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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갸거겨 우리 글소리 여기서도 랑랑하구나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1.30일 22:32
[특별기고]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취재팀 산재지역 조선족교육현장 찾아 수천리

/림금산 유빈 김연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는 올 10월 16일부터 11월 19일까지 한달여의 시간을 들여 동북3성 조선족산재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교육현장취재를 펼쳤다.


사내 1급 지도부성원 3명이 모두 교육현장일선에 직접 내려갔는바 김학천사장을 비롯한 3명 기자들로 무어진 취재팀은 료녕성 10개 조선족소학교를 탐방, 취재하였고 류락현부사장을 비롯한 2명 기자는 흑룡강성에로, 황권호부사장을 비롯한 2명 기자는 길림성 조선족산재지역에로 각기 심입하여 교육현장에 대한 심층취재활동을 펼쳤다.



세 취재팀은 단순 민족학교 교육현장취재뿐만아니라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내여줄 구체명단도 온양, 선정하였으며 학교와의 감정교류와 함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그들은 이번 취재를 통하여 26개 민족소학교의 학교현황 기록부를 작성했으며 40여편의 보도를 써냈고 4만여자의 조사보고와 300여장의 사진자료를 얻어냈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 김학천사장 민족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앞서가는 교장과 앓아누운 교원


차창으로 뉘연한 흑토벌이 북으로 북으로 거무스름하게 널려져있는것이 보인다. 마음은 어쩐지 무겁고 착잡하기만 하다


글소리 랑랑하던 우리 민족 학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눈앞에서 스러져가고있는듯하다. 조선족집거구인 연변지역이 학교소실속도가 아주 빠른데 비해 산재지역의 학교들은 어떤 형편인지?


가을이 깊이 물든 지난10월 24일 저녁녘에야 우리 취재팀은 산재지역 조선족소학교육현장을 찾아서 북녘땅 천리행의 첫역으로 길림성 서란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대문을 노크하였다.


초겨울에 접어들 준비를 하느라 그런지 그날따라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짓눈비가 세차게 내리고있었지만 우리가 취재차 찾아간다는 기별을 미리 전달받은 이 학교 김필선교장은 이미 퇴근시간이 다되였어도 널직하고 호화로운 교장실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김교장은 우리의 취재의도를 유심히 듣더니 덕육부교장, 업무부교장과 유치원 원장까지 학교 주요지도부성원들을 몽땅 불러놓고 학교소개와 함께 우리의 여러가지 질문을 일일히 답하였다.

길림성 서란시조선족실험소학교 청사내 복도 한모퉁이


학교는 너무나 좋았다. 지난해 첫학기까지만도 아주 헐망하던 학교를 김교장과 주요지도부성원들은 앞뒤로 뛰여다니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싶이하여 많은 자금을 인입받아왔고 그래도 자금이 모자라자 학교의 부지면적을 더러 팔아가면서까지 총투자 600만원으로 이 호화롭고 현대화적인 교수청사를 새롭게 지어내는데 성공했단다. 부지면적이 1만 8000평방메터에 건평이 5000평방메터인 이 호화청사는 원래의 낡은 교사보다 700평방메터나 더 크단다. 그간 김교장은 여러차 눈물까지 흘리면서 학교의 래일을 위해 피땀을 쏟았단다.


우리는 이들의 한숨과 땀으로 이루어진 학교청사를 일일이 돌아보면서 눈이 부시여 부지런히 카메라 샤타를 눌러댔다.


1936년에 창립된 이 학교는 지난해 하반년부터는 현대적으로 건설되여 지금은 최고급전기화실, 밝고 호화로운 교실, 내부장식이 너무나도 이쁘고 난방설비가 잘되여있는 기숙사, 꼬맹이들 마음에 꼬옥 들게 꾸며진 아담한 유치원놀이장과 학교음식점… 모두가 그렇게도 잘 다음어져 마치도 포근한 부자집에 들어선듯하였다.


기숙생들은 네 선생님이 직접 지도하는 야간교실에서 숙제공부를 마치고는 넓고 큰 객실에 모여 텔레비도 보고 또 4명 학생씩 취침할수 있게 꾸며진 11개의 침실에서 꿈속에 들어간다. 침실마다 문어구엔 4명 학생의 이름과 채색사진이 꼭꼭 박혀있고 침대마다 학년과 학급이 밝혀있었다. 또 저급학년애들을 위해 책임진 선생님이 데리고 자는 칸이 두개나 되여있어 진짜 개인집 침실과 꼭같았다. 이들의 빨래는 몽땅 교원들이 해준단다.


헌데 너무도 크고 호화로운 학교청사에 비해 학생이 고작 160여명밖에 안되여 너무나 아쉬웠다…

길림성 서란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아담하고 정갈한 학생침실



이튿날 우리는 서란시 평안진에 있는 또다른 학교 서란시 평안진조선족소학교에 찾아갔다. 평안학교 학생은 40명밖에 안되였다. 수십년간 이 지역 촌소학교들을 돌며 교편을 잡으면서 우리 소년보사에 많은 원고를 보내주었고 또 서란지역의 꼬마기자들을 많이도 배양해줬고 서란지역에 소년보를 많이도 홍보해준 김룡환선생이 바로 이 학교에 있다는 소식과 또 그 김선생이 페암으로 심하게 앓고있다는 소식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었던것이다.


우리는 김룡환선생님을 꼭 찾아보고 위안의 말이라도 올리고싶어 덜컹거리는 시골길에 택시를 들이 밀었지만 아쉽게도 김선생은 학교에 없었다. 이 학교 신명숙(50세) 현임교장의 말에 의하면 김룡환선생은 병환이 위독하여 3-4개월 심히 앓다가 이미 길림시에 있는 부대병원으로 갔단다… 우리는 가슴 한구석을 꼭 물어뜯는 아픔을 느끼며 전국에 있는 조선족꼬마독자들을 대표하여 김룡환선생님의 건강회복을 빌고 또 빌었다…


오상시의 민족의 요람에서


흑룡강성 오상시조선족실험소학교는 1934년 3월에 오상충인국민학교란 이름으로 건립되였다. 흑룡강성모범교사이고 올해에 44세인 이 학교 제13대교장 추옥단선생님께서 회의도중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학교의 연혁으로부터 학생수며 특색활동에 대해서 취재를 펼치는데 김분화부교장, 과학을 책임진 김명화주임, 덕육을 책임진 장미옥주임 등 말짱 젊은 녀교원들이 교장실에 올라와 우리와 일일히 인사를 나누면서 취재를 받아주었다.


교장실옆칸이 바로 그 유명한 《민족문화교실》(제7호)인데 2008년에 오픈한것이다. 들어가보니 마침 고급학년학생들이 저급학년 학생들한테 도도리를 배워주고있었다. 현대화적인 널직한 장소인데 민족무용, 민족례절과 민속 등을 위주로 랑독시합이나 대형행사를 진행할수 있는 좋은 활동실이였다. 지어 떡이나 김치같은 민속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여기서 가르친단다.

흑룡강성 오상시조선족실험소학교 학생들 민족문화교실에서 수업- 한복 저고리 고름 매기



우리는 이 학교에서 다재다능한 소녀로 소문이 자자한 6학년1학급의 정세나학생을 만났다


올해에 12살인 정세나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껏 시종 무용을 배웠는데 때로는 두다리가 시큰해나고 어깨마저 부어나 얼음찜질까지 해가면서도 련습을 견지하여 학교무용대 일원으로 여러가지 경축대회와 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였으며 수많은 영예들을 따냈단다. 작년 예술절에 그가 출연한 《소고춤》은 할빈시1등상까지 안았다.


그애는 또 사회도 곧 잘하는데 1학년에 입학해서부터 지금껏 부반장직무를 맡고있으면서 학급에서 조직하는 주제반회나 활동과를 할 때면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공인하는 인기사회자로 활약하고있으며 학교에서 주최하는 이야기대회, 노래자랑, 랑독, 랑송대회에도 참가하면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지난 6월에 있은 할빈시중소학교글짓기경기에서 그애가 쓴 작품 《사진》은 또한번 1등의 영예를 안아왔단다.


그애는 또한 생활의 강자이기도 하단다. 아빠, 엄마가 두살짜리 어린 동생과 그애를 남에게 맡겨놓고 출국하였지만 현실을 정시하고 성격이 명랑하고 배움의 즐거움과 생활의 유쾌함을 즐기면서 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굳게 다짐하곤 매일 하학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동생을 보살폈고 집일도 도왔지만 이 6년간 학습성적은 시종 1, 2등을 다툰단다…

흑룡강성 오상시조선족실험소학교 무용수들의 손북춤



1만 6000평방이 된다는 운동장으로 나와보니 하너른것이 눈앞이 시원히 트이였다. 건평이 2280평방메터인 이 학교는 시중심에서 좀 나와 있어 환경이 아름답고 록화가 잘돼있었다. 학교는 각종 시스템이 잘 짜여있었고 교원대오도 깔끔하고 탄탄했다. 2003년에 새로 지었다는 학교청사는 아직도 너무나 새것 그대로였다. 이처럼 여러가지 시설들이 굳건히 현대화적으로 짜여있는 시점에도 학생수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로 조금 아쉬웠다. 270명이면 흑룡강성에서는 그래도 꽤 많은 학생수였으나 우리 마음은 그냥 서글펐다.


김분화부교장은 말한다. 《광휘향중심소학교와 소산자진중심소학교가 합병했다가 지금은 모두 소실되였습니다. 민락향중심소학교는 올해에 문을 닫았습니다.》 말하는 그의 얼굴에도 어딘가 그늘이 비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 한편 정세나와 같은 재간많고 강직하고 귀여운 학생들이 이 학교를 빛내주고 추교장을 위수로 한 젊고 패기있는 골간들이 있음으로 하여 이 학교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위안도 받아안게 되였으며 마지막까지 산재지역에서 우리 민족소학교육현장을 굳건히 지키는 그들에게 머리숙여 경의를 드렸다.

북방의 모스크바는 마냥 부유하지만…


우리는 흑룡강신문사 정봉길주임의 소개로 100여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는 흑룡강성 할빈시 도리구조선족소학교로 찾아갔다. 언제나와 함께 준수하고 깔끔한 모습의 백미옥교장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널직하고 호화스런 교장실에서 우리는 이 학교가 부유한 학교임을 인차 감득할수가 있었다. 백교장의 소개에서도 이 학교는 가난티를 벗어메치고 부유의 길로 가고있음이 확연히 알렸다.


우리는 일부러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은듯한 꼬맹이들의 주제중대활동도 구경하였다. 화려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애들이 소선대대기를 들고 중대활동을 펼치는데 주제는 공중례절을 잘 지키자는것이였다. 너무나 재미나게 부드러운 활동이여서 우리는 연신 샤타를 눌렀다.

활동이 끝난후 우리는 이 학교의 특장생 두애를 불러보았는데 다 한족녀자애였다. 한애는7가지 외국어를 배우고있었고 전교에서 공부가 계속 1등을 확보하고있었다. 다른 한애는 꼬마무용수였다. 그는 여러차 할빈시 중소학생 문예경연에서 무용1등을 따냈으며 홈타민컵 예술경연에서도 1, 2등을 따냈었다.

학생수가 150여명밖에 안 남은 이 학교를 계속 살려내자면 백교장의 방법은 특장생 양성과 함께 특색교육의 대폭적인 인입이란다. 그래서 백교장은 한족학교에서는 진행할래야 할수 없는 무용이나 민속례절, 민족체육 등을 틀어쥐여 린근 한족학교의 아이들을 유혹하고있었는데 우의 두 학생은 성적이 우수하여 이 학교의 홍보역할을 썩 잘해주고있어 학교립장에서는 아주 소중한 재부로 된다고 한다…


경제여건도 있고 학교청사도 그만하면 현대화적인데 고프고 모자란건 역시 학생근원임을 우리는 재차 정시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늘 시간이 급한 우리는 차머리를 돌려 할빈시 동력구조선족소학교로 질주하였다.

할빈시 동력구조선족소학교 하키팀 선수들 전국시합에서



한어말은 한족보다도 더 잘하나 조선말은 잘하지 못하는 최명옥교장이 조선말을 잘하는 나젊고 해박한 설금옥주임을 옆에 불러놓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교장실은 너무나도 크고 호화스러웠다.

우리는 최교장과 설주임의 안내하에 학교의 이모저모를 구경하였다. 진짜 현대화설비에 현대적 시스템이였다. 300-400만원을 투자하여 장식했다는 학교는 모든것이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행복의 요람이였다. 열람실, 무용연습실, 체육실, 도서관, 소발명실, 전기화교실, 실험실 등이 모두 최고급이였을뿐만아니라 교원들의 사무실도 독칸이 아니면 많아야 두명씩인데 책상이나 쏘파나 다가 알른알른한 새것이고 고급적인것이여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개운해났다.


1층에 내려가니 이 학교 유치원이였는데 유치원에만 140만원을 투자하여 장식했단다. 식당이며 잠자리며 놀이터며 지어 위생실까지 모두가 깔끔하였다. 진짜 동화속의 꼬마왕자들과 꼬마공주들이 별장속에서 행복하게 살고있는 모습이였다.


허나 우리 말이 잘 안되여 혀를 홀랑 내밀었고 일상용어가 거의가 한어였으며 역시 유치원생수가 고작 몇십명밖에 되지 않아 우리는 위기감은 버릴수가 없었다…

조상지장군의 고향에서

흑룡강성 상지조선족소학교 학생들 민속놀이 흥미진진



할빈역 남강려객운수참에서 장거리 뻐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10월 27 저녁녘에야 지친 몸을 이끌고 조상지장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상지시에 도착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인 상지진조선족소학교로 곧추 들이닥쳤다.

학교는 너무나 오래된 건물이였고 모든것이 이미 색이 날았고 한물 져 있었다. 저녁녘 우리의 돌연적인 출연에 이게 웬 홍두깨냐는듯 구용수교장은 어정쩡해 있었다. 우리는 여차여차 자초지종을 말하고 수인사를 마쳤다. 새로 갓 교장으로 부임된 구교장은 려로에 지친 우리 모습을 인차 감득하고 업무능수이고 오랜 학교령도인 강원옥부교장을 불러 함께 《외할머니장국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할빈에서 중국음식에 혼이 떨어진 우리는 완전 연변맛을 돋구는 장국을 훌훌 마시면서 구용수교장의 구수한 창업담을 거의 두시간가량 들었다…


시골소학교에서 다년간 교장사업을 했던 구교장은 지금 한창 상지조선족소학교를 꾸리느라 불철주야 로심초사하고있었다. 이 학교는 관건은 경제가 잘 풀리지 않아 애타하고있었다. 학생수는 그래도 유치원까지 합해서 300명정도였는데 경제근원이 희미했다. 교육국에서는 학생인수에 따라 돈을 내려보내는데 그걸로는 학교일상지출은 겨우겨우 에때우지만 학교건설은 못한단다.

그래서 구교장은 장사하는 친구들이나 친척, 동창 등 두루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다 찾아서 돈구걸하는 《거러지》신세로 매일매일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지난번 교사절에도 수년만에 퇴직로교원들을 모셔다 학교운영에 대해서 회보하고 좌담을 조직했는데 퇴직교원들까지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 3000여원을 내놓더란다.


구교장은 말한다. 《학교를 살리자면 민족체육과 민족문화, 민족예술을 흥기시켜야 합니다. 한족학교의 모식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당지에서 이름있는 체육인사, 무용인사를 초빙해 축구와 무용을 본격적으로 틀어쥘 예정인데 이 사업이 이미 시작되였다고 한다.


우리는 잠시는 경제난으로 조금 주춤하고있지만 구용수교장의 패기와 신심과 강원옥부교장 등 경험있고 민족혼을 불사르는 많은 교원들의 지지가 있는 한 이 한 사업은 꼭 원만한 성과를 거두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흑룡강성 상지조선족소학교 꼬마연예인들



젊은 교장의 오돌참과 열정


우리는 해빛밝은 녕안시조선족실험소학교 정원에 들어섰다. 할빈에 회의갔던 김련희교장이 우리가 학교에 취재를 간다니 밤도와 돌아와 김화주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그 머나먼 할빈에서 밤도와 녕안까지 와준 그의 소행과 토요일휴식날인데도 우리의 취재를 반가이 접수해주는데 대해 너무나 감사했다.

김교장은 너무나 나어린 교장이였다. 31세에 녕안시교육국으로부터 교장으로 부임돼와서 올해는 34세란다. 그는 이 몇년간 층층마다 실내 위생실을 다 꾸몄고 란간도 교육국이 이사할 때 그 낡은걸 다 가져다 새로 칠해서 가설했고 난방설비도 재빠르게 다 갖춰놓아 올겨울은 따뜻이 보낼수가 있어 전교 사생들이 행복해한단다.

이 학교는 흑룡강성에서 학생이 두번째로 많아 목단강학교 버금으로 갔다. 유치원생수도 제일 많을 때는 200명까지 된단다. 우리는 그래도 이 학교에서 학생수에 대해선 신심이 생겼고 앞이 내다보였다.


교원대오건설에서도 인재전략에 능한 김교장이였다. 각지 촌소나 작은 학교들이 수시로 무너지고있는 현시점에서 김교장은 재능있는 교원들을 인차인차 이 학교로 파오고있었다. 연변작가협회 회원이며 흑룡강성에서도 중견으로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리창현시인부부도 김교장이 2년간의 노력으로 파왔던것이다. 지금 리창현선생은 학교 11개 학급에서 유일한 남자담임교원이자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이 학교의 교원, 학생에 대해 글을 써서 사회에 홍보하고있으며 자신도 많은 시와 수필을 문단에 발표하고있고 맡은바 사업도 착실히 잘해 김교장의 칭찬이 자자하다.


이 학교에서는 학교운영에서 모든것을 점수제로 하고있었는데 소년보에 문장을 발표하면 전국급신문에 발표되였다고 최고점수를 준단다. 교학도 마찬가지다. 교학질이 높으면 점수가 올라가고 아무리 로교원이라도 교학질이 낮으면 그만큼 점수가 내려간단다. 지각, 조퇴, 결석 등이 모두 점수제로 되여있고 지어 학생이 문제생겨도 그 학생을 책임진 담임의 점수가 떨어진단다. 학기말에 가면 선진선거도 점수가 높낮음에 따라 자연히 알려진단다.


이 학교에서는 그 드바쁜 특색활동과 교학의 와중에도 신문이나 잡지 구독에 대해 아주 착실하게 밀고나가고있었다. 학교 현관에 들어서면 제일 유표하게 보이는것이 신문잡지를 알뜰히 오려붙인 벽보란인데 거기에는 이 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여러가지 쟝르의 문장들이 붙어있었다. 소년보를 오려붙인 수가 제일 많았다. 우리 소년보 구독수도 제일 많았다. 300여명 학생에 200여명이 소년보를 읽고있었다.


학생 11명밖에 안 남은 학교


10월 29일, 우리는 동경성쪽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해빛이 호듯호듯 떨어지는 운동장에서 깔깔대며 뛰놀던 성동향중심소학교랑 우창소학교랑 그냥 그자리에 있을가?


우리 흑룡강취재팀은 먼저 흑룡강성 녕안시 동경성진 성동향중심소학교를 찾았다. 헌데 이 학교 옛터는 이미 쑥밭으로 무성하고 학교는 다른데로 이사했는데 학생이 11명밖에 안되였다.


나의 눈앞에는 이 학교에 아직도 200여명 학생들이 공부하고있던 10여년전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이 학교는 이상하게도 창문마다 널문을 해서 달았었는데 낮에는 광선때문에 널문을 열어젖히고 상학하고 저녁이면 널문을 꽁꽁 닫아걸어놓고있었다. 교장한테 원인을 물으니 저녁마다 술취한 사회청년들이 학교부근에 와서 돌총을 놓아 유리창을 다 마사버린단다.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저 재미로 그런단다. 조치를 대다 못해 나중엔 창문마다 널문을 다는 방법아닌 방법을 찾아낸것이란다. 나는 그때 억이 막혔다. 널문을 단 교실 창문이 세여보니 200여개나 되였다.

그때 운동장에는 또 옆의 목재가공공장에서 실어다 놓은 통나무가 여기저기에 무져져 있어 아이들의 활동장소는 점점 좁아지고있었다…


헌데 그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이악스레 공부하던 애들이 지금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마당은 온통 쑥대밭이 되였고 교실들은 이미 다 헐망한대로 목재가공공장의 창고로 되여버렸다.


학교소실속도가 이토록 빠를수가 있는가? 당시 이 학교 부근 어느 촌소에서 교원사업을 했던 리창현선생도 우리와 동행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이 학교는 벌써 몇년전에 소실되였단다. 우창소학교는 더 먼저 없어졌고. 소학교는 지금 학생이 11명밖에 없는데 오래지 않아 역시 소실될거라고 했다. 그도 가슴이 아파 연신 한숨만 쉬는것이였다.


우리는 아쉬웁고 무거운 마음을 안은채 한때는 700여명 학생이 왁작거렸다는 성동중심소학교 옛터를 떠났다…

교육질로 승부수 띄운다

지난 10월 17일, 기자일행은 료녕성 본계시조선족학교를 찾았다.

료녕성 본계시조선족학교 교수청사



건국초기, 본계시 조선족들은 어려운 생활형편에서도 자금을 모아 학교를 일떠세웠다. 학생이 가장 많을 때에는 700명 가까이 있던 본계시조선족학교가 현재 200여명 이내로 줄어들었다. 격변기 진통을 겪는것이다.


기자일행을 맞이한 이 학교 주문호교장의 첫인상은 인자한 옆집아저씨를 방불케 하는 후더운 타입의 50대 후반이였다. 교장실에서 내다보이는 널직한 플라스틱 새 운동장은 길옆 낡은 교수청사와는 색다른 모습이였다. 예쁘다고 감탄하는 우리를 보고 주교장은 그동안의 힘겨웠던 사례들을 떠올렸다.

장장 8년동안 변변한 운동장도 없어 운동대회를 갖지 못하는 아픔을 딛고 주교장은 거의 날마다싶이 교육국을 《출근》하였다. 민족후대양성에 향한 주교장의 성심과 일편단심에 못내 감복되여 지방정부에서는 마침내 자금을 투입하여 새 플라스틱운동장을 《선사》하였다.

한족학교는 학생수가 많아 인당 내려오는 경비도 많지만 조선족학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모든 일은 한족학교보다 배로 아니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였다.

학생근원이 줄어들던것이 인젠 거의 안정세를 찾아 조선족학교를 찾는 한족 학부모들도 늘고있지만 교직원이 부족해 더 받지 못하는 형편이라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학교는 소학교육으로부터 중학단계교육을 고루 갖추고있었다. 비록 학교 규모나 학생수에서 형제 한족학교와는 엄청 차이가 있지만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아 교육질이 따라서고 승학률이 높다보니 차츰 하락세를 보이던 학생수도 현재는 안정세를 갖는다는 주교장의 소개다.

1993년부터 련속 12년 100% 진학률을 보장했고 2002년에는 100%가 국가1본중점대학에 붙었다. 소문이 나가자 주변의 많은 조선족과 일부 한족들은 학생이 많은 한족학교보다는 학생수가 적고 진학률이 높은 조선족학교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주위 농촌학교들이 페교되면서 이 학교로 학생들이 모였지만 거리가 멀어 한족학교로 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학교에로의 류실을 막기 위하여 주교장은 여러 부문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통학뻐스도 마련하여 먼곳의 조선족 학생들도 편리하게 민족학교를 다닐수 있게 하였다.

반평생 교육사업에 몸을 담가온 주교장은 몇년후 자신은 퇴직하지만 산재지역민족학교에 전업교원이 모자라고 젊은피를 보충하려고 해도 오려는 젊은이들이 없는 현황에 가슴아파하면서 래년에도 연변대학으로 교사 초빙하러 가겠다면서 민족교육에 향한 드팀없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료녕성 본계시조선족학교 주문호교장



맺는 말


근 한달간의 조선족 산재지역 교육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많은것을 직접 보고 피부로 느꼈고 귀로 들었다.

제일 가슴아픈건 우리 민족 학생근원이 점점 적어지고 학생수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였다. 하지만 우리는 또 산재지구의 학교를 살리려고 특색교학과 특색활동, 최고급 교학설비와 교학방법의 도입 등으로 버티고있는 민족교육사업일군들과 교원들이 있음으로 하여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곳의 학교들은 차츰 학생수가 상대적 안정성을 보이고있으며 일부 학교는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의 과학적인 작용으로 학생수가 불어나고있음도 발견하게 되였다.

우리가 제일 기쁘고 가슴뿌듯하게 느낀 점은 그래도 우리 민족 교육현장에 아직도 수많은 민족혼을 가슴에 불태우고있는 존경스런 교원들과 그들을 탄탄하게 묶어세우는 교장선생님들이 있다는 그것이였다. 그들은 많은 경우 무보수 로동과 밤을 패고 피나는 로고로 높은 민족적 자각을 보이고있는것이다. 이런 민족적 자각이 있기에 우리 민족교육 역시 그 미래가 있을것이고 이런 민족적 자각과 민족혼은 이 시대를 살아본 우리 민족사회와 앞으로의 우리 민족력사에 길이길이 빛을 뿌릴것이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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