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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에 뿌리 내린‘상해지식청년’ 엄대신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7.12.21일 19:23
벽지에 ‘둥지를 튼’ ‘상해지식청년’

엄대신 부부의 두 아들네도 각각 자식을 둘씩 두어 10명 대가정을 이루었다. 사진 속에 한 손자가 빠지였다.

40여년전 엄대신은 훈춘현 량수공사 량수촌에서 사진기 가방을 메고 자건거를 타고 때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논두렁으로, 때론 신을 벗어들고 내가를 건느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겠다는 이 마을 저 골안 사람들을 찾아가던 ‘상해청년사진사'였다.

오늘날 그는 자손이 가득한 대가정의 세대주로, 훈춘시 웨딩촬영과 아동사진촬영가에서 한몫을 담당하고 있는 ‘비너스 사진관’, ‘천사락 아동사진관’을 오가며 추억과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명예회장’이다. 두 사진관은 그의 두 아들이 경영하는 사진관이란다.

이들 3부자는 다 훈춘시 정화가의 한 아빠트단지내에 살고 있는데 집문은 각각 달라도 엄대신 부부가 두 아들네 손군들을 돌보아주고 화식도 책임져주다 싶이 하고 있어 세 가정, 3대 사람 10명 식솔이 시끌벅적하며 화목한 대가정을 영위하는 모습이 주변의 부러움과 찬탄을 받고 있다. 그리고 “저 가문은 훈춘에 ‘둥지를 튼’ ‘상해지식청년’가문이라고.” 하는 부언이 빠지지 않고 뒤따른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

“훈춘은, 량수는 엄씨가 나서 자란 상해란 대도시와는 수천만리 떨어진 벽지였는데 당시 어떻게 남을 생각을 했을가요?”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 하잖아요. 훈춘이야말로 나의 두번째 고향이지요.”

상해시 홍구구 해방중학을 졸업하고 1969년 3월 7일 18세 엄대신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량수촌 조선족 제2생산대 집체호의 ‘지식청년 새농민’으로 되였다. 그가 든 집체호에는 상해에서 온 10명 지식청년이 같이 생활했다. 농촌생활, 농사일은 엄대신한테 난생 처음이였다.

생활조건도 간고하고 농사일도 고단했지만 엄대신은 “ 조선족 촌민들이 집체호 청년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질고를 해결해주는 데서 친부모와 같은 따듯한 사랑을 느꼈습니다”하며 집체호 시절의 생활은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한다.

사원 개인집에서 생산대 회의를 하던 1970년 겨울의 그날, 엄대신이 구들에 오르면서 가마목을 지나다가 부주의로 솥두껑을 다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그만 뜨거운 가마물에 왼발을 빠뜨려 심한 화상을 입은 사고를 빚었다.

당시 빈하중농 집체호 호장인 로순천이 즉시로 자기를 공사병원에 업고가 치료를 받게 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면서 로호장의 관심에 감동되여 한달 가량 상처를 아물군 후에는 생산대 로동에나 사회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노력했다고 회상한다. 하여 련속 2년 5호사원으로 표창받았고 1972년에는 량수촌에서 공청단조직에도 가입했다.

사진사로 추대받아

학생시절 때부터 글쓰기와 미술에 남다른 애호와 재주를 키워온 엄대신은 자연스레 량수촌과 량수공사에서 큰 행사 때면 표어와 구호를 쓰는 일을 맡아하게 되였고 시간이 갈수록 ‘재간둥이 상해청년’으로 받들리게 되였다.

1974년 량수공소사에서 사진업 경영을 시작하면서 사진사를 모집했는데 공소사 지도부에서는 공사‘5.7’판공실과 협의하고 촌당지부의 의견을 청취하여 련속 2년 훈춘현 우수지식청년으로 표창받은 엄대신을 사진사로 선발했다.

엄대신은 촬영, 사진현상기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였다. 도문, 연길 사진관을 찾아가 기초적 기술을 배워 엄대신은 량수공사의 첫 사진사로 발탁되였다. 그 토대에서 장춘, 대련, 상해 등 소위 기술이 높은 사진관도 찾아가 배우는 기회를 엄대신은 극력 쟁취해 자신의 사진 기술을 제고했다. 그렇게 량수촌으로부터 시작한 사진 찍는 일은 점차 하동、하서、동전、수남、남대、석두, 북대, 정암동 등 촌의 요청까지 받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엄대신은 사진 찍는 일이 즐거웠고 부름에 거절을 몰랐다. 어디라도 달려갔다오면 사진을 남겨서 기뻐하는 시골사람들을 생각하며 보람스러워했다. 멀리는 타 공사인 밀강향의 밀강촌、동양촌、해방촌, 왕복 12 리 길도 더 되는 중강자촌까지 그는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조선족인지...분간하기 어려워

엄대신이 다닌 대부분 촌들은 조선족촌이였다. 촌민들이 그를 요청한 데는 우리말로 문제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소재 지역이 조선족집거지구란 점을 감안한 엄대신은 군중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서는 조선말부터 배워야 한다 생각하고 《조선어와 한어 자습총서》책을 사서 열심히 자습하고 조선족 지식인을 찾아 문의하면서 불과 2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조선말소통 장애를 없앴고 조선문자도 통달했다. 조선말로 옛말까지 술술 하는데 발음도 좋아 조선족인지 한족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정도에 도달했다. 훈춘에는 지금토록 엄대신이 써준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된 가게방 간판들이 수십개 된다.

동반자를 만나

집체호생활을 한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가오자 엄대신과 한 집체호서 생활하던 청년들을 포괄해 도시에 취직해 가거나 성가해서 하나 둘씩 집체호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대신은 농촌에서 사진업을 하는 것도 많은 이들한테 필요로 하는 영광스러운 과업이라 인정하고 량수를 떠날 궁리가 없었다고 한다.40년 부부로 지내온 부인 왕숙하와의 인연도 사진으로 맺어졌다고 한다. 왕숙하는 집이 하북성 청룡현인데 하동촌 백부네 집에 자주 놀려와 엄대신한테서 사진을 찍으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여 량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두사람은 1978년 1월에 결혼해 아예 량수에서 인생 제2막을 열었다. 지금 엄대신은 부인과 “‘백골난망’하는 사랑이 깊은 부부”라고 말한다.

엄대신네 부부는 훈춘의 개혁개방 문호가 열린 후인 1996년에야 비로소 훈춘시내로 ‘입성’했다. 그 때 즈음 엄대신은 사진 뿐만 아니라 레코딩 필름, 비디오 테이프를 척척 제작해내 시내는 물론이고 마천자향, 양포향, 반석진, 경신진, 영안진, 하다문향, 지어는 200리 떨어진 춘화진 서토문자촌, 동흥진촌, 초평, 화수촌까지 청을 받고 다녔고 흑룡강성 동녕현, 목단강, 녕안 등 지에도 다니면서 사진, 록화 일거리를 잡았다.

사진업을 가업으로 꽃피워

사진업은 어언 엄대신 일가의 가업으로 되였다. 허나 엄대신은 가슴 깊이 좀 큰 단위에 출근해 보고 싶은 념원을 간직해 왔다. 그러다 1986년 연변탄광(석두) 로동자 모집에 응해 광부 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탄광에서 경영하는 사진업을 다시 종사하게 되였는데 그만에 엄대신은 2003년 9월에 위암으로 인해 정령전 퇴직하고 3년간의 치료‘장정’로를 부인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서 걸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사진업을 잡았다.

다행스럽게 그 먼저 상해시서 당년의 하향지식청년 가정을 상대로 가족 1명씩 취직시켜 주는 보조방안을 내왔을 때 엄대신은 큰 아들 엄보화를 상해 비너스웨딩사진관에 보냈었다. 오늘날 훈춘의 비너스웨딩사진관은 바로 그 때 엄보화가 상해 비너스웨딩사진관에 가서 6년간 취직, 취경하고 돌아와 엄씨 가문에서 오픈한 사진관이였다. 오늘날 사진관은 360평방메터 고정부동산 영업면적에 각종 촬영, 인화시설을 구비하고 있으며 5명 종업원을 두고 있는 규모에 이르렀다.

‘천사 락원’아동사진관도 엄대신네 둘째아들 엄보준이 부친과 형님의 영향을 입고 2009년에 오픈한 260평방메터 고정 부동산 영업면적에 8명 종업원을 둔 전업 스튜디오이다.

이외 엄씨 형제 사진관에는 18명 전업 기술촬영자들을 초빙해 사진업 발전에 큰 힘을 응집하고 있단다.

두 사진관은 엄대신의 두 아들 명하로 된 사진관이라지만 원조 사진사‘상해청년사진사’인 엄대신의 인복을 크게 타고 있다. 아직도 사진관 실무에, 사진관 문화교육에 손을 떼지 못한다는 엄대신, 요즘은 19차 당대회정신에 크게 고무받아 자신의 여열을 기여할 수 있을 때까지 기여해 가리라고 의기충천이란다.

엄대신의 이야기는 2016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꿈에도 가고픈 연변》라는 책에 소개된 적 있다.

/정창선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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