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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27.혼자 다녀온 등교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2.18일 09:29
드디여 겨울방학이 되여 나는 연변대학에 가야 하였다.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것도 아버지한테 말하고 약간의 돈을 타가지고 길을 떠났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곁에 없이 떠나니 근심이 되였지만 동생이 동행해주니 마음은 든든하였다.

동생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늘 사람들한테 나의 오빠로 인정받아오던참이다. 그는 넓은 어깨로 나를 훌쩍 업어서 차에 올려놓고 장애인차를 짐차에 붙여보냈다. 연길역에 도착한후 동생은 또 나를 업고 그 많은 사람들속을 비집고 나와서 짐바곤에 가 장애인차를 찾아서 나를 앉혔다.

내가 길을 모르기때문에 동생은 또 나를 밀고 걸어서 연변대학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차로 집으로 돌아가느라고 숨도 돌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그것도 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뛰여서 가야 했다.

이튿날 시험을 쳐야 하는 동생은 너무나 바빴다. 하지만 그는 모든것을 제쳐놓고 나를 데려다주는것이였다. 나는 너무 감사하여 동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바램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꼭 나절로 돌아가리라 결심하였다.

보름가량 집중수업를 받고 끝는대로 기차역에 나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광장에 한참 멍하니 앉아있다가 차표부터 끊어놓았다. 다음 짐 부치러 화물을 운반하는 차를 따라 홈에 나갔다. 모든 기차는 연길역에 약 8분가량 멈춰서는데 그동안 차를 짐바곤에 갔다놓고 다시 걸어서 객차에 오를만할지 걱정이였다.

기차가 홈에 들어서니 가슴부터 떨려났다. 나는 짐바곤까지 장애인차를 타고 가서 운반공아저씨들한테 맡기고 부랴부랴 객차바곤으로 왔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오를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 올랐겠다싶어 막 기여오르려는데 또 한무리 사람들이 몰려드는것이였다. 너무도 급해 지팽이도 짚지 못하고 차우에다 책가방과 지팽이를 올려뿌리고 네발로 기여올랐다. 그런데 뒤에 선 사람들이 기다릴수 없어 내옆으로 나의 손을 마구 짓밟으며 오르는것이였다. 나는 밀치여 몸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차장이 보다 못해 밀치는 사람들을 말려서야 나는 겨우 기여오를수 있었다.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손과 무릎은 흙투성이 되였다. 그런 꼴을 보기 안스러웠던지 사람들은 《걷기 힘든데 집에 가만 있을것이지 뭐하러 이렇게 쏘다니는가.》한다.


나는 설음이 북받쳐 코마루가 찡해났다. (누구는 다니고싶어 다니는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도 싫고 또 남의 부담거리로 되기도 싫어 이 고생을 하는거다! 알기나 하고 말들 하는가 이 사람들아!.) 나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삼키였다.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상해에서 돌아와있었다. 그런데 집안분위기가 말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그간 못한 분풀이를 어머니와 하던중이였다. 내가 들어가자 아버지는 총부리를 나한테 돌리는것이였다.


《너 시험치러 간다 해놓고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


《시험을 치고 면접시험도 받아야 하니깐 그렇게 되였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면접시험을 받는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트집을 잡느라고 나한테 걸고드는것이였다. 그리고는 몇달전에 허락없이 김치를 담근일이며 배를 남한테 판 일이며 두루두루 해서 몇시간동안 고함을 치며 난리를 치고서야 안정을 취하는것이였다.

나는 그것으로 끝인가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5월에 학교에서 학비를 내라는 통지가 왔다. 아버지는 학비를 안 대주겠다고 잘라말하는것이였다.


나도 배심이 났다. 그까짓 많지도 않는 학비때문에 사람을 못살게 구는 아버지가 너무도 괘씸했던것이다. 나는 정 안 대주겠으면 나절로 대겠으니 아버지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도 나의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작 돈을 벌자고보니 그렇게 쉽지를 않았다. 팔다리 성한 사람은 아무 일 해도 괜찮겠지만 오금을 쓸수 없는 나는 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돈 200원을 벌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을수 없었다. 생각던끝에 유치원을 꾸리는것이 제일 적합할것 같았다. 나는 유치원을 꾸리려면 시내 다른 유치원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색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 있는 재간이라면 외국어밖에 아는것이 없으니 외국어유치원을 꾸리기로 하였다. 마침 한 친구가 나서서 함께 하자는것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순풍에 돛단격이 아니였다. 광고를 열몇장 써서 거리에 붙였지만 물어보는 사람은 있어도 아이를 진정 맡기겠다는 사람은 며칠이 지나도록 나서지를 않았다.


그것도 장소가 없어서 친구의 세집에다 꾸렸는데 방안이 좁은것은 둘째치고 시설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이라는 나는 제몸도 가늠하기 힘든데 어느 누가 감히 아이를 맡기겠는가?

나는 하는수 없이 문구공장의 책을 가져다 매기로 하였다. 한권 꿰매면 5전씩 하는데 꾸준히 하면 돈 200원은 벌수 있을것 같았다. 종래로 바늘같은건 쥐여보지도 못한 나는 솜씨가 서툴기 그지없었다. 자꾸 바늘로 손끝을 찔러 피가 나왔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일에 접어들었다. 무슨 일을 해서든지 200원 학비는 꼭 벌어야 하기때문이다.

이럴즘에 아버지는 내가 없는틈을 타서 학교에 부쳐보내자고 미리 해두었던 숙제책을 어디다 버렸는지 아니면 감추어놓았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숙제는 작문짓기였다. 나와 송선생님이 함께 일본어클래스에 다니던 생활경력 한단락을 묘사한것이였다. 그런데 그걸 대체 뭘하려고 가져갔는지 알수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것은 아버지는 나를 무서워하는 처지도 아닌데 꼭 내가 없는 사이에 나의 물건들을 들추어보군 하였다. 뭘 가져가도 말 한마디도 없다. 나는 물어도 못보고 또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해줄것이니 그저 멍하니 당하는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다가 책마저 잃어버릴것 같아 나의 모든 책들을 친구의 집에 가져다 보관시켰다. 이 책들은 나한테 어떤 존재라고 내가 신경을 쓰지 않을수 있겠는가? 나는 녀자로서 이날 이때까지 연지꼰지 발라본적도 없다. 옷도 대수 입을것이 있으면 된다. 먹는것도 별로 추구하지 않았다. 생활에서는 특별히 즐기는것도 없고 또 특별히 싫어하는것도 없다. 그저 있는대로 먹고 쓰군 하였다.

나에게는 책이 재산이다. 나는 돈만 있으면 책을 산다. 한번은 이모가 우리 집에 왔다가 나의 옷단장이 너무 소박한걸 보고 돈을 주면서 꼭 옷을 한벌 맞추어 사입으라고 하였다.

이모가 돌아가자 나는 그 길로 서점에 가서 사고싶었던 책들을 몽땅 샀다. 서점의 공작인원들은 모두 나를 알고있었다. 그들은 내가 책을 살 때면 늘 곱게 포장하여 나의 장애인차에까지 들어다주군 하였다.


사고싶은 책이 있으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간에 꼭 사고야만다. 하여 나한테는 책이 몇자루나 되였다. 나는 이 책들을 아주 소중히 여겼다. 불안전감을 느낀 나는 책들을 전이시키느라고 아주 혼줄이 났다.


아버지는 나의 책이 없어진것을 보고 당장 가려오라고 호통치는 것이였다. 3일내에 가져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것이였다. 그리고는 나의 장애인차 열쇠도 물수해갔다. 든든히 족칠 태세였다.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집에서 공부를 할것 같지 않았다. 공부를 매일 해도 모자라겠는데 이렇게 싸움만 하다간 일을 그르칠것 같았다. 하는수 없이 나는 집을 떠날 생각을 하였다.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설복할수 없고 또 한편으로는 견정불이한 나를 그만두라고 할수 없으니 내가 하는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두 병신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였기때문에 집을 나간다는것은 아주 위험한 선택이였다. 하지만 공부는 해야 되겠는데 집에서는 할수 없으니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아야 한다. 어머니도 어디 거처할데 있을지 찾아보란다.


나는 먼저 친구를 시켜 장애인차 열쇠를 마스고 빼내오게 하였다. 장애인차는 나의 《다리》이니깐 그것이 없으면 아무데도 가기 힘들다. 그리고는 아버지한테 글쪽지 한장을 남겨놓았다.


《아버지, 이때까지 키워준 은정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인젠 나도 다 컸으니 나의 일은 나절로 해결하려고 생각합니다. 이제 훌륭한 사람이 되여 돌아올테니 내가 없어도 찾지마십시오. 안녕히!》

편집/기자: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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