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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5)—광주봉기 상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23일 10:55
1927년 12월 11일 새벽 3시 30분, 교도퇀병영밖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교도퇀의 혁명파 전사들은 15명의 완고파 군관을 총살했던것이다.


이어 봉기시작을 알리는 포소리가 세번 울렸다.

중외를 진감한 광주봉기가 시작되였다. 광주의 혁명적 병사, 로동자, 농민군이 신속히 일떠나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진격하였다. 붉은댕기를 목에 두르고 마치와 낫이 그려진 붉은기를 추켜든 만여명 봉기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특수임무를 맡은 조선투사 오성륜, 박영과 박근만, 박근수, 박건웅 등은 여러 소분대를 거느리고 적의 사령부를 기습하였다. 그러나 총소리를 듣고 눈치 챈 장발규와 진공박(陈公博), 황기상(黄其翔)을 비롯한 적 두목들은 잠옷바람으로 령남대학(岭南大学)으로 빠져나가 그곳에서 주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광주봉기의 주요 전적지였던 사하진과 연당거리(지금은 19로군 항일투쟁기념탑이 세워져있음).


봉기군 주력부대는 엽정의 인솔하에 백운산기슭의 사하진(沙河鎭)과 연당(燕塘)에 주둔하고있는 적 병영을 공격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달부와 김산이 엽정과 함께 사하진전투에 참가하였고 조선혁명가 김규광이 거느린 교도퇀 제2영 5련의 조선용사들도 봉기군주력으로 사하진전투에 참가하였다.


(권립 교수) 《교도퇀 2영 5련의 조선족전사들은 포병련 1대와 함께 도합 200여명이 양달부와 김산의 인솔하에 2000여명의 적이 도사리고있는 사하진을 새벽에 기습하였습니다. 얼마나 사납게 덮쳐들었는지 10분 격전한끝에 일부 적을 소멸하고 600여명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광주시중심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에 위치한 사하진에는 장발규의 주력부대 12사 36퇀이 주둔하고있었고 근처 연당에는 적 포병부대가 주둔하고있었다.


양달부가 거느린 부대는 적을 포위하고있다가 당황한 적들이 무질서하게 달려나오자 일제히 사격하였다. 30여명이 사살되자 적은 퇴각하여 꼼짝 못하고있었다. 날이 밝지 않았기때문에 적들은 봉기군이 얼마나 되는 줄도 몰랐고 부패한 군벌인 장발규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때 적지휘관이 나타나 싸우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그 지휘관은 양달부가 잘 아는 사람이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적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600여명 적을 포로하였다.


적정규부대가 가장 많이 집중해있던 사하진과 연당의 적을 순조롭게 소멸하자 엽정은 지휘부로 가고 나머지 일들은 양달부에게 맡겼다.

양달부는 광주봉기에서 총지휘를 맡은 엽정의 참모로서 큰 기여를 한 조선인혁명가이다. 양달부의 통역을 맡고 줄곧 그와 함께 싸웠던 혁명가 김산이 《아리랑》에서 회억한데 의하면 양달부는 포술전문가이다.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양달부는 당시 훌륭한 지하공산당조직자였을뿐만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였다.

그의 위망은 매우 높았다. 장발규를 비롯해 많은 국민당군장교들이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북벌전쟁시기 그는 하남성에서 싸웠다. 그는 포로한 봉계군벌의 포병들을 북벌군의 포병부대로 재편성하고 그 부대 지휘를 책임지기도 하였다.

양달부는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였기때문에 김산이 통역을 하면서 그와 함께 행동하기로 하였던것이다.

사하진전투에서 봉기군은 2000여명을 포로하고 여러가지 대포와 많은 탄약을 로획하였다. 포로는 지휘부로 압송해야 했고 로획한 무기도 가져가야 했다. 양달부와 김산은 50명 전사들을 남겨 포로들을 압송해가게 하였다. 양달부는 포로들의 눈빛에서 그들이 반항하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대포는 분해하여 지휘부로 날라가게 하였다.

뒤처리를 마무리한후 양달부와 김산은 작은 자동차를 타고 전투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지휘부로 갔다.

사하진을 점령한 봉기군주력부대는 다시 사하진동부에 위치한 연당으로 달려갔다. 그쪽에서도 혁명장병들이 유력하게 내응했기때문에 주둔군 대부분이 봉기군쪽으로 넘어왔다.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의 여러 전적지들에서 피흘려 싸웠던것이다. 광주봉기에서 수많은 전투가 진행되였고 또 크고 작은 전투에 모두 조선혁명가들이 참가했기때문에 모든 전적지들을 찾아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근 80년의 력사가 지났기때문에 많은 전적지들은 현대화도시로 변해버렸고 지명까지도 모두 변해버렸기때문에 답사작업은 더욱 힘들었다.


지형으로 보아 광주시는 북쪽이 높은 산지이고 남부가 낮은 평지이다. 북쪽에는 백운산이 있고 서북쪽에는 관음산이 남부로 뻗어 나와있다. 백운산과 관음산은 세면으로 광주시 중심을 둘러싸고있었다. 그러므로 백운산기슭과 관음산은 모두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수 있다.


지금은 도시가 많이 확장되여 백운산은 광주시 풍경구로 되였고 관음산도 월수공원(越水公园)으로 변해버렸다. 시중심도 관음산 동서로 확장되였다. 그러나 백운산기슭을 따라 여러 지명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사하진과 연당전적지 지점을 확인할수 있었다.

백운산기슭에 위치한 황화강 72렬사릉원(봉건적인 만청정권을 뒤엎기 위해 희생된 렬사들).


답사팀은 지명책을 따라 황하강렬사릉원이북 백운산기슭으로 갔다. 광주봉기의 주요 전적지였던 사하진이라는 명확한 지명은 지금 없다. 현지인들은 광주시 수음로(树荫路)부근이 옛날 사하진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마 광주시가 확장되기전 사하진은 도시 근교의 한 진(鎭)이였기 때문에 사하진이라고 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음로부근의 《사하호텔》, 《사하장식회사》, 《사하시장》을 비롯한 현판들을 보아 분명 이 주변이 사하진이라고 판단할수 있었다.

광주봉기 당시 이곳에 적의 포병부대 병영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연당이 있었던것이다. 이곳은 산을 등지고 광주시를 제압할수 있는 유리한 곳이였고 또한 동부로부터 광주시에 들어오는 길목이였기때문에 군사적으로 자못 중요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광주봉기 당시 총지휘자 엽정이 직접 사하진공격전을 지휘하였고 조선인혁명자 양달부와 김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교도퇀 제2영 5련의 100여명 우리 민족 용사들도 주력부대에 편입되여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것이다.

광주봉기가 시작되였다는 소식이 황포군관학교에 전해지자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은 중국공산당 당조직의 령도하에 신속히 행동하였다. 그들은 학교의 우파학생들을 쫓아내고 배를 리용해 황포를 떠나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 련장인 최용건은 조선동지들을 회합하여 앞장서서 돌진하였다.

최용건은 황포군관학교 5기의 구대장(区队长)으로 있었으며 소좌 부대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하게 싸워 많은 혁명자들을 주변에 단합시켰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남아 계속 투쟁하였고 학교내 조선인 혁명가들을 조직해 광주봉기에 참가하게 되였다.


(권립 교수)《황포군관학교 특무영 2련의 우리 민족 용사들은 수구령의 민단을 소멸해버리고 계속 사하로 진입해어갔습니다. 그들은 교도퇀 부분적 전우들과 함께 군사요지인 사하진을 고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최용건이 부대를 이끌고 광주동북교외에 도착했을 때 수구령(瘦狗岭)을 지키고있던 지주 민단(民团)이 저항해나섰다. 최용건이 거느린 조선인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다. 그들은 탄우를 무릅쓰고 좌측의 고지를 점령한후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민단에게 불벼락을 안겼으며 적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해버렸다.

적을 물리친후 최용건은 부대를 이끌고 사하진에 와서 교도퇀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교도퇀 2영 5련의 부분적 조선용사들과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조선용사들이 사하진을 사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사하진과 연당의 적을 순조롭게 소멸함으로써 백운산기슭에 주둔하던 적은 대부분 제거되였다. 그러나 광주시의 다른 한 고지인 관음산(观音山)에도 적지 않은 적이 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교도퇀의 다른 두갈래 부대는 관음산과 남부 주강기슭의 장제(长堤)로 향했다. 이때 광주시 경위퇀의 혁명적 장병들은 퇀장 량병추(梁秉枢)와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공산당원인 량병추는 경위퇀의 조선인 김형평과 손문적을 비롯한 많은 공산당원들을 이끌고 국민당 완고파들을 처단하고 봉기군에 참가하였다.

장제 전적지의 화려한 야경.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조선인 혁명가 김빈현과 민승재도 경위퇀의 장교였다. 이들은 모두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군인이였다. 경위퇀의 포병대 대장이였던 민승재는 일찍부터 경위퇀의 병사들을 단합시켰다. 그리하여 봉기가 시작되자 그는 경위퇀의 한개 련을 설득시켜 봉기군에 가담하게 하였고 김빈현과 함께 이 부대를 이끌고 관음산전투에 뛰여들었다.


(권립 교수) 《광주경위퇀의 조선족공산당원 김형평과 손문적은 좌파전우들과 함께 퇀 참모장을 비롯한 국민당우파들을 처단하고 퇀내의 포병대 대장이였던 조선족혁명가 민성재와 함께 단독 한개 련을 편성하여 봉기군에 참가하였습니다.》


관음산의 장발규부대는 끝까지 저항했다. 치렬한 전투에서 량병추가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경위퇀의 조선인용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다. 치렬한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있을 때 교도퇀의 전사들이 달려와 관음산전투도 승리로 끝났다.

관음산전투가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북부전선을 책임진 조선인 혁명가 리빈(李彬 1902--1927)도 봉기군을 이끌고 적과 싸웠다. 황포군관학교 제3기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제4기 정치과 학생대대 구대장(区队长)을 맡았던 리빈은 뛰여난 포술전문가였다. 그는 여러가지 군사기능을 장악하였고 포술에 뛰여나 혁명군의 동정(东征)과 북벌전쟁에 참가해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다. 광주봉기에서 그는 북부의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할 임무를 맡고 전사들과 함께 영용히 싸웠다.

(권립 교수) 《북부전선을 책임진 조선족 명포수 리빈은 북부교외의 비행장을 습격하고 적의 비행기 열대를 태워버리고 병기공장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당의 파견을 받고 병기공장에 들어간 리씨 조선족혁명가는 이미 이 공장의 완고분자들을 체포했고 병기공장을 지키던 두개 중대도 이미 봉기군에 편입되여있었습니다.》


리빈은 우선 소분대를 거느리고 광주시 비행장을 습격하였다. 거기에는 비행기 10대가 있었지만 쓸만한것은 5대뿐이였다. 그러나 비행기를 몰수 있는 조종사를 찾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비행기들을 모두 파괴해버리고 병기공장으로 달려갔다.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병기공장에는 리씨성을 가진 조선인 하급사관 한명이 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그는 비밀리에 완고파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주둔군을 모두 봉기군에 참가시켰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병기공장을 장악하게 되였다.


북부경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리빈은 다시 광주시 남부 주강기슭의 적을 경계할 임무를 맡고 장제(长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적 제4군 사령부를 공격하고있는 전투가 치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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