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한민족 > 한민족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밀산토비숙청전역에서의 조선족‘털보련장’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3.24일 10:00
원목단강군구 3지대경위퇀제3영제7련련장박춘근의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맹고군 피금련특약기자 최성림기자=1998년 10월 15일, 밀산시인민정부는밀산시렬사릉원에 52년전밀산토비숙청투쟁중장렬히희생된한렬사를위해새로기념비를수건하고렬사의유해를안장했다. 제막사의식에참가했던모든사람들은당년밀산토비숙청투쟁중이름만들어도적들의간담을서늘케했던조선족‘털보련장’의전기적영웅사적에한결같이감동을금할수없었다. 그가바로원목단강군구 3지대경위퇀제3영제7련련장박춘근이다.



  박춘근은 1893년조선충청북도청주의한농민가정에서태여났다. 1910년박춘근이 17세나던해, 일본제국주의는한국내각을핍박하여‘일한합병조약’을체결하고한국을병탄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탑동공원에서 3000여명의학생과군중들이집회를열었다. 박춘근도청주로부터서울로달려와‘대한독립만세!’, ‘일본군대는물러가라!’등구호를높이웨치며시위행렬에가담했다.

  1925년 7월, 32세의박춘근은압록강을넘어중국길림무송지구에왔으며조선혁명군에가입하여반일무장투쟁을전개해나갔다.1937년 7월, 박춘근이 소속한 조선혁명군 제3방면군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과 재정합하여 항일련군 제1로군 독립사로 개편되였다.

  1938년,조직에서는박춘근을동녕에파견해사업하게했다. 동녕에서박춘근은항일련군대오내의취사원최인숙을알게되였으며극히간고한투쟁환경속에서그들은부부의인연을맺게되였다.

  1939년가을, 최인숙은해산예정일을맞게되였다. 새생명의도래앞에서그토록남편이곁을지켜주길바랐지만박춘근은밀영에서전전하면서남편으로서의직책을다하지못했으며인편으로딸애의이름-- 영자두글자만달랑보내왔다. 1943년딸애가다섯살이될때에야박춘근은동녕에가족을안착시키고처음으로귀여운딸을안아보게되였다.

  1944년봄의어느날밤, 항일련군의 6명전사가비밀전이를하던중박춘근의집에머물게되였다. 자정이될무렵, 일본헌병대가불시에들이닥쳤다. 박춘근과항일련군전사들은미처피신하지못한채 모두체포되고말았다.

  일본헌병대에서그들은가혹한심문과형벌을받았다. 하지만항일의굳은의지와확고한신념만은버리지않았다. 감금된지 16일째되던밤, 박춘근과전우들은감옥벽을뚫고탈옥에성공했으며밤도와목단강철령하지구로전이해비밀항일활동을전개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쏘련홍군이목단강에진주했다. 박춘근은인츰목단강철령하에서청년들을조직해항일무장대오를건립하고광복을맞이했다. 1945년 11월 25일, 박춘근은청년무장대오를거느리고목단강군구 14퇀에가입하였으며제3영 11련련장을담임했다. 14퇀 3영은전부조선족전사들로구성되였으며전영의사기는매우높았고전투력도매우강했다.

  목단강군구의토비숙청투쟁은 1946년 2월, 북전자와오하림에둥지틀었던토비들을진공하면서시작되였다. 배겨내지못한토비들은목릉현마교하촌으로도망쳤다. 목단강군구사령부에서는마교하토비를진공하기로결정하고 14퇀 1영과 2영은매복하여마을을포위하게하였으며주공임무는 3영조선족전사들에게맡기였다.



  1946년 3월 18일새벽, 날이밝기시작하자 9련 1패는수류탄으로적들의방어진을돌파하고 9련과 11련전사들은돌진에나섰다. 적들은지형과엄호시설을리용하여완강하게저항했다. 점심무렵대부분토비들을섬멸했고나머지는도망쳐버렸다. 그번전투에서모두 100여명의토비를살상했고 20여명을포로했으며평사포 1문, 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4정, 권총 100여자루를로획했다. 우리군도매우큰대가를치렀는바 93명조선족전사들이장렬히희생되였다.

  1946년 2월, 박춘근은목단강군구 3지대경위퇀(이때 그는 제3영7련련장임)을따라계녕, 밀산지구의토비숙청투쟁에참가했다. 그때박춘근은7세밖에안되는 딸애를목단강철령하오림동농회회장에게맡기였다. 그는그번의리별이딸과의마지막리별이될줄은꿈에도생각못했다.

  1946년 4월 6일, 목단강군구 3지대경위퇀왕경곤퇀장이 3개영 1700여명전사들을거느리고밀산현평양진(현 계동현)에진주했다.4월 15일, 토비곽청전은 500여명토비들을거느리고경위퇀부대의소재지밀산현영안역을들이쳤는데전투는매우치렬했다. 경위퇀증원부대가전투에투입해서야토비들을물리칠수있었다. 그번전투에서토비 30여명을격살하고 20여명을체포하였으며보총 58자루를로획했다.

  4월 16일, 경위퇀은밀산현반절하형가네울안에서토비기소무, 리명발부대와접전했다. 경위퇀은유리한지형을리용하여공격을들이댔으며토비 30여명을격살했다. 4월 17일, 경위퇀은승리의기세로추격하여반절하남쪽에서기소무, 리명발의토비 300여명을소멸했다.

  4월 25일, 박춘근은경위퇀 2000여명을따라동안시(현밀산시소재지)에진주했다. 경위퇀은인츰동안행정사무를인수하고혁명정권건립과징병사업을전개하였다. 당시동안지구는정치형세가매우복잡했다. 우리당의기층조직이아직건립되지않았을뿐만아니라국민당동안지구당부는기회를타특무, 토비및일제시기괴뢰잔여세력등과결탁하여각종반동무장을조직하였으며사회질서를교란시키고민족모순을일으키면서인민의승리과실을빼앗으려시도했다. 무정부상태에서일부사람들은누구를위해군대에가야하고누구를위해싸워야하는지를몰랐기에징병사업은매우어려웠다.

  경위퇀은능력이있고풍부한사업경험이있는간부를파견하여사업국면을개척키로했다. 징병사업의중임은박춘근과그의전우들의어깨에놓여졌다. 박춘근은두조수를거느리고먼저동안시와 40여리떨어진영창조선족마을로갔다. 툰장을만나뜻을밝힌후박춘근은내심하게징병사업의의의를선전했으며끝내툰장을설복시켰다. 이튿날툰장은적령청년들을모여놓고동원대회를소집하였다. 대회에서박춘근은자신의고난했던생활과다년간군인생애의경력으로청년들을계발하였으며그들로하여금비교적전면적으로공산당이령도하는민주련군의성질을알게하였고‘승리에는누구나몫이있고참군에는누구나책임이있다’는도리를알게하였다. 하여 50여호밖에안되는영창촌에서 16명청년들이용약민주련군에가입하였다.

  영창촌을떠난후박춘근은선후하여서안, 대성, 련성, 영안등 10여개의조선족이비교적집중된마을로갔다. 그는소박한도리로조선족군중들의참군열정을격발시켰다. 많은곳에서는아들, 형제, 부자간이함께참군하는감동스러운이야기가나타났다.

  1946년 5월 10일, 동안지구에둥지틀고있던국민당토비두목사문동은재기할시기가되였다고생각한나머지밀산평양진유지회울안에서동안지구토비두목회의를열고동안지구공성련합지휘부를성립했다. 사문동이총지휘를맡고계서를공략하기로했고곽청전이부총지휘를맡고동안시를공략하기로했다. 동시에국민당중앙군동안지구보안중대보청분대장유전청더러부대를이끌고밀산흥개로진주하여동안시에대해포위태세를취하게함으로써동안시에주둔해있는목단강군구3지대경위퇀과계서에주둔해있는목단강군구 3지대사령부지간의련계를끊어버리려하였다.

  5월 15일새벽, 토비로준당, 기소무, 조본초, 유전창부대는곽청전의지휘하에동안시에대한공격을시작했다. 토비공성련합지휘부는동안시서쪽교외련주산주봉에있었다. 토비공성부대는 7문의박격포, 대량의수류탄, 몇십대차량으로구성된운수대대, 기병중대, 편의대, 정찰중대를가지고있었다. 주공임무를맡은토비들은모두원국민당의진남중조산작전에서일본군에의해포로되였던군관과병사들이였으며일부두목들은국민당군관학교졸업생들이였기에실전능력이비교적강했다. 작전에투입된토비대오의인수는 1700여명에달했다.

  토비들의 진공에유효하게대처하기위해우리군은경위퇀, 호림독립퇀, 동안공안대대로구성된련합작전지휘부를세우고 2000여명의병력을투입했다. 련합작전지휘부는북대영과원일본신사지간에있는한낡은집에설치했으며경위퇀퇀장왕경곤이작전총지휘를맡았다.

  대량의토비들이동안시서남, 서쪽, 서북으로부터포화의엄호하에벌떼마냥덮쳐들었다. 비록우리군이맹렬히저격했지만극악무도한토비들은빈번히우리군진지에대해진공을발동했다. 몇차의접전을거쳐정면진공을들이대던토비들은엄중한상망을냈다. 우리군은화력을집중하여련주산주봉을포격하였으며토비지휘부를점령하였다. 편의대토비들은한무리의결사대였는데북대영지형에익숙했다. 토비들은우리군의련합작전지휘부부근에까지기여들어와경위련과조우했다. 경위련의강대한화력앞에서편의대토비들은도망칠사이도없이분분히쓰러졌다.

  동안보위전결속후경위퇀은동안을보위하고적극방어하기위하여흥개에있는유전창토비부대를진공하기로결정했다.5월 18일, 날이밝기시작하자경위퇀은흥개동쪽과남쪽에서유전창토비부대를공격했다. 하늘을치솟는포화속에서 30여명의경황실색한토비들이북쪽건축물로도망쳤다. 박춘근은 7련전사들을거느리고한시간동안의격전을거쳐저항하는토비들을소멸해버렸다.

  길북에도사리고있던토비들은형세가좋지못한것을간파하고길북으로도망쳤다. 점심무렵보밀교이남에매복해있던경위퇀 1영은북쪽으로도망쳐오고있는토비들을발견했다. 토비대오는산만하고랑패상을보였는데 100여명토비들이점점 1영포위권안으로들어섰다. 두발의신호총소리와더불어북산어구에서진공을들이댔다. 이어입구처에서두정의기관총이불을토했다. 앞에섰던몇몇토비가꼬꾸라지자뒤따르던토비들은공로동쪽의나무숲으로도망쳤다. 매복전은 20여분만에결속되였다. 그번전투에서도합 18명토비를격살하고 150여명을포로하였으며 170여자루권총, 한정의경기관총을로획하였다.

  흥개토비숙청전투가결속된후경위퇀은곽청전토비부대를청산하기로결정했다. 경위퇀두개영의병력은 19일새벽전으로예정지점에진입하여동시에진공을발동했다. 조양툰전역에서한시간도안되여토비 90명을포로하였고경기관총 1정을로획했다. 왕가소곽전투에서는토비 50여명을포로했다.하지만흑태북산의비밀공사를공격할때토비들의완강한저항을받았다. 1영영장조계련은지휘중불행히적탄에맞아쓰러졌다. 3영 7련련장박춘근은비분에넘쳐 “독신은엎뎌있고기혼자는나를따르라!”고소리치면서수류탄두개를지니고포복전진해적들의보루에접근했다. 보루안의토비들은미친듯이사격을퍼부었다. 박춘근은자신의안위를돌볼새없이수류탄한개를보루에던졌다. 수류탄은적들의보루앞에서터졌다. 이어또하나의수류탄을던졌는데면바로보루안에떨어져폭발했다. 보루안은쥐죽은듯잠잠했다. 박춘근이일어나서포연이자욱한보루로돌진할때 총탄이날아와그의머리를뚫고지나갔다.

  지휘소에서박춘근이장렬히희생되는장면을친히목격했던경위퇀퇀장왕경곤은비통을금할수없었다. 그는즉시화포를조직하여보루에맹렬한포격을 가했다.겁에질린보루안의적들은두손들고투항했다.



  비적두목곽청전은교활했는바흑태에둥지를틀고앉아꼼짝하지않았다. 경위퇀은할수없이철수하여동안성으로돌아왔으며조계련과박춘근의유체를동안시기차역부근의공동묘지에매장했다.

  1946년 5월 24일, 경위퇀은계서에 있는 3지대사령부의명령을받고동안성에서철거해계서로돌아갔다. 경위퇀이밀산을떠난이튿날, 토비두목곽청전은동안성이잠시비게된기회를리용해로준당, 양세범, 기소무등의부대를긁어모아동안성을들이쳤다.5월26일,소름끼치는‘5.26참안’을조작해 60여명조선족군중들을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많은조선족군중들이토비숙청투쟁에서경위퇀에정보와량식을제공해주었다는구실로곽청정비도들의참살을당했던것이다.이는또한박춘근등조선족을주력으로하는토비숙청부대에대한보복이기도하였다.

  수많은조선족백성들을살해하고도성차지않은곽청전토비무리들은기차역부근의공동묘지에쓸어들어조계련과박춘근의모를파헤치고시체를꺼낸후각을뜯고머리를잘라군중들에게효시했다. 놈들은 “국군은이미사평과장춘에까지왔으며인츰할빈과목단강지구로들어올것이다. 공산당은번신할생각도말라”고기고만장해했다. 사건발생후군중들은눈물을머금고자발적으로일어나두렬사의유해를다시매장했다.

  곽청전부대를 소멸하기 위해 6월 21일, 합강군구 부사령원 겸 359려 려장 류전운은 목단강군구 경위퇀, 호림 독립퇀, 동안시 공안대대, 계녕현대대 등 무장부대를 통일지휘하여 각각 밀산 영안과 반절하에서 출발해 남쪽 중쏘변경선으로부터 북쪽 완달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지대에서 총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359려 717퇀, 719퇀, 기병퇀은 흑태, 동팔방고수촌과 련주산 주봉에서 토비들과 접전했다. 우리 군의 맹렬한 포화공격하에 곽청전부대는 철저히 소멸되였고 곽청전 본인은 장춘으로 도망쳤다. 6월 22일, 우리 군의 북선과 남선부대는 다시 동안성으로 들어왔다.

  새중국성립후, 밀산민정부문에서는몇차례사람들을파견하여박춘근의친인과딸의행방을수소문했으나모두결과가없었다.

  시간의흐름과더불어당년 7세밖에안되였던영자도성인이되고가정을이루었으며평온한생활을누리게되였다. 하지만종래로아버지를찾으려는생각을멈춘적없었으며중년에이르러서는아버지를찾으려는욕망이더욱강렬해졌다. 박영자는여려차례유관부문을찾아아버지의행적을탐문했지만권위적인답복을얻지못했다. 부친을찾아나선기나긴려정에서그는얼마나많은고생을했고얼마나많은눈물을흘렸는지모른다.

  1998년10월,밀산시에서 아버지의 렬사비를 새로 세웠다는 소식을 접한 영자는 한달음에 달려와 아버지의 비석앞에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이딸은 52년이나애타게아버지를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자신의피와생명으로불멸의업적을쌓아올렸으며이딸에게삶의본보기를보여주었습니다”.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78%
10대 0%
20대 5%
30대 44%
40대 23%
50대 2%
60대 2%
70대 1%
여성 22%
10대 0%
20대 4%
30대 11%
40대 6%
50대 1%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배우 이영하가 선우은숙과 이혼 후 1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단 한번도 '재혼'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3일 방송된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4인용 식탁'에서는 배우 이영하가 출연했다. 그는 이날 방송을 통해 배우 이필모와 최대철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피부, 다이어트 비결?" 고현정, 돼지고기 끊고 물세안 비법 공개

"피부, 다이어트 비결?" 고현정, 돼지고기 끊고 물세안 비법 공개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화제를 모았던 배우 '고현정'이 자신의 일상을 소개한 '브이로그'를 공개했다. 지난 14일 고현정의 유튜브 채널 '고현정'에서는 '고현정 브이로그 1' 영상이 새롭게 업로드됐다. 해당 영상에서 고현정은 한 브랜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

"어깨에 18cm 문신" 율희, 거침없는 타투 셀카 공개 '여유로운 일상'

"어깨에 18cm 문신" 율희, 거침없는 타투 셀카 공개 '여유로운 일상'

사진=나남뉴스 그룹 라붐 출신 율희가 이혼 후 여유로운 일상 사진을 공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율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다람쥐 이모티콘과 함께 성시경 콘서트를 찾는 등 일상 사진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 속 율희는 끈나시 형태의 의상을 입고 캐주

2024년 연변주 및 연길시 재해방지감소 선전활동 가동

2024년 연변주 및 연길시 재해방지감소 선전활동 가동

5월 11일, 2024년 연변주 및 연길시 ‘전국 재해방지감소의 날’선전주간 가동식이 연길시 종합재해감소주제유원에서 있었다. 올해 5월 12일은 우리 나라의 제16번째 전국 재해방지감소의 날이며 5월 11일부터 17일까지는 재해방지감소 선전주간이다. 올해의 주제는 ‘모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