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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의 행복

[기타] | 발행시간: 2017.03.16일 04:01
대전 역전시장

23년째 1000원짜리 국밥집 "서로 돕고 사는 게 세상사"

시장 상인들은 시래기 공짜 제공… 손님들은 비운 그릇 설거지통에

1000원짜리 짜장면·백반

"주머니 가벼운 사람에게도 따뜻한 한 그릇"

저렴함에 끌렸다가 마음까지 채우고 간다

지난 12일 찾은 대전 역전시장 내에서 1000원짜리 선짓국을 파는 ‘원조 선지국’ 주인 이정수씨가 국자로 국을 퍼올리고 있다. ‘원조선지국’에서 파는 선지국밥과 낙원동 우거짓국(2000원). 경기 군포의 중국집 ‘후하빈’에서 파는 1000원짜리 짜장면.(왼쪽부터) / 이경호·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정유진 기자

1000원으로 뭘 할 수 있나.

서울 지하철 기본요금이 1250원이고, 붕어아이스크림 하나에 1300원, '○○천국' 김밥 한 줄이 1500원이다.

편의점에서조차 삼각김밥이 1000원을 호가하니, 600원쯤 하는 500㎖짜리 생수 한 병 집어들 수 있을 따름.

오호통재라, 지폐 한 장 쥐고선 목마른 사슴 신세를 면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서러워 말자. 퇴계 이황(1501~1570)께서 말씀하셨느니. "고요히 가다듬어 동요하지 않음이 마음의 근본이다."

치솟는 물가에도 동요치 않고 의연히 '단돈 1000원'을 내걸고 영업 중인 따뜻한 식당이 있다.

지폐를 펴보면 퇴계가 웃고 계신다.

대전역 앞 역전시장엔 독야청청 물가상승률을 무시하는 식당이 하나 있다. '원조 선지국'. 주소는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1-275번지인데, 그냥 역전시장에 들어가 아무나 붙잡고 "1000원짜리 국밥집 어딥니까" 물어보면 알려준다. 2000년대 초부터 각종 TV 프로그램에 소개돼 유명해졌는데, 그로부터 15년 넘게 흘렀으나 가격에 변동이 없다. 메뉴는 선지국밥·선지국수·선짓국·돼지머리국밥·콩국수. 곱빼기는 1500원, 돼지머리국밥과 콩국수는 2000원이다.

홍성순(79), 이정수(78)씨 부부는 1979년 시장 근처에 식당을 차렸다가 1995년부터 23년째 이곳에 터를 잡고 선지를 끓이고, 그릇에 퍼 담으며 사람들의 텅 빈 배를 채워주고 있다. 26㎡(8평) 남짓한 가게는 좁고, 얼룩덜룩하다. 그러나 벽면에 빼곡히 나붙은 각종 매스컴의 소개 사진과 기사가 이 식당의 저력을 웅변한다.


대전 ‘원조 선지국’의 선지국./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소의 피가 익어서 사람의 피를 데운다. 사람들이 가게 양쪽 벽면에 붙은 나무 선반에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을 들이켠다. 충북 증평에 사는 지인을 통해 공수해온다는 국산 고춧가루에 후춧가루를 얹은 선지국밥은 매콤하니 맛이 좋다. 수저질 몇 번에 얼굴이 금세 땀에 젖는다. 식당은 오전 7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에 닫는다. 하루 손님이 1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대부분 나이 지긋한 분들이다. 대전에서 건축일을 하는 조조준(68)씨는 "훌륭한 맛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이 고마워 십수년째 찾고 있다"고 말했다. 소문을 듣고 타지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 식객(食客)뿐 아니라 혼자 소주나 막걸리 한 병을 쭉 들이켠 뒤 조용히 귀가하는 '원조 혼술족'도 다수. 이씨는 "막걸리나 소주만 마시다 가는 분도 있다"며 "국물 안주는 서비스"라고 말했다.

1995년부터 가격은 1000원이었다. 값을 올리려 했는데 IMF가 터졌다. 다들 먹고살기 힘드니 증액을 그만두었다고. 홍씨가 "월세가 40만원, 가스비·수도세 등을 합치면 매달 60만원이 나간다"고 한다. 다만 시장 상인들이 시래기를 공짜로 줘서 재료비를 아낀다. 이씨가 "서로 돕고 돕는 게 세상사"라고 말한다. 손님들이 다 비운 그릇을 손수 설거지통에 갖다 놓으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간다. 서로 돕고 돕는다.


경기 군포 ‘후하빈’의 짜장면./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1000원짜리 짜장면도 있다. 경기 군포 산본동 중국집 '후하빈'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이 동메달을 딴 기념으로 이벤트를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값은 싸도 맛은 저렴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양파가 들어가 있는 짜장면과는 달리 양배추가 들어가는데, 비싼 값에 따로 손질을 해야 하는 양파 대신 비교적 저렴한 데다 손질이 쉬운 양배추를 사용한 것이다. 순도 100% 양파 가루를 넣어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짜장면에 들어가는 고기는 식당에서 직접 갈아낸다. 사장 권기완(38)씨는 "손질되지 않은 고깃덩어리를 사 탕수육에 쓰고, 남은 것은 갈아 소스로 사용해 고기도 비교적 넉넉하게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소문을 타면서 거래처에서도 배달비 등을 최소화해주고 있다고 한다. 인건비를 줄여야 하기에 식사 서비스 외 물과 반찬 등은 '셀프'다. 단무지를 남기면 환경부담금 1000원을 내야 한다.

짜장면 양이 많지는 않다. 여자 혼자 먹기엔 괜찮을 수 있지만, 건장한 사내라면 조금 부족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탕수육. 5000원짜리 탕수육을 시키면 짜장면이 공짜다. 6000원으로 두 명이 넉넉하게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매일 짜장면 40그릇 정도가 팔린다고 하는데, 이곳을 찾은 13일에도 점심·저녁 근처 회사원과 학생들이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을 들고 와 배를 채우고 갔다. 권씨는 "손님 입장에선 1000원 차이가 엄청나지 않으냐"며 "손님들이 부담 없이 식사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이 가격에 판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대인시장 ‘해뜨는 식당’의 백반./광주광역시

그러니 기본적으로 이들을 움직이는 건 온기(溫氣)다. 광주 대인시장에서 1000원 백반집 '해뜨는 식당'을 운영하는 김윤경(43)씨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밥을 짓고 있다. 어머니 김선자씨가 2010년부터 운영하다 암투병 끝에 2015년 세상을 뜨면서 89㎡(27평) 남짓한 식당을 꾸려나가고 있다. 보험설계사 일을 하고 있는 탓에 요즘엔 점심때만 식당 문을 연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70~80명이 찾는다고 한다.

쌀밥 한 그릇에 반찬 셋. 국은 항상 멸치 육수 시래기된장국이다. 반찬은 매일 바뀌는데, 근처 시장 상인들이 콩나물이나 무생채·깻잎 같은 반찬이나 된장 등을 후원해줘 재료비를 아낀다고 한다. 멀리 타지에서 돼지고기나 쌀을 후원해주는 이들도 있다. 김씨는 "주머니 가벼운 분들도 따뜻한 밥 한 그릇 드실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며 "뭐든 웃으면서 하면 좋지 않으냐"고 말했다. 선불이지만 외상도 가능하다고 하니, 감개무량.

[정상혁 기자] [정유진 기자] [편집=뉴스콘텐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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