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우연히 들린 연변민족공예미술제품교역시장에서 발길이 닫는 대로 두루 구경이나 하며 지나다가 문뜩 한곳에 못박힌 서버렸다.
《민속골동》(民俗古玩)이란 간판을 건 고물가게에 조선족민속고물들이 빼곡이 들어차있었다. 단 한곳뿐인 조선족민속골동품가게인지라 저으기 호기심이 앞서 둘러보았다.
고려청자기며 달항아리, 전각조각 나무가구, 옛 트렁크, 크고작은 단지, 뜨개보, 다리미, 매돌, 책, 레코드, 그림, 지어 옛 사진들까지 눈에 띄였다. 40대 나젊은 주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가는 손님들을 맞고 바래였다. 의대졸업생이라는 《민속골동》고물가게 주인은 40대 최성씨, 다년간 무역과 장사로 생업을 이어가던중 두해전 골동이 돈이 된다는 정보를 접하고 장사나 해볼 속셈으로 민속골동품에 손을 댔다고 한다.
그러나 한해동안 조선족민속골동품들을 거둬들이면서 최성씨는 그만 《민속문화의 매력》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워낙 어릴적부터 한족학교에 다닌 그로서는 조선족 민속에 대해 아는것도 별로 없고 관심을 가져본적도 거의 없으며 민속기물을 애용한적은 더구나 없었다. 하지만 낡고 손때 묻은 기물들의 외관형태나 색상, 용도, 기능의 속성들이 가까이할수록 신통하게만 느껴졌고 그속에 묻힌 가치들이 막연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필경 그들속에는 시대를 알수 없는 력사적 가치며 깊이를 알수 없는 문화적 내함들이 또는 내막을 알수 없는 사연들이 나름으로 깃들어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의 귀중한 민속골동품들은 자기 가치를 확인받지 못한채 버려지거고 점점 사라져가고있다.그나마 현대생활의 우월한 조건하에서도 고풍스런 옛 민속기물이며 공예품들을 선호하는 풍조가 일고있는 현실에서 다소나마 안위를 느끼고있다고 한다. 하지만 급속히 사려져가고있는 민속문화적 가치를 원만히 부활시킬수없어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최성씨는 말했다.
최성씨는 네트워크를 이용하거나 소장애호가들과 광범하게 인맥을 맺고 하얼빈, 무단장, 단둥, 다롄, 지안 등지로부터 대량의 민속골동품들을 수집하였는데 가격대를 따지면 수십만원에 해당하는 귀중한 민속골동품도 있고 그 품종이 다종다양하다. 지금쯤엔 상당한 안목으로 골동의 우렬을 가려내는 그지만 무릇 민속적인것이면 무작정 수집해들이고 될수록 소장만 하고 팔지 않는 《경영방침》을 견지하고 있었다. 한편 언젠가 머나먼 타고장에서 사들인 《조선 문화 유물》(회화편, 1956년)이며 그속에 끼인 《안악 고분 행렬도》, 목록소개장 같은 귀중품들은 책장 깊이 간직해둔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있었다.
골동, 고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또 저도 몰래 고인들의 신상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작은 할아버지벌 되는 〈김홍길〉이라는 분을 생전에 많이 존경했습니다. 그분은 원 연변 〈9.3〉공장 공장장이였는데 1945년도에 인민해방군에 참군하였고 부대영장까지 지내면서 남정북전하신 분입니다. 그 분에 관한 서류들을 일부 소장했지만 원 서류들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반란파들이 모조리 걷어가고 없답니다.》그는 붉은 가위를 씌운 작은 증서들을 펼쳐보이면서 어딘가 모르게 애석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고인에 대한 존경심으로부터 또 고인들이 함께 해온 력사, 민족의 력사에도 자연 관심을 갖게 된다고 한다.
민속고물가게 주인 최성 (崔星)씨는 낡고 오래된 골동품들을 다루면서 자기 민족의 민속과 력사와 문화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갖고 나름의 연구를 곁들이게 된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우리 선조들의 령혼이 깃든 그 어떤 물질적인 또는 비물질적인 유물유산들을 수집소장하면서 언젠가는 꼭 조선족민속골동품전시관을 차리는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터놓는다.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