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드러난 사체유기 진실
산부인과 의사 사체유기 사건에서 투약됐던 약물들. 수면유도제 외에도 베카론·나로핀·리도카인등 강력 마취제가 포함돼 있다. [김민상 기자]서울 강남의 산부인과 의사 사체 유기 사건에서 숨진 이모(31·여)씨의 사망 원인이 당초 알려졌던 수면유도제 외에 다양한 마취제를 과다 투여한 데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8일 산부인과 의사 김모(45)씨가 이씨에게 수면유도제 미다졸람과 베카론 등 마취제 3종, 소화제, 진통제 등 약물 총 13종을 섞어 투약해 숨졌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씨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조사한 뒤 당초 예정일보다 하루 늦춘 10일 검찰에 이 사건을 넘길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데도 네 가지 약물을 한꺼번에 주사한 것을 감안하면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처음 영양제와 미다졸람만을 투여했다고 진술했으나,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소견 등을 증거로 내놓자 마취제 사용 사실을 털어놨다. 경찰 수사 결과 김씨는 지난달 30일 밤 친구들과 병원 인근에서 술을 마신 뒤 이씨에게 ‘언제 우유 주사 맞을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김씨는 지난 1년간 삼성동 이씨의 자택을 여섯 번 찾아 수면유도제이면서 마약 성분이 있는 프로포폴을 놓아주며 관계를 가졌다. 프로포폴은 미국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숨지게 한 약물이다. 이날 이씨는 ‘오늘요 ㅋㅋ’라는 답장을 보낸 뒤 김씨가 근무하는 병원을 찾았다.
이날 김씨는 이씨에게 그동안 투여하지 않았던 세 가지 마취제인 나로핀과 베카론, 리도카인을 꺼내 보였다. 이씨는 투약 전 40분간 스마트폰으로 마취제 3종 이름을 직접 검색 했다. 김씨는 미다졸람과 마취제를 투여한 뒤 이씨가 15분 정도 자고 일어나자 관계를 가졌다. 그 뒤 이들은 한 시간 동안 잠을 잤다. 김씨가 일어나 이씨를 깨웠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마취과 전문의 얘기로 베카론과 나로핀 등을 섞어 투여하면 호흡 곤란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며 “투여해야 할 경우 인공호흡기가 갖춰져 있는 시설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사에 참여한 마취과 전문의 역시 나로핀은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독성을 가진 마취제이며, 베카론도 인공호흡기 없이 투약하면 호흡을 멈추게 하는 약물이라는 소견서를 보냈다. 바르는 조루방지제로 쓰이는 마취제 리도카인은 성기능과 관련된 약물로 알려져 있다. 한 산부인과전문병원의 마취과 전문의는 “베카론은 환자를 눈도 뜨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마취제”라며 “수술 경험이 많은 산부인과 의사가 위험성을 몰랐을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씨가 잠을 푹 자고 싶다고 말해 마취제를 섞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는 등 고의성을 부인했 다. 김씨는 “마취제를 포도당 수액에 섞어 링거 줄을 통해 방울로 투약하면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뇌와 장기 등을 부검한 결과에서는 직접적인 최종 사인이 나오지 않았고, 거짓말탐지기 수사에선 판독 불능 결과가 나왔다. 경찰은 김씨와 함께 이씨의 시신을 주차장에 놔두고 귀가한 부인 서모(41)씨도 사체유기 방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