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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9]우리 글 가르치는 교원이 되기까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7.03.02일 08:02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9)

◇박영옥(안도)

동녘하늘이 환히 밝아온다. 창가에 푸르른 희망이 걸려있다. 나는 일어나 밖에 나가 심호흡 몇번 하고 들어와서는 책상앞에 마주앉는다. 오늘 학생들에게 가르칠 조선어 교수안을 준비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하루의 시작이다.

조선어 교원-이름만 들어도 가슴 뜨겁고 벅차다. 내가 어느새 조선어 교원으로 되다니! 때론 꿈만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조선어 교원으로 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남모르는 많은 노력과 무수한 땀방울이 스며있다.

난 원래 량식창고의 직원이였다. 날마다 량식을 주무르며 일해왔다. 그러다가 직원감소 정책으로 1993년도에 단위에서 나오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리혼까지 하여 나라에서 주는 최저생활보장금으로 살고있었는데 참 어려웠다. 하여 별의별 일을 다 했다. 삯바느질, 한국어자료교정, 영업원…

그러던 2002년도의 어느날 한 아동문학회 회원이였던 김동철씨가 찾아와서 “조선어반”에서 교원을 모집하는데 할 의향이 없느냐는것이였다.

“조선어반”에 찾아갔더니 단층집 교실에 학생은 아홉명뿐이고 월급은 따로 없이 학생 하나를 가르치면 2원이였다. 그마저 두 선생이 절반씩 맡아하면 수입이 너무도 보잘것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책임자는 학생이 불어날수도 있으니 해보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실습기한이 사흘이니 온김에 하라면서 학생을 하나 나한테 맡기는것이였다. 이런 반에서는 학교처럼 흑판앞에서 한번 강의하는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가르치는것이여서 학생 열이면 열번, 스물이면 스무번 반복해야 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한족학생에게 낮은 소리로 자모를 따라 읽혔다. 나를 자주 주시하는 책임자의 눈길속에서 나는 최대한으로 잘 표현했다. 이튿날 출근했더니 통과되여 정식출근을 하라는것이였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서 오전과 저녁 반을 맡고 하루에 두번씩 자전거로 오가며 학생을 가르쳤다. 학생이 좀 늘어 한달로임이 200원 남짓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보잘것 없는 돈이겠지만 최저생활보장금 67원을 받는 나한테는 괜찮은 수입이라고 스스로 만족하였다.

그 다음달에는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학생수가 줄어들었다. 한달간 찬 바람을 맞받으며 하루에 두번씩 다녔지만 120원뿐이였다. 그래도 책임자가 수고 많았다면서 30원 더 보태주어서 150원을 탔다. 책임자의 그 마음에 고맙긴 했지만 나는 사직하고말았다. 난로를 때는 찬 교실에서 나의 변변찮은 다리가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이 두달동안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나한테는 하나의 욕망이 쭈뼛이 일어섰다.

(내가 이후에 할 일은 오직 타민족한테 우리 글을 가르치는거야!)

이듬해인 2003년도 봄부터 나는 집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기로 하고 학생을 모집했다. 돈 팔고 광고까지 했지만 집이 시교쪽인지라 학생 셋뿐이였다. 그래도 좋았다. 돈보다 할일이 있다는게 즐거웠고 또 우리 글을 가르친다는 자호감으로 가슴이 울렁이기만 했다.

그 이듬해 내가 살던 집이 파가이주로 나는 이사를 해야 했다.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나는 일부러 집을 시내쪽에 선택했다. 큰 집은 살수 없어 30평방 되는 단층집을 샀다. 그때 안도에는 벌써 조선어반이 여섯개가 있었다. 역시 경쟁이였다. 모두들 책상 걸상을 놓았고 흑판도 있어서 정말 학교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니 내가 온돌에서 하니 어떤 학생은 장소를 보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별수 없는 일이였다.

어느날 나는 신문광고에서 소학교 4학년 한족학생이 조선어 교원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게 되였다. 전화를 하고 대면했다.

애 어머니는 애가 어릴 때 조선족보모가 본데서 조선말을 잘했지만 지금은 한족반에 다니면서 한마디도 안한다는것이였다. 이제 조선말을 다 잊을가봐 매일 하학후 애와 조선말로 대화할 선생을 찾는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절룩대는 나의 다리를 보고 “우리 집은 6층인데 매일 오르내릴수 있을가요?” 하는것이였다.

집이 6층이라 높긴 했다. 다행히 층계란간이 나한테 지팽이 작용을 해주었다. 매번 층계를 오르내릴 때면 저도몰래 앉은뱅이였던 나를 이정도로 치료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끼군 했다.

한달에 이백원을 받고 나는 주말외에는 매일 저녁녘이면 그 학생 집으로 다녔다. 친구들이 수지가 안 맞다고 야단이였다. 그러나 나는 왜서인지 그 일이 싫지 않았다. 우리 글을 가르친다는 그 점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것이다. 나는 대화를 위주로 하면서 글도 가르쳤다. 열흘이 되자 학부모가 기뻐했다.

“조선말을 하라면 절대 안하던 애가 지금은 물건을 가리키며 조선말로 번역하라면 제꺽 한답니다. 이게 바로 큰 수확이지요.”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나에 대한 긍정이였고 신임이였다. 나는 쉬는 날에는 애를 데리고 광장에 가서 광장의 많은 꽃들, 나무들, 풀이름들을 조선말로 배워주었다. 그 애도 점차 나한테 정이 들어 조선말로 이것저것 자꾸 물어오는것이였다.

2006년 가을 나는 또 이사하게 되였다. 아빠트에 살고싶은데다 남편의 출근 편리를 위해 시교로 이사했다.

그해 겨울 나는 쉬게 되였다. 그런데 자꾸 뭘 잃은것 같아 좀처럼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나는 몇번이나 수많은 학생들을 앉혀놓고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꿈을 꾸었다.

“퇴직비도 있는데 왜 자꾸 헤매려 하오? 든든한 사람이면 몰라도 참! 남들이 나를 장애인 안해 신세로 산다고 하지 않겠소?” 남편이 늘 이렇게 원망했다.

그해 겨울은 이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보냈다.

이듬해 봄 만물이 소생하면서 나의 마음도 살아나기 시작했고 꿈도 푸르러갔다.

나는 우리 집의 10여평방 되는 객실에다 책상걸상들을 갖추어놓고 흑판도 세워놓았더니 제법 학교 같았다. 비록 집이 멀었지만 그래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있어서 학생들이 왔다. 나는 학생이 하나 오면 하나 배워주고 둘이 오면 둘 배워주고… 아무튼 우리 글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평소에는 학생 서넛이였는데 해마다 방학이면 그래도 우르르 찾아왔다. 지난해 여름에도 23명이나 찾아와서 나는 온 하루 밖에 나갈 새도 없었다. 그속에는 조선족애들이 적지 않았다. 그 애들은 한족반에만 다니다보니 조선족 례의도 모르고 전통도 모르는것이였다. 조선말은 죽어라고 하기 싫어했고 글도 배우기 싫어하는것이였다. 혹시 내가 뭘 물으면 “네” 하고 대답하는게 아니라 “응”이였고 반말도 많았다. 그래서 공부가 끝난후면 조선글을 알아야 하는 중요성과 의의를 차근히 알려주었고 우리 글의 아름다움과 우리 말의 례절도 따로 가르쳤다.

그랬더니 인차 효과가 알렸다 그 애들의 부모가 전화로 아이가 많이 례절스러워졌다고 하면서 여간 좋아하지 않는것이였다.

매번 한족애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우리 말로 “선생님, 오늘 수고많으셨어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말할 때면 가슴이 왜 그리도 벅찬지?

나는 단지 글을 가르치는데만 신경을 쓴것이 아니라 우리 민요도 가르쳤다. 구수하고 시원스런 우리 민요 “도라지”, “노들강변” 등 노래를 가르쳤고 또 현대 한국 노래도 많이 가르쳐주었다. 이미 한국노래에 도취된 어떤 애들은 일부러 한국노래책까지 사가지고 나를 찾아와서는 배워달라고 했다. 나는 아는 노래가 많지 않은지라 먼저 노래교실에 가서 배워온후 다시 가르쳤다.

여직껏 나는 꿀벌처럼 열심히 일해왔다. 글을 가르치면서 때론 베풀기도 했고 짬짬이 문학창작도 했는데 수차 수상했고 2005년 우화 “비뚠 나무의 고운 꿈”이 의무교육조선족소학교교과서 조선어문 자습독본 5학년 상권에 실리기도 했다.

땀 흘리는 사람한테는 그만큼 기쁨의 수확이 차례지는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고 안도현정부에서는 2012년 나에게 안도현도덕모범이란 영예를 주었다.

“ㄱ ㄴ ㄷ ㄹ …” 오늘도 우리 집에서는 우리 글을 읽는 소리가 랑랑히 울려퍼지고있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우리 글을 가르치면서 또 래일에 찾아올 학생들을 기다려본다.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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