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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27]장세걸은 뛰여난 군사지휘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9.26일 14:20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27)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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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14군기념관내 장세걸 출현은 장세걸 사진과 략력 소개뿐이 아니다. 2개 사로 구성된 홍14군에서 장세걸의 활동과 역할이 상당했으므로 그에 따르는 군사활동면에서 장세걸이 계속 출현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렷다. 아니나 다를가 잇달은 “개편후 홍14군 주력부대 서렬”표(1930.5-1930.9)에 장세걸은 군장 리초시와 군사특파원, 정치부 주임에 이어 1사 사장 겸 2퇀 퇀장으로 밝혀져있었다. 뿐아니라 제6전시청-홍14군 주요전투 소개와 제7전시청에서 장세걸은 빈번히 나타나고있었다.

기념관 제6, 제7 전시청에 나오는 전투들중 적들의 이른바 “팔로위초”(八路围剿)-대규모 련합토벌을 격파한 전투를 관련자료 연구에 따라 먼저 상세히 보기로 한다.

장세걸 등으로 홍14군의 지도력량이 강화된후 강소땅에서의 홍14군의 조직과 발전, 눈부신 활동은 적들의 두통거리가 되였다. 태흥현의 황교(黄桥)에 주둔한 국민당군 “공산당토벌”(剿共) 리장강(李长江)과 강소성 보안대 대장 양위(杨蔚) 등은 홍14군 제1사의 적극적인 진출에 당황한 나머지 장세걸이 지휘하는 제1사에 대한 대규모의 련합토벌을 획책하였다.

강서 여고의 홍14군기념관 바깥입구에 일어선 “홍14군공원” 대형간판 /2012년 1월 31일 현지촬영

1930년 6월 14일, 양위가 직접 지휘하는 적 “여덟갈래 토벌”군은 홍14군 제1사가 활동하는 륙갑(六甲), 과가보(戈家堡),장장(张庄), 대소 진가보(陈家堡)에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었다. 이에 앞서 조선인 장세걸사장이 친솔하는 홍14군 제1사 제2퇀의 4영과 5영, 6영 3개 영 600여명 홍군대오는 장장(张庄)일대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적들의 이른바 여덟갈래 토벌군 정보를 입수한 장세걸사장은 즉각 륙갑교(六甲桥), 룡유하(龙游河) 서쪽에 매복하여 적들의 선두부대를 답새김으로써 적들의 공산군토벌 계획을 짓부시기로 작전하였다.

장세걸사장의 작전계획에 따라 제1사 제2퇀의 4영은 륙갑교 서남의 유가항(尤家行)에 매복하고 5영은 륙갑교 강 서쪽 남횡구(南横沟)에 매복하고 6영은 륙갑교 서북의 과가보와 보경사(宝庆寺) 일대에 매복하여 적들을 정면으로 답새기기로 하였다. 진도(镇涛)유격대 30여명은 과가보 북쪽에 매복해있다가 적들이 북쪽으로 달아나는것을 견제하게 되였다. 지방무장단총대는 륙갑하 동쪽의 구갑(九甲)과 석교두(石桥头) 등지에 매복하여 석장, 로호장, 황교, 횡가항(横家巷) 등지 적들을 감시하기로 하였다.

6월 14일 이른새벽, 천지를 덮은 짙은 안개가 대지를 지지눌렀다. 적 토벌 선견대로 나선 서래암 주둔 성보안대의 한개 중대 150여명은 살기등등하게 륙갑교두에 당도하였지만 질식할듯한 안개로 하여 사위를 분간할수 없은데서 서뿔리 행동하지 못하고 나팔련락(吹号联络)을 해댔다. 마침 륙갑교 서북의 과가보에 매복한 6영 영장 두준생(杜俊生)이 계가시에 주둔한 성보안대에 근무하다가 의거한 홍군장병인데서 국민당군의 나팔련락소리를 알고있었다. 두준생의 명령에 따라 홍군나팔수가 계속 전진하라는 나팔신호를 불어대자 적들은 저들 편이라고 여기고 만시름을 놓았다. 결과는 홍군의 궤계에 들어 20여명만 남겨 륙갑교 동으로부터 북으로 수색케 하고 나머지 전부를 류갑교를 지나 과가보로 나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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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꼭두각시처럼 완전히 장세걸사장의 작전계획대로 움직였다. 미련한 적들이 제1사 제2퇀의 매복권내에 들어서자 제2퇀 3개 영의 홍군장병들은 장세걸사장의 사격령에 따라 일제히 적진에 불벼락을 안겼다. 몽몽한 안개속에서 적들은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고 도처에서 얻어맞기만 하였다. 세시간의 격전끝에 제1사 제2퇀 부대는 적 100여명을 살상하고 물에서 건진 총까지 70여자루의 총과 탄알 1000여발을 로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서래암 주둔 성보안대의 한개 중대가 전멸되였다는 소식은 적 여덟갈래 토벌군을 혼비백산케 하였다. 동연장(东燕庄)에 이른 로항, 로장, 황교, 계가시 등 5로 토벌군은 당황한 나머지 홍14군 제1사의 허실을 헤아리지도 못한채 급기야 방향을 돌려 내꼴 봐라고 본 주둔지로 달아났다. 로호장, 석장의 적들은 가까스로 신가태(申家埭)에 이르렀으나 한바탕 눈먼총질을 하고는 역시 달아나고말았다.

적 토벌괴수들인 리장강, 양위가 기고만장하게 잔뜩 떠들어댄 “여덟갈래 토벌”은 이렇게 홍14군 제1사 제2퇀과 접전다운 접전도 못해보고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강소 여고의 중국로농홍군 제13군 연구회에서 펴낸 《홍14군 영렬》과 14군 관련 연구자료들은 한결같이 장세걸사장이 친히 작전하고 지휘한 이 매복전을 “홍14군이 평원지대에서, 전체적으로 렬세한 조건하에서 전술을 구사하여 전체적인 렬세를 국부우세로 전환하여 승리한 범례”라고 높이 평가하고있다.

무려 중문으로 593페지를 이룬 《홍14군영렬》(红十四军英烈,해방군출판사, 2011년 5월 출판)중 “중국로농홍군 제14군 종술”에 따르면 강소땅에서의 홍14군의 승리는 영국 《타임스보》(泰晤士报) 기자를 불러왔다. 《타임스보》 기자가 강소 여고 현지를 취재한 기사가 귀보에 실렸는데 여고 30일 발로 되는 기사에는 이런 단락이 적혀있다.

중국로농홍군 제14군 개편후 조직서렬표에 장세걸이 1사 사장으로 나타난다 /2012년 1월 31일 현지촬영

여고홍군은 근래 발전이 빨라 현재 약 2000여명에 이르고있다. 이곳의 부호들은 많이는 상해 각지로 도망치고 본지에 남은 부호들은 모두 총을 사고 포루를 쌓았다.(红军如皋,近来发展很快,现在约有两千人。此地富户多逃到上海各地去;留在本地的,都买枪,砌炮楼。)

영국 기자가 쓴 이 한편의 기사는 강소땅 여고에서의 홍14군의 발전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있다. 홍군의 발전모습에 얼마나 겁을 먹었으면 많은 부호들이 분분히 상해 등지로 달아나고 남은자들은 분분히 총을 사들이고 포대를 쌓게 되였을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홍14군 제1사 사장인 조선인 장세걸의 헌신적투쟁도 깃들어있어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6월 14일에 앞선 6월 11일 일도 그러하다.

1930년 6월 11일, 중공통해특위 관련지시에 따라 홍14군 제1사 사장 장세걸과 중공여고현위는 석장(石庄)에 주둔한 여고현 경찰대대가 홍군유격구내 일부분 혁명동지들을 체포한 사건에 분개하여 석장을 진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고현 경찰대대 진공전은 뜻대로 풀렸다. 제1사 부대는 석장을 들이쳐 적들에게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고 만여명의 군중을 불러일으켜 석장 민씨 대지주의 식량과 의복 등을 나누었다.

조선인 장세걸의 위인됨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실례이다. 말그대로 1930년 이해 6월은 홍14군 제1사로 말해 하나 또 하나의 전과로 넘쳐나는 휘황한 승리의 6월이였다. 장세걸사장은 6월 11일, 6월 14일에 이어 6월 25일에도 소속 부대를 이끌어 그 전과를 높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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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전시청에 현지사진과 글로 소개된 형타-황가장전투(迥垛ㅡ黄柯庄战斗)도 그러하다.

강소 해안현 형타(오늘의 남통시 해안현 경내)에는 대악패로 불리우는 려우신(闾宇臣)의 보루가 있었다. 네 면이 전호로 둘러싸인 이 보루안에 현경찰대대 1개 중대와 장타구(蒋垛区) 구장 겸 보안단장인 려동(闾栋)의 보안단이 도사리여 그 기염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일찍 1929년 겨울과 1930년 봄에 지방홍군유격대와 농민적위대가 수차 공격을 들이댄데서 그 수비는 보다 삼엄해졌다. 형타에서 동으로 6-7리 떨어진 황가장(黄柯庄)에는 또 대악패 손명보(孙明甫)의 보루가 있었다. 보루안에는 현보안대대 숭석항(崇锡恒)의 한개 중대와 손명보의 보안단이 틀고앉아 유사시에는 형타와 황가장이 서로 지원해나섰다.

이자들이 행패를 부리도록 그대로 내버려둘수가 없었다. 6월 23일,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 장세걸은 제2퇀의 4, 5, 6 세개 영을 거느리고 영계(营溪)로 가서 지휘부를 사자타(狮子垛)의 허봉은(许凤银) 댁에 설치하였다. 전투를 앞두고 지휘부에서는 부대 영 이상 홍군간부와 지방의 현, 구 책임자들이 참가한 군사회의를 가지고 작전을 짜고들었다. 군사회의는 아군의 주요병력을 형타공격전에 두기로 하고 중공통해특위 위원 왕옥문(王玉文)과 제1사 사장 장세걸을 전투 총지휘로 추대하였다. 작전계획에 따라 제1사 제2퇀 4영과 5영은 형타진공전에 나서고 6영은 황가장에서 달려들 적 견제에 나섰다. 지방적위대는 홍군부대의 작전에 배합하기로 하였다.

홍14군기념관내 장세걸이 지휘한 1930년 6월 23일 형타-황가장전투 소개도 /2012년 1월 31일 현지촬영

6월 25일 오후, 제1사 제2퇀 홍군부대와 지방적위대, 농민협회 회원들은 비를 무릅쓰고 남북 두갈래로 나뉘여 형타로 조여들었다. 남로는 4영 영장 장애평이 이끌고 영계를 떠나 나아가고 북로는 장세걸사장이 5영을 거느리고 사가만쪽을 출발하여 나아갔다. 6영은 작전계획대로 황가장쪽 견제에 신경을 썼다.

전투지점에 이르자 홍군 주력부대와 지방무장은 장세걸사장의 사격총소리와 함께 적진을 들부셨다. 전투에 나선 적위대원들과 농민협회 회원들은 일제히 “려굴을 뒤엎자”(翻驴-闾-窝), “개들을 족치자”(打狗队). “백구를 사로잡자”(捉白狗) 등 구호를 높이 웨쳐댔다. 총소리, 구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드는 속에 장세걸사장이 지휘하는 북로군은 적위대의 배합하에 단번에 적들의 수비를 요정내면서 려칠방(闾七房)으로 돌진하여 부분 총과 탄알을 빼앗고 불을 질러 적들을 보루안의 절(庙)에로 몰아넣었다. 장애평이 지휘하는 남로군은 적위대의 토포로 적병영인 형타묘를 포격하면서 형타묘로 돌진하여 적들과 백병전을 벌리며 크나큰 살상을 주었다.

치렬한 전투는 세시간이나 지속되였다. 적들이 상망이 엄중하여 포위돌파를 시도할 때 대장(大庄), 조가태(曹家埭), 곡당(曲塘) 등지의 적들이 증원을 왔다. 원군의 총소리를 듣고 숨을 돌린 보루의 적들은 유리한 지형에 의지하여 반격을 개시하였다. 전투중에 장애평영장이 팔에 부상을 입고 부영장 조빈(曹斌), 5영 영장 하양(何扬)도 부상을 입었다. 적 지원병도 몰려들고 날씨가 어두운데 비까지 갈수록 대살같이 내려 말이 아니다. 불필요한 손실을 피면하고저 장세걸사장은 제때에 과단하게 전 부대에 철거령을 내렸다. 황가장쪽을 지켜선 6영도 매복지에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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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전투들은 홍14군 제1사 사장으로서의 장세걸이 강소땅 여고 등지에서 벌린 주요전투와 활동들이지만 이런 전투들을 렬거하자면 많고도 많다. 했으나 1930년 6월 이후 그 시절 당내에서 자라고있던 “좌”경모험주의사상은 엄중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좌”경로선이 지도하는 중공중앙은 이해 6월에 “새로운 혁명고조와 한개 성 혹은 몇개 성의 우선 승리”라는 극히 모험적인 “좌”적 결의를 내려 전국적인 총폭동을 발동하라고 지시하더니 홍14군에 대해서는 “남통을 진공하고 장강을 넘어 상해와 남경을 진공하라!”는 오유적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적들은 “공산당토벌”에 광분하면서 강소 주둔 국민당부대와 성경찰대 그리고 각지의 지방무장보위퇀을 대거 움직여 홍14군을 대대적으로 진공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적들은 각종 수단으로 홍군내부에 간첩을 들이밀어 홍군부대는 엄중한 좌절을 당했다. 홍군과 지방당조직의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적들에게 피살되였다.

1930년 9월초 이후 정세는 보다 악화되였다. 1930년 3월부터 9월 사이 장세걸의 제1사를 망라한 홍14군은 대소 근 100차의 전투를 벌리며 강소 소북이란 이 국민당통치구에서 적들의 반동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으며 광범한 민중들에게 해방의 서광을 안겨주었지만 10월에 이르러 패배의 액운을 면치 못했다. 1930년 10월초를 전후로 상해의 중공중앙 군위와 강소 총행동위원회는 강소땅에서 고립적으로 고전하는 홍14군의 활동을 잠시 멈추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좇아 강소 총행동위원회에서는 비밀리에 전문 배를 내여 여고와 태흥으로부터 장세걸 등 홍14군의 주요 지도자들을 급히 상해로 전이시켰다.

1931년초 이후 강소땅을 주름잡던 홍14군 제1사 사장 장세걸은 중앙군위와 주은래의 직접적인 파견으로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갔고 홍 제1방면군 제22군 참모장 중책을 짊어졌다. 여기까지는 강소 여고의 “중국로농홍군 제14군 기념관”의 여러 소개들과 홍14군기념관에서 구입한 《홍14군영렬》과 《여고문사(如皋文史)》 제22집에 잘 나타나 크나큰 위안과 고무를 받게 된다.

드디여 중문 바이두(百度)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수집 자료들을 제14군기념관을 비롯한 강소 여고의 연구성과들에서 모두 얻어냈다. 인터넷 수집 자료들을 훨씬 뛰여넘는 상상외 성과들이였다. 홍14군기념관을 돌아본후 뻐스로 여고를 떠나 남통으로 돌아왔고 남통에서 하루밤 류숙하고 이튿날 2월 1일에 상해를 거쳐 절강 소흥으로 돌아왔다. 강소 여고행은 겨레 장세걸 연구 관련 풍성한 성과를 거둔 현지탐방길이였다.

홍14군기념관내 1층 중앙홀에 장세걸을 포함한 홍14군 17명 장령 립체군상이 빛난다 /2012년 1월 31일 현지촬영

2016년 8월 15일 정리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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