동립운동 국외무장투쟁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리상설이 한국동립운동 국외무장투쟁 기지건설을 연구하고 설정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에 이끈것은 이미 1906년 4월에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조국을 떠나기전 부터였다. 당시 '서전서숙'창설의 목적은 단순히 신학문의 전수에만 둔것이 아니라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에서 인재양성에 둔 철두철미한 반일성질의 학교였다. '서전서숙'이 실시한 항일교육은 철두철미한 반일민족교육이였기에 이름만 '서숙'이였지 실질적인 면에서는 '반일'이였으며 한국동립운동 국외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의 일환이였던것이다. 리상설은 울라디보스토크에서 한민회회장 김학만과 해조신문의 주편 정순만 그리고 윤일병 등 당지 한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동립운동 국외무장투쟁을 위한 구체적 후보 기지를 물색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첫 시작으로는 원동림야주식회사를 세우고 중국과 러시아 여러곳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을 동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식을 사게 하고 그 자금으로 토지를 사들인 다음 그들을 그곳에 집단이주시켜 한국독립운동 국외무장투쟁기지를 만드는것이였다. 그의 이 계획은 인츰 실천에 옮겨져 후보지를 사방에 물색한 결과 처음으로 중국, 러시아 국경지 흥개호 주변을 정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쪽의 밀산부 봉밀산 지역을 우선으로 택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보면 밀산부 봉밀산 지역은 한인들이 많이 이주 정착하여 상당한 기반을 닦았고 수천리에 달하는 황무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지리상으로 보면 중국, 러시아 국경지대로서 러시아 정치적 탄압을 받던 연해주보다 안전하고 조선에 주둔한 일제의 군사력량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은 곳으로 민족독립운동과 무장투쟁기지 건설에 비교적 유리한 지역이였다.

  기지건설사업 임무는 리승희에게 맡겨졌다. 1909년 가을 리승희는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아래 현 밀산시 백포자향 림호촌 3조지역에 와 45방(약2200무)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이고 집단이민 100여호를 정착시켰으며 한국독립 운동 국외무장투쟁 첫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이 동네의 이름을 '한흥동'이라 지었는데 바로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이다. 동시에 학교를 세웠는데 '한민학교'라 이름 지었다. 1913년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홍범도가 교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진보청년들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진행하며 한국독립운동 무장조직 창건에 힘을 기울였다.

  리상설의 한국독립운동 국외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에 대한 주장은 '한흥동' 한곳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광범한 지역과 중국 동북지구 여러곳에 한인들을 정착시켜 터전을 닦고 개척하여 광범하고도 공고한 독립운동무장투쟁 기지를 창설하는것이였다.

  리상설의 '한흥동'건설에 호응하여 한국 국내에 있는 신민회와 기타 반일단체들은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곧 한국독립운동의 당면 주요한 과업이라 인정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일떠섰다. 1910년 4월에 신민회의 주요성원들인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 리종호, 김의선, 류동렬, 리종만, 리강, 김지간, 리동휘 등은 중국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밀산부 경내에서 토지를 사들이고 토지개간 사업을 벌리며 무관학교를 세워 한국독립운동 국외무장투쟁기지를 창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리강, 김성무 등을 밀산에 파견하여 봉밀산북쪽 십리와지역에 '십리와' 한국독립운동 국외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하였다.

  '한흥동'무장투쟁기지가 건립된 후 조선의 평안도, 함경도와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대량의 이민들이 밀산 흥개호연안에 와 정착하여 당벽진, 룡왕묘, 봉황덕, 황강, 리수구, 십리와, 시달린즈 등 한인촌을 세워 한국독립운동의 유력한 근거지를 건설했으며 동시에 후에 전개된 밀산지역의 중국 항일운동에서 이 근거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주력으로 되여 불후의 공헌을 하였다.

  '한흥동'기지건설은 약 4년간 유지되였다. 그후 주요하게는 자금문제와 독립군의 전략적인 이동으로 더 유지할수 없었다. 특히 1933년 일제가 밀산을 침점하고 러시아와 대적하기 위하여 '잠행보용법'을 공포하고 중,러변경의 분산된 마을를 집결하여 집단부락을 만들면서 '한흥동'마을은 강제적으로 철소되였다.

  '한흥동'무장투쟁기지건설은 3.1운동이후 본격적인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계단으로서 그후 대한독립군의 급속적인 발전을 대폭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역 승전의 유력한 기초로 되였다. '한흥동'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의 발원지로서 조선 근대 3대 민족사상이 통일전선을 이룬 전형이다.

  서일과 한국독립군단 창립

  1920년 10월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자들은 대량의 군대를 증원하여 보복활동을 감행하였으며 '경신년 대학살' 사건과 반일무장 단체에 대한 경신년 대토벌을 조작했다. 이와 동시에 봉계군벌 장작림도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고 동북, 더 나아가 전 중국을 통제하려는 야심으로 경제와 군사주권을 일본침략자들에게 팔아 자기의 력량을 강화,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장작림은 '만주에서 불량선인 단체를 숙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동북지구에서 활동하는 한국반일단체와 반일 무장조직들을 취체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전례없던 대토벌과 봉계군벌 장작림의 공제, 그리고 경제상 후원 결핍으로 연변지구 각 반일단체들은 엄중한 곤경에 빠졌다. 생사존망의 관두에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 시키고 반일무장 유생 력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전략적 이동을 주장하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중국 북만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12월 중순에 서일이 통솔하는 북로군정서, 홍범도가 통솔하는 대한독립군, 안무가 통솔하는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반일무장부대 3500여명 대오가 밀산 평양진에 집결하였다. 서일은 밀산에 집결한 반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韩独立军团)'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을 부총재로, 김규식을 총사령으로 선임하였다.

  밀산은 일찍 1910년대에 '한흥동', '심리와'등 한국독립운동의 최초 해외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한 곳으로 한인사회의 일정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제 지반이 비교적 취약했기에 3000여명의 독립군이 장기적으로 체류할 곳은 못되였다. 더우기 중국 북만지구의 12월 엄동기간에 준비없이 이동한 독립군장병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것이 큰 문제로 되였다. 전례없는 곤경에 빠진 독립군부대는 시급히 출로를 찾아야 했다.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는 중국 동북지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독립운동이 바야흐로 전개되고 있던 곳으로 약 20여만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규모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특히 러시아 10월 혁명이후 소련정부가 피압박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에 소련 연해주지역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새로운 희망지로 되였다. 서일 등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친후 최종 소련 연해주지역으로의 전략 이동을 결정하였다.

  1921년 1월초, 대한독립군단 장병들은 밀산 당벽진을 지나 호림현 호두에서 우수리강을 넘었으며 소련 변경도시 이만시를 거쳐 연해주 코르사프카 (노령쿠풍)에 집결하였다. 코르사프카에서 독립군 단체들은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을 다시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하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총장은 서일, 부총장은 한춘운, 군사 사령관은 홍범도, 군무 부장은 김좌진, 외교부장은 최진동이였다.

  1921년 3월, 대한독립군총합부와 기타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은 소련 원동정부의 배치에 따라 중국 흑하대안에 자리잡고 있는 알렉쎄브스크시에 륙속 집결하였다.

  1920년대 초기는 소련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갓 승리하고 피압박민족 독립과 해방을 지지하는 국제공산주의가 발전하는 시기여서 한국 각 반일 무장단체들은 소련정부의 지지와 방조를 받았다. 이때 일본은 소련정부에 한국 반일무장단체들의 무장을 해제할데 대한 압력을 가하였다. 갓 성립되여 정권이 확고하지 못한 소련정부는 소련에 와 주둔하고 있는 한국 각 반일무장단체들을 소련홍군에 편입시키고 한국 반일무장단체들의 원 명칭을 취소하자는 건의를 내놓았다.

  얼마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에서 긴급히 '림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였다. 그 목적은 중국에서 온 독립군부대와 시베리아 한인들이 조직한 모든 의용대를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이 지휘하는 한인 자유보병대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개편하려는것이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와 기타 한국반일 무장단체들은 알렉쎄브스크시에서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치렬한 쟁론을 벌렸다. 쟁론 끝에 모순이 많았지만 모든 한국 반일무장단체를 고려혁명군 3개 련대와 1개 경비대로 편성한다는 결의가 공포되였다. 이 결의는 1921년 6월 25일에 반포 되였으며 24시간내에 집행하여야 한다는 군정의회의 통첩도 내려졌다. 그러나 한국 각 반일단체의 많은 장병들은 이 개편 결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1921년 6월 28일, 오후 4시경에 소련홍군 29련대와 자유보병대대는 장갑차 2대와 30여정의 기관총 화력의 엄호밑에 600여명의 기병을 앞세우고 개편에 복종하지 않은 한국무장단체 장병들을 무장진압했다. 홍수같이 밀려드는 소련 홍군의 공세앞에서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의 저항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공세가 시작되여 한시간도 못되여 한국 반일무장단체의 장병들은 밀리고 쫓기여 마침내 흑룡강에 이르렀다.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진 장병들은 흑룡강에 첨벙첨벙 뛰여들었다. 수많은 장병들이 총탄에 비참하게 맞아 죽었고 물에 빠져 죽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참안에서 한국 반일무장단체의 전사자가 272명, 익사자가 37명, 행방불명자가 250명이였고 포로가 917명이였다. 일본 침략군과의 전례없던 대격전인 청산리 전투에서도 이렇게 큰 손실을 보지 않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반일투쟁사에서의 무장력량의 일대 조락을 초래한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참안'이다.

  서일은 일찍 1921년 1월, 대한 독립군단이 국경을 넘어 노령 자유시로 이동할때 보다 큰 승전과 장래를 위해 일부 소분대를 거느리고 당벽진에 남아서 둔병제(屯兵制)를 바탕으로 대한 독립군 후방기지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자유시사변'후 서일은 분산된 북로군정서부대 성원들을 조직하여 북로군정서부대 재건활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1921년 8월 17일 저녁에 서일의 부대는 마적들의 돌연적 습격을 받아 불행하게 하루밤사이에 대부분 장병들이 피살되는 참극을 맞이했다. 비록 그날 저녁 서일은 포교 활동으로 다른 마을로 갔기에 봉난을 피면하였으나 뜻밖에 발생한 참안은 서일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서일은 홀로 마을 뒤산 수림속에 들어가 돌을 베개로 잔디를 자리로 하고 대종교의 조식법(调息法) 으로 귀천하였다.

  대종교 밀산에서의 반일 활동과 윤세복

  20세기초부터 시작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한국 전민족의 파란만장한 민족독립운동에서 대종교는 ‘수전병행’의 기치를 높이 들고 억만 교도와 민중을 조직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리였다. 그중 많은 전기적 영웅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대종교 제3세종사 윤세복이 바로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윤세복의 원명은 윤세린, 자는 양원, 도호는 단애, 당호는 허당이다. 1881년 3월 29일,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 내일동의 비교적 부유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윤세복은 6세부터 병술춘입응천제에서 한어를 배우고 전통적인 유가문화교육을 접수하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사서오경’을 숙독하고 글과 시를 잘 지었다.

  1901년, 21세의 윤세복은 돈을 모아 고향인 밀양에서 신창소학교를 건립하고 계몽교육운동에 종사했다. 1903년, 현대교육성질을 띤 대구부 협성중학에 가서 교편을 잡았으며 후에 대구부 토지조사국 측량과에 들어가 측량기술을 배웠다.

  1907년 12월, 윤세복은 혼자 경성 간동으로 가서 홍암 라철을 방문했다. 그는 련속 3일간 홍암 라철의 국제국내시국에 대한 분석과 단군교 교리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여기에서 신심을 얻었다. 특히 단군교의 민족특색의 종교교리를 기초로 하여 억만민중을 불러 일으키는것과 전민족해방운동에 뛰여들게 하는 주장에 탄복되여 단군교를 믿으려 결심했다. 그는 라철종사의 세례를 받고 세린이라는 이름을 세복이라 고쳤으며 호를 ‘단애’라 하였다.

  1911년 1월, 윤세복은 대종교 시교사로 임명된 후 밀양의 가산을 팔아버리고 중국 동북으로 건너왔다. 1월 29일, 환인현에 와서 민족교육과 대종교 전파활동에 종사했다.

  1911년 10월 3일, 윤세복은 환인현에서 동창학교와 환인시교당을 설립했다. 환인시교당은 중국에 설립된 첫 대종교 교회당이였다. 그후 계속해서 무송, 안도, 반석교회당을 설립하였으며 7000여명의 대중교 교도들을 발전시켰다.

  1912년 윤세복, 신채호, 리동휘, 리갑 등은 러시아 로령지구에서 국권회복을 취지로 하는 광복회를 조직 성립하였다. 총부는 러시아 로령에 두었고 윤세복이 회장을 담임했다. 광복회 회원은 2만여명에 달했다.

  1941년 1월 30일 윤세복은 ‘지교’로 당선되였다.1915년 봄, 일본제국주의는 밀정을 무송현에 파견하여 무송현 경찰서와 결탁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죄명으로 윤세복 등 30여명 대종교 교직인원들을 체포하였다. 사건발생 후 조성환, 신규식, 백찬익 등 한국 독립운동 활동가들과 몇천명의 대종교 교도들이 북경, 상해 길림 등지에서 성원활동을 벌렸다. 강대한 사회여론의 압력하에서 무송 경찰당국은 윤세복을 18개월간 구류하였다가 무조건 석방을 했다. 출옥 후 윤세복은 무송을 중심으로 장백, 안도, 화전, 반석, 길림 등지의 한국독립운동력량과 민족교육력량을 윤세복을 위수로 하는 대종교 기치하에 응집시켜 민족독립운동의 정신기둥으로 되게 하였다.1916년 4월 1일, 윤세복은 ‘상교’로 승진했다.

  1917년, 일본제국주의의 진압과 박해를 피면하기 위해 대종교 총본사를 흑룡강성 녕안현 남관으로 옮기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결속되였다. 중국 동북지구에 분산되였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은 길림에 모여 한국독립운동 방침과 책략을 연구하고 저명한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윤세복은 기타 동북 각지에서 모여온 39명 대표와 함께 ‘대한독립선언’에 서명했다. 그중 대종교 교도가 25명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대종교 핵심인물들이였다.

  1919년 ‘3.1운동’기간 대종교는 만명 교도들을 조직하여 평화시위를 진행했다. 1920년 10월, 봉오동전역과 청산리전역 결속후, 일본제국주의는 대량의 병력을 증파하여 연변지구의 한국 항일무장부대와 단체에 대해 미친듯한 토벌을 진행했다. 1920년 11월,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에 설립되여 있던 대종교 총본사도 토벌의 위협을 받았기에 할수 없이 밀산 당벽진으로 옮겨갔다.

  1921년 6월 5일, 윤세복은 밀산 당벽진으로 왔다. 민중들의 애국정신을 불러일으키고 민족문화수준과 민족의식을 제고하기 위해 대흥학교를 건립하였다. 윤세복이 교장을 담당했는데 학생수는 70여명이였다. 학생래원은 당벽진, 련화촌 및 주변 조선인들의 자연촌에서 왔다. 윤세복의 제의에 근거하여 학교에서는 또 녀학생을 모집하였다. 학교의 설립취지는 ‘리상이 있고 포부가 있으며 지식이 있고 신체가 건강한 항일후비력량을 배양’하는것이였다. 대흥학교는 후에 ‘대종학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학원에서 개설한 과목으로는 ‘조선국문’, ‘4서5경’, ‘산술’, 및 ‘신단식기’, ‘조선상고사’, ‘초등대동방사’등이 있었다. 윤세복은 학원을 위해 친히 교가를 썼는데 가사 대의는 이렇했다.

  4백장 봉밀산을 등지고

  8백리 흥개호 굽어본다.

  생기 흐르고 사기 높은

  배달소년들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세

  학원의 조건은 매우 간고했다. 3간의 낮고 습한 초가집은 학생가장들이 의무노동으로 수건한것이였다. 건축재료는 매 학생들의 집에서 조금씩 모은 입쌀과 바꾸어 온것이였다. 학원에는 그럴듯한 책걸상도 없었다. 겨울이면 저급학년의 학생들은 따가운 구들에 앉아 상과를 할수 있었다. 고급학년의 학생들은 할수없이 나무도마같은데 앉았다. 많은 학생들은 필과 종이가 없어 모래판과 석판에 글을 련습했다. 학습조건은 매우 간고했지만 매 학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대종학원’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 윤세복은 많은 방법들을 생각했고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학생가장들을 학원에 요청하여 의견을 교류하고 청취했으며 학원사업을 개진하기에 노력했다. 춘경이 결속된 후 학원에서는 학생들과 가장들을 조직하여 흥개호반에 가서 단오절 활동을 전개했다. 학생들과 가장들은 모두 명절차림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기쁨에 넘쳐했다. 그들은 또 가정을 단위로 풍성한 먹거리를 준비해 가지고 신근한 로동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쾌락을 향수했다. 윤세복은 기회를 틀어쥐고 학생가장들에게 일본제국주의가 한국내각을 강박하여 “을사조약” 을 체결하고 한국을 침략한 죄행을 공소하였으며 가장들이 단결일심하고 아이들을 교육하여 학습을 잘 하게 하며 애국심과 민족책임감을 증강하고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시시각각 준비할것을 요구하였다.

  학생들에 대한 윤세복의 간절한 마음에 감격한 많은 가장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륜번으로 윤세복의 일상생활을 도맡았다. 그들의 진정은 윤세복을 크게 감동시켰다. 하지만 그는 가장들의 호의를 완곡히 사절하였으며 ‘당신들의 생활도 넉넉하지 못하기에 나는 당신들에게 페를 끼칠수 없다. 나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잘 돌보며 그들로 하여금 학습도 잘하고 건강히 성장할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윤세복은 당벽진에서 민족교육발전을 중시하는 동시에 대일시교당을 리용하여 선교활동을 진행했다. 그는 대종교 교의와 ‘신민단사’, ‘국조단군 사기’, ‘단군사고’, 등 민족력사를 열심히 강의하면서 교도들의 애국애교열정을 격발시켰다. 매년 10월 3일 ‘단군절’이면 윤세복은 교도들을 조직하여 의식을 거행하고 태극기를 올리며 독립가를 불렀다.

  민간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윤세복은 앞장서 조선인운동회를 소집했는데 전례없이 흥성했다. 운동회에는 당벽진 상중하촌, 신흥동, 련화촌, 류수구촌, 한흥동, 룡왕묘, 황강, 봉황덕, 까라툰, 복흥촌, 시달린즈, 덕흥촌, 대흥촌, 러시아 원동촌 등 20여개 조선족촌의 대표팀과 운동원들이 참가했다. 윤세복은 개막식에서 연설을 진행하여 전민이 행동하여 조국독립과 민족해방투쟁을 끝까지 하자고 호소하였다. 사람들은 팔을 휘두르며 ‘조선독립 만세’,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자”’등 구호를 소리높이 웨쳤다.

  1922년 4월, 대종교 총본사는 밀산 당벽진으로부터 녕안현 남관으로 옮겨졌다.

  1924년 2월 26일, 윤세복은 녕안 남관에서 제3세 ‘도사교’즉 대종교 주교로 승급되였다.

  1927년 봄, 윤세복은 밀산 당벽진으로 와 백포 서일종사의 유해를 불에 태운 후 골회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 뒤산에 안장하여 라철, 김교헌, 서일--- 3종교 신선들이 함께 잠들게 했다.

  1928년 11월, 윤세복은 핍박에 의해 또 한번 대종교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고 권녕준의 집에 은거해 있었다. 일상교무활동외 윤세복은 전부 정력을 종교리론연구에 투입했다.

  1933년 1월 8일, 윤세복은 당벽진에서 일본이 밀산현성을 강점했다는 소식을 들은후 극도의 비분에 잠겨 련속 일주일 단식하는것으로 항의를 표시했다. 그의 종종의 의거는 일본군경과 스파이들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1933년 2월, 일본간첩 한기준의 제보에 의해 윤세복과 권상익 등 20명 교직인원은 밀산경찰서 일본군경에 의해 체포되였다. 모진고문앞에서도 윤세복은 굴하지 않았고 의연히 자기의 신념을 견지하였으며 일본군경과 날카롭게 투쟁했다. 후에 중공지하당원 경찰서장의 담보하에 석방되였다. 그러나 대종교의 밀산에서의 활동은 제한을 받게 되였다.

  출옥 후 윤세복은 ‘천조신’의 ‘종교의 사명은 시교를 시행하는 것이며 안일한 은거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묵시를 받고 순회 시교하려고 결정했다. 그후 윤세복은 권상익 등 대종교 청년골간들을 거느리고 당벽진을 떠나 밀산으로부터 평안진, 해림, 녕안 등지를 순회하며 선교하는 길에 올랐다.

  1935년 6월, 윤세복은 대종교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부터 녕안현 동경성으로 옮겨갔다./맹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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