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28년간 이어온 따뜻한 민족우애의 정
리문영이 보내온 상금을 받아안고 이왕지사를 회억하는 김순자어머니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헌례활동으로 연길시가 거금을 내걸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펼쳤던《고향찬가-대중애창 창작가요》공모에서 아주 특별한 노래 한수가 영광의 2등상을 차지해 2만원의 상금을 받아안았다. 바로 돈화시결핵병예방퇴치소의 한족의사인 리문영이 창작한 《나의 조선족어머니》라는 노래이다.
지난 7월 30일 오전, 연길시로동자문화궁에서 있었던 《고향찬가-대중애창 창작가요》응모평의활동 시상식에서 이 노래의 작사자인 리문영은 상금 1만원을 받아안았다. 당일 리문영은 자기가 탄 1만원의 상금을 1전 한푼 다치지 않고 《나의 조선족 어머니》노래가사의 실제주인공인 연길시 신흥가 민부지역사회 김순자(83세)어머니에게 그대로 드렸다. 그동안 김순자어머니가 민족이 다르지만 불우한 처지에 처했던 자기를 아끼고 사랑해준데 대한 감격의 보답이였다.
그렇다면 한족인 리문영과 조선족인 김순자어머니는 어떤 연유로 이같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고 이처럼 감동적인 민족우애의 노래를 엮을수 있었던것일가?
이야기는 개혁개방의 초기였던 지난세기 1983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순자어머니는 연변위생학교 남쪽거리옆에《북해상점》이란 가게를 차리게 되였는데 돈화의 사하연에서 연변위생학교에 와 공부하던 리문영이라는 한족녀학생을 알게 되였다.
상점에 와서 맛있는걸 사먹군 하는 여느 학생들과는 달리 우표나 치약따위 생필품들만 사는 문영이는 알고보니 어머니를 여읜데다 70고령인 아버지마저 심한 장애인이라는것이였다. 리문영학생의 어려운 집안사정을 알고난 후 그의 처지를 가긍하게 여긴 김순자할머니는 리문영학생의 손을 꼭 잡고 《너는 비록 어머니가 없어도 내가 네 어머니와 같다》하고 말하면서 따뜻이 위안해주었다.
그때로부터 김순자어머니는 여러모로 리문영학생을 돕기 시작, 문영이한테 상점에 와 국밥을 먹게 하고도 모자라 밤에 복습할 때 요기하라고 사탕이나 빵 같은것을 늘 쥐여주군 했다. 언젠가 문영이가 된감기에 걸렸다는것을 알게 되자 솜내의와 약을 사갖고 직접 문영이의 기숙사로 찾아가 문영이가 깊은 감동을 받게 했고 정식으로 문영이를 양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3.8》절이 돌아오자 문영이와 그의 친구들을 상점으로 오게 하여 함께 명절을 쇠기도 했고 그들이 일본어공부에 애로가 많다는것을 알자 손수 상점에 작은 흑판을 걸어놓고 일제시대때 배운 일본어지식을 바탕으로 일본어를 배워주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문영이한테 친딸이상의 사랑을 몰부었다.
문영이(왼쪽 두번째)와 그 친구들에게 일본어를 배워주고있는 김순자어머니(1983년)
당시 김순자어머니의 도움과 사랑을 받은 한족학생은 리문영학생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화전에서 온 정수금, 장춘에서 온 중경림과 훈춘에서 온 장려 등 6명에 달하는 한족고아학생들도 모두 정도부동하게 김순자어머니의 《손등을 씻어먹은 자식》들이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돈화시화교풍습병전문병원에서 근무하던 리문영은 1988년 돈화시실험중학교의 심엽군이란 교원총각과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하게 되였다.
당시 김순자할머니는 친딸들이 결혼할 때 넣은 정성보다 더 큰 모성애를 가지고 문영의 결혼에 신경을 썼다. 딸들인 영순이와 영애를 동원하여 연길시내를 돌며 제일 값지고도 보기가 좋은 천으로 이불등과 이불안 그리고 담요감을 샀으며 며칠동안 신경을 쓰며 이불안에 풀칠하고 볕에 새하얗게 바래워 한뜸한뜸 정성들여 이불과 담요를 만들었을뿐만아니라 새살림에 쓸 그릇같은것을 몽땅 준비해갖고 남편 김룡환과 함께 돈화에 가 문영의 친정부모신분으로 결혼식에까지 참가하였다.
그때 워낙 순자한테 딸이 없어 문영이를 양딸로 삼았으리라 여겼던 돈화시실험중학교의 한 교원은 문영이가 순자의 딸로 되게 된 전후사연을 듣고 또 김순자한테 아들 삼형제와 딸 삼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국에 내놓고 자랑할만한 위대한 조선족어머니》라고 높이 평가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뒤 문영이가 임신해 출산날자가 가까와오자 김순자어머니는 또 아기 포대기, 기저귀와 기타 아기옷 같은것을 장만해가지고 문영이를 찾아갔다. 그때 임신으로 문영이의 발이 몹시 부은것을 본 어머니는 문영이가 순산하도록 매일 아침마다 문영이를 데리고 밖에서 운동삼아 산책하군 했다. 돈화역부근에서 짠지장사를 하는 조선족아줌마들이《저 할머니가 데리고다니는 딸이 한족인걸 보니 저 할머니가 한족령감을 해서 사는 모양》이라고 오해하기까지 했다.
문영이의 아들 심붕곤도 김순자어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르고있다.
김순자어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르는 문영이의 아들 심붕곤
김순자어머니가 문영이한테 쏟은 정성은 이뿐이 아니였다. 결혼생활중 문영이네 가정에 그 어떤 곤난이나 모순이 생겨도 늘 찾아가 해결해준것은 물론 문영이가 혹시 잘못 처사한 가정문제가 있어도 무턱대고 감싸준것이 아니라 비판도 하고 타일러주기도 하면서 문영이가 옳바른 결혼생활을 할수 있도록 적극 인도해주었다.
현재 문영이와 김순자할머니 사이는 그 어느 친모녀관계에 못지 않게 화목하고도 정이 깊다. 문영이는 매번 순자할머니한테로 올적마다 항상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있으며 저녁에 잘 때면 늘 김순자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자군 한다.
김순자어머니의 83세 생일잔치때 절절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노래하고있는 리문영
길림성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한 문영이는 《나의 조선족어머니》 등 산문과 시를 여러 간행물에 발표하는것으로 김순자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감격의 정을 표달하기도 했다.
현재 리문영외에도 정수금, 중경림, 장려 등 기타 《한족자식》들도 모두 의료위생분야의 중견으로 자라났다. 그들은 늘 당년에 김순자어머니의 사랑을 받던 때의 이왕지사를 입에 올리면서 《8.15》로인절, 설명절과 순자할머니의 생신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축수의 인사를 올리군 한다. 그럴 때마다 김순자어머니는 더없는 행복감에 취해 그들한테 맛있는 음식 한끼라도 더 해먹이려고 친딸들을 들볶기가 일쑤이다.
과거의 감동적인 이왕지사들을 회억하면서 리문영은 《김순자어머니는 어려운 자기에게 물질상의 도움을 주었을뿐만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안위를 주었으며 사상상의 가르침도 주었다》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적극 돕는것을 인생의 락으로 여기는 김순자어머니의 고귀한 인격적매력을 따라배워 영원한 인생의 사랑릴레이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김순자어머니는 현재 이미 83세 고령이지만 사랑의 마음을 계속 전해가고있다
한편 김순자할머니는 만년에 퇴직금 한푼도 없는 상황임에도 2008년 사천 강진과 2010년 옥수강진시 각각 200원과 100원의 성금을 재해지구에 보냈으며 지금도 여전히 연변대학에 다니고있는 한족학생 후조림과 왕비를 양손자로 삼고 그들의 성장을 물심량면으로 따뜻이 관심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