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한민족 > 한민족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료남 "어미지향"에서 느끼는 겨레의 숨결

[기타] | 발행시간: 2015.11.02일 09:55

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반금편)

료남 "어미지향"에서 느끼는 겨레의 숨결

료녕성의 서남부, 료하삼각주의 중심지대에 위치하고있는 반금시는 우리 성의 량질입쌀생산기지로서 "어미지향"으로 불리우고있다.

반금시는 오랜기간 영구시에 귀속되였다가 1984년에 단독행정관할 지급시로 되여 그때부터 독립행정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이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선조들의 발길이 닿았고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이 이곳에서 살아숨쉬고있으며 우리 민족의 찬란한 례의문화와 미량풍속이 80여년간 고스란히 전해내려오고있다.

지난 2000년 제5차전국인구조사에 의하면 반금조선족인구는 11,307명이였는데 2010년 제6차전국인구조사에서는 약 1,400명이 줄어든 9,912명으로 집계되여 급격한 인구감소세를 나타냈다. 이는 전 성적으로도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이 감소된것으로 나타나 반금조선족사회의 심한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반금시의 조선족인구는 한족, 만족, 다음으로 세번째자리를 차지(전 시인구의 0.9%)하고있다. 이들은 현재 반금시의 쌍태자구와 흥륭태구, 그리고 대와현과 반산현, 료동만신구와 료하구생태경제구 등 17개 조선족마을에 집거해있다. 그리고 료하유전에도 조선족이 살고있으며 중요역할을 발휘하고있다.



알칼리땅을 량전옥답으로

지난 2013년 반금입쌀은 중국국제브랜드농업발전대회에서 "2013년 가장 영향력있는 중국농산물구역 공공브랜드 백강의 으뜸"이라는 영예를 따내였다. 여기에는 알칼리땅을 량전옥답으로 만들기 위해 흘린 우리 민족 선인들의 피땀과 그 노력이 고스란히 깃들어있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키고 동북3성을 강제로 점령한뒤 영구지역(현재의 반금지역을 망라)을 조선난민을 수용하고 구제하는 지역으로 지정하고 이른바 생활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영구안전농장" 등 조선인농장을 설립하고 대량의 조선이민을 이주시켜 이곳에 동북에서 가장 큰 만주입쌀기지를 건립하였다. 그때로부터 료하하류 반금지역은 조선사람들에 의해 수전이 지속적으로 개간되기 시작하였고 이곳에 조선인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댜. 당시 안동, 무순, 봉천, 환인, 신빈, 해룡 등 지의 재만조선인이 이주해왔는데 지역으로 보면 조선팔도가 거의 다 포함되였다 한다. 반금의 전장대(田莊臺, 반금시 남부, 료하하류 북안에 위치한 천년력사를 지닌 옛성)를 중심으로 통자구, 이어구, 개가보 등 부락에 평안농장이 생겼는데 이 농장 대부분이 조선 평안도태생이라 하여 농장이름을 "평안농장"이라 지었다.

새중국 창립후 이 지역의 농장을 대부분 국영농장으로 개변하면서 이 지역 농민은 농장로동자로 되였다. 1956년 반금농건국이 국영농장을 대규모로 개발확장하면서 대와현 영흥, 평안을 중심으로 동북3성과 관내 여러 곳에서 조선족들이 륙속 모여들었고 조선족집단부락이 부쩍 늘어났다.

료동신구의 영흥진(원래 대와현의 영흥조선족향, 1998년에 설립)은 옛날부터 조선족이 집거해온 곳이다. 동쪽은 료하, 서쪽은 발해만, 남쪽은 료하를 사이두고 영구시와 마주하고있으며 북쪽은 전장대와 린접하여있다. 전 진의 10개 촌, 2개 주민구역중 조선족촌이 2개, 조선족주민구역이 1개이며 조선족인구는 3,000여명으로 전체인구(2.9만명)의 15%, 전체 소수민족인구(5,000명)의 60%를 차지한다.

벼농사를 위주로 한 국영영흥농장에는 50년대부터 조선족이 많이 살았으며 초창기때부터 로혁명간부 김의재 농장장, 문덕모 농업기술과 과장, 권재관 축목과 과장, 조지훈향장이 주요직을 맡았고 60년대초반부터는 농장당위서기 경경동, 김영철, 농업장장 오윤덕, 공청단서기 리일우, 향장 조지훈, 김종환 등이 농장기관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영흥과 료빈의 서부연해 5~10킬로 지대는 해발 1.5~2.5메터 좌우의 낮은 지세로 해만유년침식물이 형성된 침적토양이다. 토질은 해조침식염알칼리성분이 많은 땅이였는데 이런 곳에서 반금입쌀과 같은 량질입쌀이 나온다는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수 없다.

영흥진 중앙툰은 반금지역에서 가장 큰 조선족마을로 력사가 응축되여있는 벼재배전초기지이며 농경문화의 실천지와 발원지이다. 중앙툰의 간부들은 촌민들을 이끌고 개벌을 깊이 파서 뒤집는 등으로 염전토양을 개량했고 부단히 육모이앙, 생장관리, 제초, 농약사용, 그리고 품종개량을 통해 벼재배기술을 모색하고 선진기술을 고안해내여 끝내 각 계절에 따르는 벼재배기술을 연구하여 반금지구와 전 성에 널리 보급시켰다. 중앙툰의 농토건설, 선진 벼재배기술, 고수확 등 선진경험들은 심양, 무순, 료양, 대련, 금주 등 지구에 전파되였으며 로므니아, 알바니아 등 국외농업고찰단이 중앙툰에 와서 벼재배기술을 고찰하였다. 전 대와현교육국 민족교육과 과장 권형익씨("료녕성 반금조선족"을 집필함)는 "중앙툰사람들은 이 척박한 개벌에 도랑을 파고 쪼각쪼각 염분에 쪈 땅을 깊히 파헤쳐 염분을 빼내는 등 힘겨운 로동으로 염알칼리땅을 량전옥답으로 개변시켰다"고 소개했다.

"료녕성반금조선족"에서 원 반금시농림국 리필규부국장은 이렇게 소개하였다. 국영농장 초창기에는 위만시대 안전농장에서 심던 "경조(京租, 수염이 있는벼)를 심었는데 1957년부터 "위국(衛國)" 품종을 많이 심었다. 1972년부터 “경인(京引)-35호”, "농간(農墾)21호"를 심었다. 1974년 중앙툰대대에서는 “풍금(豊錦)” 벼새품종을 2년동안 실험재배하여 무당수확고를 500근에서 800근으로 높이였다. 대부분 벼새품종은 중앙툰에서 시험재배하여 널리 보급시켰는데 90년대 “반금1호” 등 반금계렬 새품종을 도입하여 무당수확고를 천근이상 돌파했다.

벼재배에서의 특수기여로 하여 김의재, 문덕모, 경경동, 오윤득 등 간부들은 선후하여 북경에 가서 국가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오송자(중앙툰 부녀주임, 촌주임, 당지부부서기 등 직 력임)는 전국3.8붉은기수, 료녕성로력모범으로, 김윤봉, 박효녀는 료녕성로력모범으로 표창받았다.

그러나 아쉬운것은 현재 중앙툰의 허다한 경작지를 한족들이 다루고있다. 송성순서기는 603가구에 인구가 1,591명(그중 한족이 100여명), 수전면적이 6,200무인데 현재 400무가 징용당한외 5800여무는 조선족 3~4가구가 의연히 벼농사를 짓고 기타는 모두 한족이 부치고있다고 했다. 원래 벼농사 위주였지만 현재는 국외로무송출붐으로 촌민 720명이 국외에서 돈벌이하고있다는것이다.



반금지역의 허다한 조선족마을의 간부들도 초창기 중앙툰에서 파견되였고 벼재배기술도 중앙툰에서 전파된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료하구생태경제구 석산진 태평조선족촌의 홍석화, 김연화 부부는 홍석화가정농장을 꾸리고 600무 논밭을 유기농으로 경작하는 한편 논판에 "게"를 사양하고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공관국씨가 80무, 최룡덕씨가 17무의 땅을 경영하고있다. 동곽갈장 동곽촌의 김충렬서기는 몇년전부터 솔선하여 170무의 농사를 짓고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김용택씨가 200무, 김정남씨가 150무, 정추봉씨가 120무, 권덕수씨가 100무, 송씨가 80무, 정영환씨가 80무, 천창복씨가 30무의 땅을 부치고있다.

한때는 명줄과 같았던 땅을 버리고 다른 돈벌이를 택하는 사람들과 비하면 땅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이 있어 벼농사의 명맥은 이어지고 그속에서 더 큰 수확과 비전을 기대할수 있을것이라 생각해본다.


조선족민속촌 건설에 박차

과거에는 일망무제한 벌판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을 보며 웃음을 금치 못하였다면 지금은 갈수록 피페해지는 마을을 보며 한숨만 커질수밖에 없는것이 오늘의 조선족마을의 현실이다. 로약자들과 아녀자들만 남은 조선족마을을 지켜낼수 있는 방법은 어디 있을가?

우리는 반산현에 위치한 "2창조선족민속촌"을 찾았다. 반금시내에서 30여킬로메터의 거리에 떨어진 2창업촌은 2009년부터 민속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었다. 마을입구에 조선족건통건축조형과 장식구조에 근거하여 높이 9.3메터, 너비 11.9메터로 세워진 "2창조선족민속촌"간판이 한눈에 안겨왔다. 올 9월 26일 민속촌오픈식을 가졌는데 개막 당일 약 500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몰려들어 찰떡치기, 김치만들기, 조선족복장입기 등 조선족전통문화체험을 하였고 10월 6일까지 평균 200여명의 관광객이 이 마을을 찾았다고 한문국 촌주임이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2창업촌은 1977년에 설립, 현재 202가구에 인구가 700여명, 경작지면적이 2,116무이다. 2009년부터 올해까지 성민위와 반금시정부로부터 1,200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22채의민박집, 3,000평방메터의 문화광장, 180평방메터의 민속전시관, 350메터에 달하는 조선족민속벽화거리, 50무에 달하는 낚시터, 30무 면적의 련못과 그네터 등 민속촌의 륜곽을 서서히 드러내고있다. 올 4월 "전국소수민족특색민속촌"으로 된 2창업촌은 향후 6년안에 승마장, 민속찬음거리, 한국상품마트 등 시설을 증설한다는 계획이다.

호가진 홍암촌도 역시 조선족민속촌건설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소개에 의하면 홍암촌은 2007년에 해당부문으로부터 “료녕성관광전업촌”으로 지정되였고 2009년에는 국가민위로부터 첫기 “전국소수민족특색시범촌”으로 지정되였다. 촌에서는 이미 북경의 모경관기획설계원에 위탁하여 전국소수민족특색시범촌에 걸맞은 홍암촌설계도를 내왔는데 장차 마을서쪽에 “조선족특색음식거리”를 건설하고 관광객들이 휴식할수 있는 3층 민박집을 세우며 천여무에 달하는 천연림을 자연양계장으로 활용하고 관광객들이 낚시를 즐길수 있는 양어장을 건설하게 된다. 권형익씨는 2014년부터 원래의 홍암촌조선족소학교 자리에 400평방메터의 조선족전통문화전람관을 건설하고있다고 소개했다.

반금지역의 조선족마을중 하향지식청년들이 내려와 건설된 마을도 있었다. 료동만신구의 해빈촌과 대와현 평안진 신농촌, 대와현 종가촌은 모두 심양의 하향지식청년들의 하향지점이였는데 후에 새로운 마을로 건설되였고 대와현 신립촌은 안산 하향지식청년들의 하향지점이였다가 이들이 귀향한후 역시 조선족들이 모여들어 조선족마을로 건설되였다.



또한 마을마다 자체의 특색이 있었다. "로무송출의 코기러촌"으로 불리우는 평안진 평안촌은 1986년 평안촌에 살고있는 서상영씨가 처음으로 부산에 살고있는 녀동생을 만난것이 반금지역에서 첫 한국방문이였다. 그러다 중한수교가 되면서 출국붐이 일기 시작해 1992년부터 지금까지 평안촌 사람들은 주로 한국, 일본, 미국, 카나다, 에스빠냐, 크로아찌아 등 나라에 모두 421명이 진출했다. 국내 외자업체에서도 185명이 근무하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대와현 신농촌은 "대학생마을"로 불리우고있다. 90년대 영구, 반금 지구에서 대학진학률 1위를 차지하였는데 이 마을에서는 80년대부터 10여년동안 본과대학생 15명, 전과학생 10명, 중등전업생 10여명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대학생가정"으로 불리우는 이 마을의 리홍철, 리동진 부부는 가난속에서도 다섯자식을 모두 대학생으로 키워냈다. 1992년 반금시부련회에서는 이들에게 “우수학부모”의 영예를 수여하였고 1995년 료녕성조선족사회에서 “훌륭한 어머니”, “훌륭한 며느리”, “훌륭한 안해”를 선발할 때 리동진씨는 “훌륭한 어머니” 금상을 수여받았다.

반산현 첨수진 1창업촌에서는 1984년부터 무우오가리장사를 해 련속 7년동안 심양 서탑시장에 년간 20여만근씩 팔아 톡톡한 수입을 올렸다고 1창업촌로인협회 김찬연씨가 소개했다.

취재중에 허다한 조선족촌의 간부들이 대부분 50대 좌우인데 경험이 풍부하고 정력이 왕성한 이들은 아예 한국행을 포기하고 민족의 사명감을 안고 조선족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있다는데 대해 놀랐다. 이들은 상급 해당부서를 문이 닳토록 찾아다니고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며 마을건설의 관련 자금을 유치해오고있다는것이다.



료하유전의 조선족들

반금 하면 자연스레 료하삼각주의 무연한 벌판과 함께 료하유전을 떠올리게 된다. 반금경제의 절반을 지탱하고있는 료하유전에서도 우리 민족의 위치와 역할이 큰것으로 알려졌다.

1967년 봄, 리정엽, 변판돌, 리두현 등 3명이 제일 먼저 료하유전자동차운수대에 와서 일하였다. 료하유전 인사처에서 2012년에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료하유전에 조선족은 298명, 그중 부처급이상 간부가 4명, 과급이하 간부 108명, 근로자가 186명이다. (일부는 공개하지 않음)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상주와 정문국, 홍춘, 우영덕씨 등이다.

김상주씨는 일찍 중국석유 료하유전회사 총공정사, 반금시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 중국료하해양석유탐측개발회사 총경리 등 요직을 맡았다. 오랜기간 료하유전 제일선에서 사업한 그는 해변 석유천연가스의 개발과 환경보호연구로 매장량이 1억톤에 달하는 해남유전 등 6개 연해유전을 발견하였고 연해석유와 천연가스를 륙지에서 채굴하는 "제방-다리-도서" 공정체계를 제출하고 싪천에 옮겼다. 동시에 료하복잡단층유전 륜동탐측개발시스템으로 고잠산, 고응고유, 조유 등 십여개의 유전을 발견하는데 중요역할을 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발해복식석유천연가스대탐측리론의 주요 창립자의 한사람으로 료하유전이 중국 제3대 유전으로 되는데 특출한 기여를 하였다.

류문국씨는 료하유전회사 공회부주석, 료하유전회사경비심사위원회 주임, 료녕성총공회정신위원회 상무위원이다. 1981년 료하석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반금탐사개발연구원채유소(盤錦勘探開發硏究院采油所)에 기술원으로 배치받아 공청단위 부서기를 거쳐 선후하여 찬채(찬采)공예연구원 채유공예연구소 서기 겸 부소장, 찬채공예연구원 원장조리, 원장판공실 주임, 고성채유공장(高盛采油?) 공회주석을 력임하였다. 2012년 그가 편찬한 ≪경비심계서류집성≫은 향후 상당기간 유전계통경비심계사업에서 권위적인 저서이다. 2013년 료녕성총공회에서는 그를 “전국공회계통경비심계상업우수간부”로 추천하였다.

홍춘씨는 료하유전 천연가스채굴회사 총회계사로 "료하유전의 녀호걸"로 불리우고있다. 무순태생인 그는 중남재정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반금시 제4, 5기 인대대표로 활약하였다. 그의 "책임회계의 탐구분석", "회계 위임파견의 제의분석" 등 4편의 론문은 선후로 국가급 간행물에 발표되였고 그증 2개 론문은 1등상을 받았다.

우영덕씨는 료하유전제1고중 부교장, 제2고중 교장, 당총지서기를 력임, 후에 반금시교육국에 전근되여 시정부 부처급독학(督學)으로 근무하고있다.

또한 료하유전 차량관리 주임 박희망, 료하유전 기관당총지서기 김두성, 중국석유천연가스운수회사반금분회사 서기 김영 등을 꼽을수 있다.

이밖에 박영홍(료하유전개발처 처장), 정욕식(고급공정사), 남관학(고급공정사), 박두성(고급공정사), 안기영(고급공정사). 김상택(고급공정사), 박영일(과장), 박영주(주임), 김경호(과장), 홍경세(대장), 손갑신(대장), 반태철(유전총병원 리료과 주임), 박영화(유전총병원 강복과 주임), 김춘봉(유전총병원 리료과 의사), 김룡하(유전제2병원과 주임), 오태식(시추대 기술자), 박룡욱(흥유2대대 당지부서기), 박영식(금주채유공장 문화궁 주임), 박영일(금주채유공장 기동과 과장), 한금( 료하유전총기계공장 물업회사 경리), 림삼(유전제1고급중학 물리조 조장, 료녕성고중골간교사) 등도 료하유전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있는 사람들이다.

흥륭태구의 진흥소구에 사는 림해옥씨는 "최근년에 석유회사가 개혁하면서 허다한 기구들이 지방에로 넘어갔기에 료하유전내의 조선족들도 분산되여 살고있다"고 소개했다.


반금조선족의 문화 교육의 진로

반금지역 조선족들은 1986년 반금시민족사무위원회가 성립된후 1988년부터 시작하여 매 4년에 한번씩 조선족운동회를 개최하였고 매 3년에 한차례씩 조선족촌을 단위로 하여 문예콩클을 전개하였으며 매년 6월의 첫 일요일에 반산 호빈공원에서 즐거운 민속절행사를 개최하고있다.특히 1990년에 반금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이 건립되면서 반금시의 여러 소수민족행사때마다 우리 민족 가무를 비롯하여 민족문화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현지 조선족들을 위한 각종 문화행사를 조직해오면서 조선족문화예술의 보급과 전승에 힘써왔다.

2009년 관장으로 된 변철규씨는 "매년 설명절을 앞두고 펼치는 소수민족문화모임과 여름철에 펼치는 민속축제는 조선족사회의 호평을 받는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고 소개하였다. 클라리넷연주애호가인 그는 1년여간의 노력끝에 연주가 50명, 합창대 60명인 반금시교향악단을 창단, 소수민족문화행사뿐만 아니라 반금시에서 조직하는 음악회에서도 공연할 계획이란다.

올해 50대 중반을 넘은 변규철관장은 현재 문화관내 조선족으로 혼자뿐이라며 자기가 퇴직하면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며, 조선족인재 영입을 위해 노력하고있지만 쉽지 않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반금조선족교육도 어느 시기보다 위기에 직면하여있다. 반금시조선족학교의 전체 학생수가 60명도 못되고 거기다 1학년은 단층(斷層)된 상황이다.

그러나 반금지역 조선족교육도 휘황한 때도 있었다. 반금지역내 조선족마을이 17개가 되면서 학교가 22개에 달하였다. 그리고 1998년에는 반금시조선족고중도 곁방살이하면서 3년간 꾸린적있다. 그러다 90년대부터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학교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 대와현 산하의 4개 조선족소학교가 대와현조선족중학교에 귀속되였으며 2008년에는 반금시교육국의 결정에 근거하여 반산현 산하 조선족중학교(초중)와 8개의 조선족소학교가 대와현조선족중학교와 통합되였다.



대와현조선족중학교는 1998년 대와현영흥향조선족중학교와 대와현평안향조선족중학교가 통합되여 설립된 학교이다. 당시 학생수 261명에 55명의 교사대오를 가진 반금시의 유일한 10년일관제조선족학교였다. 그러나 현급 관리로 하여 년령구조가 합리하지 못하고 로임대우가 낮고 출퇴근거리가 먼 등 문제들이 불거져나오면서 시급승격문제가 대두되였다. 반금시조선족 인대대표와 정협위원들의 적극적인 반영과 조선족사회의 노력으로 2013년 12월 26일 반금조선족사회의 오랜 숙원이였던 대와현조선족학교의 시급 승격문제가 드디여 해결되였다.

당시 학생수는 120여명이였는데 2년이 지난 반금시조선족학교의 학생은 50여명에 불과하다. 최근 3년 학생을 거의 모집하지 못하였다는 김룡남교장의 말이다. 해마다 여러 조선족마을을 돌아보지만 어찌할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고, 또 설상가상으로 교직원이 40여명이 되나 수학, 화학 등 전업교사가 곧 퇴직을 앞두고있어 온라인 등 수단을 다 동원하였지만 아직 모집하지 못하고있는데 전업교사도 조만간에 단층될 위기에 직면하고있다고 하소연했다.



반금시교사진수학원 민족교연부 리옥련주임은 학생수의 감소에 대해 부분 학생들이 부모를 따라 반금을 떠났거나 한족학교에 입학하는것외 입학생이 없는것이 주되는 원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반금지역에 고중이 없어 학부모들도 고중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수밖에 없는 정형이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현재 반금시조선족학교는 400명 학생 규모의 청사와 교수시설을 갖추었으나 학생수의 감소세, 교사대오의 로후화와 교사구조의 비합리성으로 지속적인 발전조차 운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고있다. 김룡남교장을 비롯한 학교지도부성원들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있다.



할일은 많고 책임은 막중하다

“반금조선족의 문화교육이 직면한 당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학교는 조선족사회의 미래발전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수 없다.” 반금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아래 시조협으로 략칭) 김운해회장의 말이다.

시조협은 2012년 6월 16일에 설립되였다. 반금지역에 조선족간부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조선족 인대대표와 정협위원들이 적어지는 현실에서 출범된것만큼 그동안 산재한 문제가 많았고 할일이 많았으며 책임 또한 막중하였다.

전 반금시교육국 민족교육과 과장 박상현씨는 “시조협은 학교와 마을을 만회했고 로인협회를 도와 조직기구를 개편하였으며 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과 함께 소수민족민속절을 개최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등 많은 일들을 해왔다”고 말했다.

소개에 의하면 시조협에서 조선족학교가 현급에서 시급체제로 승격되는데 조선족 인대대표와 정협위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선데서 끝내 상급의 허가를 받아내여 반금조선족사회의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2014년 왕가물로 하여 석산진 태평촌조선족툰이 1,000여무의 논에 물을 댈수 없어 페농의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협회 회장단이 마을에 입주하여 조선족을 로인협회 회장으로 선거하고(촌서기는 한족임) 수차 이 상황을 상급에 반영한데서 끝내 우물을 파서 제때에 물을 대여 벼농사를 보장할수 있었다. 그리고 로인협회가 있었지만 활동경비 부족으로 별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시조선족로인협회 김경호부회장은 “시조협이 설립된후 회장인선을 단행하여 시조협의 산하 협회로 만들고 활동경비를 지원하여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있다”고 소개했다. 시조선족로인협회는 현재 회원이 650여명으로 반금조선족사회 대형행사의 주력으로 되고있으며 14개 분회를 갖고있다.

박상현씨는 당면한 반금조선족사회의 어려운 현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90년대만 해도 시인대상무위원회 주임과 상무위원, 시민위 주임과 부주임, 정협상무위원에 다 조선족이 있었고 시의 여러 국 및 처에도 조선족이 있었는데 그들이 전근가거나 퇴직하면 한족이나 다른 민족 간부가 그 자리를 메우면서 현재는 거의 없다. 특히 반금시에 조선족이 만족 다음으로 많지만 시민위에 조선족이 없다. 그리고 조선족학교도 학생수가 줄어들어 문제가 심각하며 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에도 조선족으로 변관장 한사람이여서 조선족인재 영입이 시급하다.

김운해회장은 하루빨리 조선족기업가협회를 설립하고 협회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여 반금조선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에 최선을 다할것이라고 했다.



반금조선족은 어제는 바다물에 쪄든 개벌을 량전옥답으로 만들어 량질의 입쌀브랜드를 창조하였고 오늘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피페해가는 마을을 지키고 문화와 학교를 살리기 위해 부심하고있다. 이런 반금조선족사회를 보면서 민족구성원의 의무와 그리고 민족사회 책임자들의 책임과 사명감에 대해 다시한번 사고해본다.

기자 오지훈 김창영



출처:료녕신문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88%
10대 0%
20대 0%
30대 25%
40대 63%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13%
10대 0%
20대 0%
30대 13%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지난해 8월 비연예인과 결혼했던 가수 백아연이 이번에는 임신소식을 전해 많은 축하를 받고 있다. 지난달 30일, 백아연은 자신의 SNS를 통해 임신 5개월 차 초음파 사진을 공개했다. 그녀는 "저희 가족에게 선물같은 아기천사가 찾아왔다"며 임신소식을 전했다. 이어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브리트니 스피어스, 남친과 몸싸움 끝에 구급대 출동" 무슨 일?

"브리트니 스피어스, 남친과 몸싸움 끝에 구급대 출동" 무슨 일?

"브리트니 스피어스, 남친과 몸싸움 끝에 구급대 출동"[연합뉴스] 미국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42)가 호텔에서 남자친구와 몸싸움을 벌이다 가벼운 상처를 입어 구급대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미 CNN 방송과 연예매체 페이지식스 등이 2일(현지시간) 전했다.

"5살때 母 교통사고, 얼굴 몰라" 선예, 안타까운 가정사 고백

"5살때 母 교통사고, 얼굴 몰라" 선예, 안타까운 가정사 고백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자신의 가정사를 언급해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지난 2일 오후 방송된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시즌3' 에서는 2000년대를 강타한 걸그룹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출연했다. 이날 선예는 자신의 가정사를 언급하며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고 해

"자식들이 날 돈으로 봐" 전원주, 금 10억원치 있지만 '마음은 공허'

"자식들이 날 돈으로 봐" 전원주, 금 10억원치 있지만 '마음은 공허'

재테크 고수로 알려져 있는 배우 전원주가 "가족들이 나를 돈으로만 보는 것 같아 속상하다"는 고민을 털어놔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일 방송된 채널A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는 억대 자산가 국민 배우 전원주가 방문해 근황을 전했다. 이날 전원주는 오은영 박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