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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서 활약하는 흑룡강 사람들 | 함께 가는 길은 아무리 험난해도 멀리 간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3.12.01일 14:12



중학교 교사에서 한국기업의 회사원으로, 한국기업의 중견관리인으로 부터 기업인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대기만성(大器晚成)'의 인생역전드라마를 써내려 가면서 자그마한 전자부품협력업체를 4-5개의 계렬사를 가진 동종업계의 '다크호스(黑马)'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천진진원전자유한회사의 진철호리사장(57)이다. 그는 아프리카속담의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것을 직접 실천하며 직원들과 일심동체가 되여 비록 조금은 느릴수도 있지만 급변하는 시장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회사의 성장일로를 이끌고 있다.

교사에서 한국기업의 회사원으로

흑룡강성 탕원현 태생인 진철호씨는 한때 공부잘하고 선생님 말 잘듣는 모범생이였지만 지독한 사춘기의 방황을 겪으며 '문제학생'으로 전락하면서 대학입시에서 실패의 고배를 맛보았다. 가정형편상 재수를 하기도 어려웠던 그는 고향의 중학교 교사로 초빙되였다. 비록 몇년이란 짧은 교단생활였지만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전환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믿고 선생님이라고 따르는 학생들속에서 인생관과 가치관을 새롭게 수립하게 되였으며 정규대학을 못간 한을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면서 본과학력을 따게 되였다. 지금도 한국, 일본 등 외국과 상해, 북경, 심천, 광주 등 중국의 대도시들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 당시의 학생들이 련락하고 찾는 것을 보면 괜찮은 교사였음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1993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단생활을 접게 된 진철호씨는 남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거점도시인 천진에 행장을 풀었다. 그때 개혁개방의 선두지역으로서의 천진은 1992년 중한수교와 현지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유치정책으로 한국대기업들과 협력업체들의 선택 1번지가 되였던 것이다. 또한 대학교를 졸업한 동창들과 고향친구들이 당시 정부의 투자유치부문이나 한국기업들에 취직하고 있어 일정한 도움도 받을수 있었던 것이다. 고향친구의 소개로 천진의 한 한국전자부품업체에 취직을 하게 되였다. 1993년부터 2004년까지 11년간을 생산1선의 작업팀장, 총무과의 자재구매담당, 총무과장, 영업부장, 부총경리, 총경리 등 여러 한국기업을 전전하며 회사의 중견관리일군으로 성장했다. 진철호씨는 비록 한때 문화차이, 관념차이 등으로 인해 여러가지 갈등도 있었지만 11년간의 한국기업생활은 그에게 외국의 선진관리경험을 습득할수 있는 좋은 '대학'이였고 훌륭한 인생의 멘토를 만날수 있었던 '황금기간'이였다고 밝혔다.

간고한 창업을 거쳐 기업인으로 변신



많은 조선족기업인들이 밟았던 코스의 련속이라고 할가 진철호씨도 비록 늦었지만 자신만의 비전을 가지고 창업에 도전하여 2004년 천진시 진남구에서 천진진원전자유한회사를 설립했다. 한국기업의 협력업체로 주로 고주파변압기, 필터, 인덕터 등을 생산하는 전자부품기업이였다. 남의 공장에 세방살이를 하고 초창기 직원 10여명에 설비 몇대로 시작하며 간고한 창업의 나날을 견뎌야 했다. 때로는 자재구매대금이 없어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야 했고 직원들 줄 봉급이 없어 애장품을 팔기도 했으며 거래처직원들을 만나느라 밤낮이 따로 없이 돌아쳐야 할때도 많았지만 '하면 된다'는 뚝심을 가지고 '신용제일, 품질제일'을 고집하며 거래처와 약속한 납품기일을 칼같이 지켰고 제품에 조그마한 하자가 있어도 손해를 감수하면서 몽땅 페기처분했다. 그와 다년간 합작했던 한국업체의 한 사장의 말을 빈다면 달변이고 조금 약아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솔직하고 매사 진심이여서 파트너라기보다 우선 친구가 되였고 서로 도와줄수 있었다는 것이였다. '기업이 흥하려면 직원들이 바빠야지 사장이 제일 바쁜 기업은 망하기 직전이다'라는 것을 경영철학으로 삼았던 그는 주요실무자에 대한 관리와 양성을 중시하고 중요한 결책외에는 평소 그들에 의해 회사가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공평한 성과급제도를 실시해 일반 직원이라도 그달에 회사에 기여가 많으면 과장, 차장들보다 더 많은 보너스를 탈수 있게 했다. 창업초창기부터 10여년을 함께 해온 이 회사 김인학총경리의 말을 빈다면 남이 보면 맨날 놀러나 다니는 사장같지만 누구보다 노심초사하고 회사의 상황을 손금보듯하며 회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중요한 결책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후문이다. '믿음은 믿음을 낳고 또한 기적을 낳는다'는 말럼 회사상하가 일심동체가 되여 각자 맡은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니 회사의 매출과 규모도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2007년, 회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는데 전국 창업 100강현의 하나인 산동성 덕주시의 경운현에서 세수, 융자 등 면의 각종 우대정책으로 투자유치를 제안해왔다. 경운현은 산동성에 속하지만 천진에서 140여킬로미터 떨어진 산동성과 하북성의 교차지역으로서 화남, 화북, 동북, 천진, 북경을 련결하는 중요한 교통허브로 '경진문호', '산동북대문' 등으로 불리는 곳이였다. 가족들의 반대, 거래처와 직원들의 리탈 등 여러가지 악재가 겹쳤지만 진철호씨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경운현으로의 회사이전을 밀어부쳤다. 남들이 보기엔 '호박쓰고 돼지굴로 들어가는' 무모한 결정같았지만 그만의 셈법이 따로 있었다. 당시 천진은 동종업계의 과열경쟁으로 제품단가가 형편없이 떨어져 손익분기점에도 못미칠 정도였으며 회사규모확장에 필요한 자금투입, 세금, 인건비 등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할때 회사를 이전해야만 더욱 큰 성장을 할수 있다는 그만의 판단이였다. 회사의 이전비용, 직원리탈, 현지적응 등 불리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일시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였다. 잘나가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이하는 참상을 수없이 보아왔던 그는 남들의 전철을 밟지말고 항상 미래를 대비하고 느리지만 탄탄하게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의 가장 큰 덕목중의 하나인 도박을 멀리하는 것도 한 순간의 짜릿함때문에 인생도, 사업도 다 날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였다. 경운현 경제개발구 서환로에 선후로 3천여만원을 투입하여 공장부지 2만8천평방미터를 확보하고 건평이 1만여평방미터에 달하는 공장건물을 일떠세웠으며 수백만원을 투입해 첨단최신설비를 구전히 갖추었다. 또한 경운진원전자유한회사, 경운준원전자유한회사, 적성전자유한회사, 홍운전자유한회사, 서가전자유한회사 등 회사를 속속 설립하며 변화하는 시장에 적극 대응해 글로벌핸드폰기업의 핸도폰 진동모터, USB케이블, 이어폰선, 글로벌자동차기업의 와이어링하니스, 자동차 안테나, 인덕터, 가정용 의료기기 등 제품을 생산하며 탄탄한 거래처를 확보했다.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위기속에서도 회사는 글로벌 자동차부품업체와 계약에 성공하여 향후 회사발전에 튼튼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2800만원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효'와 '화' 및 선행을 실천하며 사회적공익활동에도 적극 참여

지금도 아버지만 떠올리면 진철호씨는 눈시울을 붉힌다. 남들에게는 한없이 인자하셨지만 유독 그에게만 엄격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에 형님, 형수밑에서 눈치밥을 먹으면서 쌍둥이동생에게 공부기회를 양보하고 평범한 농민의 삶을 살아야했던 그의 아버지는 자녀 5남매중에 제일 총명하고 성격도 활달했던 그에게 기대가 그만큼 컸던것이다. 하지만 살아생전에 좋은 모습 한번 못보이고 그가 천진으로 떠났던 1993년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버지림종도 지키지 못한것이 평생 한으로 남아 지금도 애창곡이 '불효자는 웁니다'란다. 그래서 천진에서 정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흑룡강성 탕원현의 시골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왔고 산지사방에 흩어져있던 형제들을 천진으로 데려왔다. 당시 32세의 로총각나이에 마음씨 착한 연변 도문출신의 김설매씨를 만나 결혼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조카둘도 집에 데려다 공부를 시키면서 집이 없던 초기에는 자그마한 세집에 10여명이 지낼때도 있었지만 불편함보다 함께여서 행복했단다. 어머니가 페암을 선고받아서 세상뜰때까지 3년간 병치료를 하는 기간 당시 경제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국내 최고의 병원과 약품을 제공하며 극진하게 효도를 했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사망할때 까지 그의 집은 늘 형제들을 비롯한 일가친지들로 북적였고 매번 식사시간이면 잔치집분위기였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는 말처럼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좋은 것을 보고 자란 그의 두 아들 진빈과 진성준군도 평소 어른들을 공경하고 형제간의 정도 남달라 주변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지금까지 형제들의 사업자금, 조카들의 학비, 생활비, 일가친지들의 경조사비용 등으로 들어간 돈도 상당했지만 그들부부는 종래로 이것으로 얼굴을 붉힌적이 없었다. 진철호씨는 '가화만사성'이라고 늘 자기가 준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며 자기가 이만큼 이룰수 있는것도 부모, 형제덕이고 부인 김설매씨와 아들들, 그리고 친구들과 사람을 잘 만난 덕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격과는 달리 남들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그였지만 선행과 공익활동에는 적극 참여했다. 정기적인 불우이웃 돕기외에도 친구들과 함께 수년간 병으로 페인이 되다 싶이 한 동창생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도 대주었으며 고향의 로인협회에 활동경비도 대주었다. 천진의 크고 작은 민족행사와 현지사회의 기부활동에도 늘 그의 모습을 볼수가 있었다. 아직도 동창들이나 친구들에 비해 천진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진철호리사장은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가족들과 함께 아름다운 인생을 엮어가는 것이 자신의 꿈이고 행복이란다.

/진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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