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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7)—광주봉기 하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24일 10:24
광주봉기 첫날 쏘베트정부의 수립을 보았지만 봉기군은 국부적인 승리를 이룩했을뿐이다. 광주에 주둔하고있던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반동군벌들을 도와 공격해왔다. 광주시 외곽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되였다.


12월 12일 점심, 쏘베트정부에서는 원 계획대로 쏘베트정권을 옹호하는 대형군중집회를 조직하고 쏘베트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광주의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 만여명이 서과원(西瓜园)에 모여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권립 교수) 《이날 점심 광주 서과원에서 광주쏘베트정부 옹호대회가 열렸습니다. 장태뢰동지를 대리주석으로 한 광주쏘베트정부에도 조선족용사들이 참가했습니다. 쏘베트정부 숙반위원회에는 조선족혁명가 김성숙이 있었고 로동무장부에는 김산이 있었습니다.》

김규광의 안해 두군혜녀사.


당시 김규광의 련인이였던 두군혜(杜君慧)녀사는 이번 군중집회에 대해 회억록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봉기 이튿날 광주시 서과원광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조선동지들이 소속된 련대가 광장의 호위를 책임졌기때문에 규광과 7, 8명 조선동지들이 대표로 대회에 출석하였다. 그속에는 최용건도 있었다.》


서과원은 광주시 번화한 월수구(越水区) 인민남로(人民南路)에 위치하였다. 광주시 당사판공실의 황수생(黄穗生) 연구원의 안내에 따라 가보니 지금은 광주일보사(广州日报社) 청사가 그곳에 자리잡고 었다. 만여명이 모일수 있는 거대한 공지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서과원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로동자대표들이 여러가지 회기(会旗)를 들고 가장 앞에 앉았고 광주주변의 농촌에서 온 수백명 농민대표들도 전신무장을 한대로 한쪽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전투는 긴장하였지만 교도퇀, 경위단, 적위대의 군인대표들도 와있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녀성, 상인, 점원, 학생대표들도 있었다.


회장정면에는 붉은바탕에 검은 글로 《광동공농병대표대회(广东工农兵代表大会)》라고 씌여있었고 주석대정면에는 맑스와 레닌 초상이 걸려있었다. 전신무장한 장태뢰가 주석단에 나서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장태뢰는 혁명정세를 보고하고 쏘베트정부 시정강령을 하나하나 이야기하였다. 《모든 정권은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대회에 귀속된다. 반동군벌을 타도하고 로동인민의 권리를 수호한다. 모든 토지를 국유로 한다. 쏘련과 련합하고 모든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한다...》

시정강령조목이 선포될 때마다 장내는 환호소리로 진동하였다. 흥분된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구호를 웨쳤고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그러나 주변의 총소리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렸다. 대회는 앞당겨 끝마치게 되였고 쏘베트정부 일군들과 대표들은 각기 자기의 위치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지휘부로 가던 도중 장태뢰가 적의 저격을 받아 불행히 희생되였다. 광주봉기의 최고지도자였던 장태뢰의 희생소식은 한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알리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봉기자들은 계속 드높은 기세로 적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때 상서롭지 못하게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과원집회가 끝난후 김산은 지휘부에서 총 없는 로동자들에게 총을 내주었다. 많은 지원자들이 무기를 얻기 위해 정부로 몰려왔고 로동자들은 기꺼이 봉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주강이남으로 도주한 장발규는 다시 주변의 부대를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12일까지 이미 반동군대 세개 사단이 광주에 도착하였다. 적들은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사면으로 광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권립 교수) 《봉기 이튿날 광주의 정세는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당우파들은 영국, 미국,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봉기군을 역습하기 시작했습니다. 12일밤, 봉기군에서는 혁명의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 혁명의 실력을 다소나마 보존하기 위해 해륙풍 쏘베트구역으로 철퇴할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적아간에 서로 교차되여있었기에 적지 않은 부대는 철퇴명령을 받을수 없었고 받았다고 해도 철퇴할수 없는 부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적 4군 지휘부와 12사단 지휘부가 있었던 장제,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였던 관음산, 백운산기슭의 사하진 부근으로 적이 공격해 왔다. 적의 주력부대는 백운산쪽으로 공격했다. 엽정과 엽검영, 진갱(陈賡)을 비롯한 우수한 공산당지도자들이 봉기군을 이끌고 적과 육박전을 벌였다. 전사들은 탄약이 떨어지면 돌을 던지며 싸웠고 돌까지 없으면 빈주먹으로 적들과 싸워 수차례 적을 물리쳤다.


장제와 사하진부근으로도 우세한 적이 공격해왔다. 도처에서 봉기자들은 적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고 봉기군 지휘체계도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중요한 진지가 무너지고 싸움은 크고 작은 거리에서 시가전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더는 무모한 싸움을 계속 할수없었다. 수배에 달하는 적들이 포위공격해 오고 있었다. 위기의 시각, 엽정은 혁명의 씨앗을 남기기 위해 과단하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공화국 원수 섭영진(聂荣臻)은 회억록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겼다.


《12일 황혼녘에 나는 엽정동지와 함께 재정청청문대에서 각곳 전투상황을 살펴보았다. 적들이 관음산에서 내려오고있었는데 우리에게는 매우 불리하였다. 우리는 더 지탱하는것은 무모한 희생을 내는것이라고 판단하고 퇴각하기로 결심하였다....나는 공안국에서 운대영과 진욱(陈郁)을 비롯한 성 위원회 동지들을 보았다. 적들이 이미 관음산으로부터 성내로 공격해오니 빨리 철퇴하라고 알려주었다. 이때 한무리 적들이 공원앞까지 쳐들어왔다. 나는 한 조선동지와 함께 그곳에서 적들과 싸웠다. 그 조선동지는 기관총수였고 싸움에서 아주 용감하였다. 그리하여 적을 물리치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였다.》


답사팀이 광주에서 만난 려현형(黎显衡) 로인도 무명 조선인기관총수의 이야기를 하였다. 려현형로인은 원 광주시문화국 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지만 지금도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있었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조선인전사가 기관총으로 섭영진의 철수를 엄호했다는 곳은 지금의 인민공원이였다.

광주봉기 당시의 공원(지금의 인민공원 자리)

광주시인민공원은 월수공원이남의 길상로(吉祥路)에 위치해있었다. 월수공원이 이전의 관음산이고 당시 인민공원은 그냥 공원이라고만 하였다. 공원문앞에서 기관총으로 적과 단신으로 싸운 조선용사는 이름도 남기지 못했던것이다. 우리의 용사가 목숨을 내걸고 엄호해주었던 섭영진은 해방후 공화국원수로 되였다.

12일 저녁무렵, 광주봉기 주력부대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동부전선을 수비하고있던 조선인부대도 후위를 맡고 주력부대를 엄호하였다. 교도퇀 2영과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전사들이 사하진에서 저격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13일 아침부터 더욱 많은 적들이 광주로 공격해왔다.적군 리한혼(李汉魂) 부대가 광주동부의 기차역을 점령하고 곧 사하진쪽으로 쳐들어왔다. 수배에 달하는 적들앞에서 사하진수비부대는 완강히 진지를 고수하였다.

(권립 교수)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의 우리 민족 용사들 150여명과 교도퇀 2영 5련의 부분적 조선족용사들은 사하에서 6,7배에 달하는 적들에게 포위되였습니다. 13일 저녁부터 피 비린 전투가 계속 되였습니다. 육박전이 벌어졌습니다. 반날동안 피어린 싸움에서 거의 전부의 우리 민족 용사들이 광주쏘베트정부를 수호하기 위하여 백색테로에 항거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수비군은 탄약이 떨어져서야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주력부대의 엄호를 맡고 사하진에서 싸웠던 조선인용사 150여명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희생되였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곳에서 최후까지 싸움을 견지했던 사람들은 전부 전사했기때문이다. 우리 민족 용사들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 없이 싸웠던것이다.

광주봉기렬사릉원.


광주시 광주봉기 렬사릉원(烈士陵园)에 가면 이들을 기념하기 위한 중조혈의정(中朝血谊亭)이 있다. 렬사릉원의 호수를 지나면 정교한 2층 정자가 보인다. 정자 처마밑에는 붉은바탕에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谊亭)》이라는 금빛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거대한 비석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친선은 만고에 길이 빛난다고 한 공화국 원수 엽검영(叶剑英)의 칠필제자가 새겨져있고 그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씌여있었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의 로동계급과 혁명적 병사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성세호대한 광주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적병사들속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전우들과 함께 의로운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어깨 겯고 싸웠다. 마지막 사하전역에서 그들은 진지를 고수하던중 대부분 장렬히 희생됨으로써 무산계급의 위대한 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적 영웅기백을 보여주었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할것이다!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 친선은 만고에 길이 빛날 것이다! 》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는 2004년 2월 8일, 답사팀은 광주시 중산 3로(中山三路) 홍화강(红花岗)에 위치한 광주봉기 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시중심으로 쳐들어 온 적은 12월 13일 오후 광주쏘베트정부까지 점령하고 도처에서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분산적으로 항격하는 로동자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무참히 살해되였다. 14일부터 19일까지 5,700여명을 공개 처형했다.

광주는 3일만에 다시 인간지옥으로 변해버렸고 사품치는 주강은 렬사들의 붉은피로 물들었다. 봉기 희생자들과 적들에게 체포된후 살해된 렬사들이 대부분 광주시 홍화강에 묻혔다.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주봉기 30주년이 되는 1957년 이곳에 거대한 릉원을 축조하였던것이다.


릉원은 릉과 공원 두부분으로 되였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그 정면에 기념조각상이 있었다. 무쇠와 같은 억센 손이 총가목을 굳게 잡고있는 조각이였다. 봉기기념비 바른편에는 원형으로 된 커다란 묘지가 있었다. 수많은 선렬들이 여기에 묻혔다한다. 묘지에는 광주꼼뮨렬사묘(广州公社烈士墓)라고 밝혀있었다.

렬사릉의 기념조각.

원형의 무명렬사 릉묘.


렬사릉을 지나면 록음이 우거진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에는 크지 않은 호수도 있었고 중조혈의정, 혈제헌원정(血祭轩辕亭), 중쏘혈의정이 있었다.

릉원의 사업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해마다 광주교역회가 열릴 때면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을 찾아와 혈의정을 보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광주사람들도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잊지 않고있으며 학생들은 청명이면 이곳에 와 기념행사를 한다고 했다.

릉원의 중조혈의정.

혈의정의 기념비


그렇다. 사람들은 잊지 않고있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박멸하고 사람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두려움 없이 싸웠던 선렬들을. 사람들은 잊지 않고있다.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함께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이룩하리라는 소박한 념원을 안고 소중한 생명을 바쳐 싸운 조선용사들을.


추운 겨울이 지나면 새봄이 온다. 어둠이 사라지면 새 날은 꼭 밝아올것이다. 고요히 잠든 우리 민족 투사들의 넋은 밝은 등불이 되여 영원히 우리를 고무해주고있다. 꿋꿋이 살아야 한다고, 폭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유와 해방을 찾는 민족의 항쟁은 영원하다고 우리를 고무해주고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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