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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29]준의회의와 청강파 전적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10.17일 15:52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 (29)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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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홍군은 오강돌파로 수십만 적군을 오강 이동, 이남 지구에 뿌리치면서 단기휴식할 기회를 가지였다. 이 기회를 타서 중공중앙은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준의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통도회의와 려평회의, 후장회의는 준의회의를 위한 준비계단이였으니 력사적인 준의회의가 열리는 동안 양림과 무정은 명령을 받고 소속부대와 함께 준의성내에 주둔하면서 준의회의의 절대적인 안전과 성내 경위에 신경을 모았다.

준의에 머무르는 나날 양림과 무정은 중앙군위에서 소집한 퇀이상 간부회의에도 참가하였다. 퇀이상 간부회의는 준의 천주교회당에서 열리면서 준의회의정신을 전달하였다. 그날 모택동, 주은래, 주덕, 왕가상 등 동지들의 참석속에 장문천이 전달하였다. 준의회의 정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모택동동지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 락보동지가 결의를 작성하고 상무위원회의 심사를 거친후 지부들에 전달하여 토론한다.

3. 상무위원들 가운데서 다시 적당한 분공을 한다.

4. 3인단을 취소하고 최고군사수장인 주덕, 주은래를 군사지휘자로 하며 은래동지는 당이 위탁한, 군사지휘상 최후 결심을 내리는 책임자이다. 확대회의가 끝난후 상무위원들이 분공하며 택동동지를 은래동지의 군사지휘 방조자로 한다.

오늘의 준의회의기념관 전경

양림과 무정은 홍군장령으로 군위에서 소집한 퇀이상 간부회의에 참가하여 준의회의의 정신을 전달받으며 내심의 격동을 금치 못하였다. 모택동동지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보선함은 당중앙에서의 령도지위가 수립되였음을 의미하고 모택동동지가 군사상 주은래를 협조함은 중앙군위와 홍군에서의 령도지위가 수립되였음을 의미하니 중국혁명은 인젠 희망이 있게 되였다.

2010년 8월 19일과 8월 21일, 필자는 두번에 걸쳐 준의 도심에 자리한 준의회의기념관과 준의회의진렬관을 찾았다. 준의회의기념관에서 동쪽으로 가노라면 길이 200여메터, 너비 100여메터에 달하는 록화지가 나타나고 록화지를 지나면 수풀로 덮인 2층 푸른 기와집—준의회의진렬관에 이른다. 건축면적 6612평방메터에 달하는 진렬관은 전략전이, 준의회의, 적수를 네번 건너다(四渡赤水), 승리적 회사, 영원한 빛발 등 5개 단원으로 이루어지면서 사진그림자료 400여건, 문자자료 약 2만자가 전시되여 당년 준의회의와 회의전후 력사를 눈앞에서 보듯 펼쳐보이고있다. 제1단원의 “중앙홍군 장정초기 서렬표”에는 군위 제1종대와 종대산하 4개 제대(梯队)가 문자로 보여지면서 군위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과 정치위원이 조선인 무정으로 소개되여있었다.

준의회의는 실로 당과 홍군에서의 모택동의 령도지위를 확립하고 중국혁명사에서 극히 위험했던 력사적 시각에 당을 만구하고 홍군을 만구하고 중국혁명을 만구한 력사적회의였다. 조선인 무정과 양림이 소속부대와 더불어 준의회의의 안전과 성내의 경위를 맡아나섰으니 필자는 준의회의현지에서 큰 위안을 느끼였다. 무정과 양림은 실로 우리 겨레의 자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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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의를 현지답사하면서 준의 천주교회당에도 가보았다. 준의 천주교회당은 홍군이 준의에 머무르던 시절 홍군총정치부가 머무르던 곳으로서 오늘의 준의 홍화강구 로성양류거리(红花岗区老城杨柳街) 28번지에 자리하고있다. 관련 자료를 보면 이곳 천주교회당은 청나라 동치(同治)5년(기원 1867년), 프랑스 선교사 사부르(沙布尔)가 일떠세우고 경당(经堂)과 학당(学堂) 두 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점유면적은 만 3555평방메터이고 주위 네 면은 모두 담장으로 둘러졌다. 홍군이 준의에 들어선후 홍군총정치부 기관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주교회당은 오늘날 준의회의 장소를 찾는이들마다 찾아보는 관광명소의 하나로 되였다.

《준의회의회의장으로 가다》에 따르면 중앙홍군은 1935년 2월말, 3월초 기간 다시 준의성을 점령했을 때 당중앙은 준의 천주교회당에서 준의전역의 승리를 총화하는 한편 준의회의정신을 시달하는 홍군간부대회를 소집하였었다. 《준의회의회의장으로 가다》 이 책은 준의회의기념관에서 편찬한 전문 준의회의 소개서로서 회의하던 날 모택동, 장문천 등 지도자들이 보고하였다고 하면서 “홍군의 각급 지휘관들은 보고를 들은후 과거의 우려와 불만정서가 깡그리 사라졌다. 저저마다 통쾌하다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좌’경모험주의의 쓴맛을 본 홍군장병들로 말하면 이는 인심을 격동시키는 대희사였다.”고 밝히였다.

준의회의 정신을 전달한 당년의 천주교회당

준의회의후 중앙홍군은 세갈래(三路)로 나뉘여 귀주 서북부의 토성(土城), 적수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1935년 1월 27일, 전진중의 중앙종대와 3군단, 5군단 등 중앙홍군은 귀주 적수하반의 토성진에 이르렀는데 관련 정보에 따르면 사천군(川军) 곽훈기(郭勋祺) 부대는 토성진쪽으로 몰리면서 토성 동쪽 6키로메터쯤에 상거한 청강파(青杠坡)와 영안사(永安寺) 등 일대를 홍군 먼저 점령하고 그곳에서 중앙홍군을 섬멸하련다고 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은 즉각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청강파 일대의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우세한 병력으로 적들을 일망타진하기로 결의하였다.

1935년 1월 28일 이른새벽, 모택동 등은 청강파 부근의 대경상(大埂上) 산마루 지휘부를 지켜섰다. 대경상은 해발 1000메터를 이루는 민둥산-번들이마로서 이곳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면 토성진 서남의 수사파(水狮坝) 산기슭에 진을 친 중앙홍군의 진지들이며 산아래의 옛성 토성진이며 동남쪽 뾰족산과 마안산 사이 루풍오(漏风垭) 산어구며 산어구 동남쪽 청강파 일대며 모든것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이날 새벽 5시, 드디여 홍군대오는 토성 청강파에서 사천군과 격전을 벌리였다. 무정이 지휘하는 홍3군단 직속포병영은 산포와 박격포로 사천군 곽훈기부대 당영화(唐映华)퇀(唐团)과 원치(袁治)퇀(袁团)을 향해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홍군포병영의 맹공에 배기지 못한 당퇀이 후퇴하게 되자 원퇀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악에 받친 적 퇀장 원치(袁治)는 벌건 팔을 내젖히고 군도를 빼들고 독전하며 후퇴를 막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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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쯤에 사천군 료택려(廖泽旅)의 란퇀과 왕퇀 2개 퇀이 동황전(东皇殿, 오늘의 习水)쪽에서 청강파로 몰려와 곽훈기려 오른켠으로 다가드는 홍군부대를 막으며 원퇀을 지원하여나서고, 반려(潘旅)의 당명소퇀(唐明昭团)도 당퇀을 지원하여나섰다. 아군은 적 6개 퇀과 격전을 벌려야 했다. 오후에 잡아들어도 아군보병은 적들에게 점령된 뾰족산을 탈취하지 못해 홍군의 행동은 제한을 받게 되였다.

팽덕회는 눈앞의 적정을 주의하여 살피였다. 이왕의 전투경험에 의하면 길어야 3~4시간이면 전투를 결속지을수 있었는데 현실은 아니다. 반나절 푼히 싸워도 아군은 전과를 늘이지 못했을뿐만아니라 사천군 지원병이 륙속 몰려들면서 싸움은 갈수록 치렬해지고 적들은 한때 군위지휘부 루풍오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루풍오는 토성진과 토성진나루터와 2키로메터도 되지 않는 곳인데 사천군이 일단 루풍오를 점령하면 중앙홍군 예비대 집결지 수사파를 내려다볼수 있고 루풍오에서 박격포로 민둥산 산마루 대경상을 묘준하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팽덕회는 이 사실을 인차 총지휘부에 보고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모택동은 우리 홍군이 입수한 정보에 문제가 있음을 보아냈다. 포로한 적병을 통해 확인해보니 적들은 홍군이 알고 전투를 벌린 시초의 4개 퇀 6000여명이 아니라 6개 퇀 만여명으로 알려져 홍군이 전투에 투입시킨 병력과 비슷하였다. 모택동은 인차 북상중에 있는 홍1군단에 급령을 내려 돌아와 증원하도록 했으나 1군단은 그렇게 빨리 싸움터에 이를수가 없었다. 험악한 정세하에서 모택동은 군위종대 예비대로 웬간해서는 1선 싸움에 내세우지 않는 군위간부퇀에 출전명령을 내릴수 밖에 없었다. 군위간부퇀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련과 패급간부들로 조직되고 돌격보총과 철갑모, 군도로 무장한 무적의 대오이고 우리 홍군의 귀중한 재부였다. 이 무적의 대오속의 참모장 양림은 진갱퇀장, 송임궁정위와 더불어 총칼을 빼든 간부퇀결사대(敢死队)를 조직하였다.

적수하시 토성진에 일어선 사도적수기념관 정면

간부퇀결사대 진두에는 양림이 서있었으니, 양림은 결사대와 더불어 돌격보총에 군도를 휘두르며 앞장에서 돌진하며 때론 적들과 생사결단의 육박전을 벌리였다. 종래로 돌격보총과 철갑모로 전신무장한 홍군대오를 보지 못한 적들은 정신이 혼미했다. 더구나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서는 멈출줄 모르는 반돌격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이와 더불어 무정은 중앙군위와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의 명령을 받고 군단포병영 전체를 결사전에로 부르며 적의 주요진지와 적군 주요집거구를 련달아 박산냈다. 온 싸움터는 적아간의 포소리, 총소리, 아우성소리 천지를 진동하고 짙은 포연이 대지를 뒤덮었다.

1935년 1월 28일 벌어진 귀주 토성지구에서의 청강파전역은 홍군장정도중의 또 한차례 대혈전으로서 토성포전역으로도 불리우는 청강파전역전적지는 오늘의 귀주성 습수현 토성진 청강파촌에 위치하고있다. 토성진에서 동북으로 약 3키로메터 되는 곳으로서 지금 이곳의 한 산언덕에는 로홍군전사이고 중앙군위 원 부주석인 장진장군의 필체로 된 “청강파홍군렬사기념비”(青杠坡红军烈士纪念碑)가 우뚝 솟아있다.

오늘의 토성진은 귀주성 습수현의 한개 진으로서 사천성 고란현과 귀주성 적수시 사이 적수하 중류에 위치하고있다. 2011년 여름방학, 두번째로 운남, 귀주, 사천 등지 홍군장정길 답사에 나선 필자는 7월 15일 적수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고성진으로 달리였다. 택시가 한시간 좀더 달리더니 택시기사는 토성진에 이르렀다고 알린다. 그런 토성진은 적수시에서 남으로 70키로메터 떨어진 적수하반에 자리잡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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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토성진을 꿰고지나는 중심가—“사도적수기념관”(四渡赤水纪念馆)앞에 멈추어섰다. 사도적수기념관 주위는 온통 고색이 짙은 거리들이였다. 택시기사와 물으니 토성진은 유구한 력사를 가진 천년고성이라고 말한다. 그렇겠다고 머리를 끄덕이며 가까이 토성진 소개도를 보니 기원전 111년 서한 원정6년(西汉元鼎六年)에 이곳에 벌써 평맥현(平麦县)을 설치하여 그 력사가 이미 2000년을 넘기고있음을 가르치고있었다.

필자는 중국의 남방과 서남에서 때때로 보던 천년고성들에 이어 홍군장정답사길에서 또 하나의 천년고성을 대하니 탄복해마지 않았다. 서한 원정때로부터 1000여년이 흐른 후날 북송 대관3년에는 자주(滋州)로 되여 인회(仁怀), 승류(承流) 2개 현을 거느렸다고 하니 토성진의 력사적, 지리적 위치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옛 인회, 승류 2개 현 구역은 오늘의 인회시, 적수시, 습수현을 말한다. 그러다가 력사속 어느 시대에서 사라진 모양인지 원말명초에 당지 사람들이 집들을 개조할 때 숱한 토성벽들을 발견하면서 “토성”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간단한 유래나마 토성진의 유래를 알게 되니 여기저기 보이는 옛 거리들이 리해가 갔다. 력사가 오죽하면 오늘날 하나의 행정진밖에 안되는 진안에 “적수하 항운력사 전람관”, “토성고진박물관” 등 기념물들이 가득할가싶다. 이곳은 오랜 옛날에 이미 사천의 소금이 귀주로 들어오는 중요한 부두와 집산지였다니 그럴만도 하다.

그제날 청강파전역 현지에 일어선 청강파홍군렬사기념비

어디 그뿐인가, 천년고성인 이곳이 당년 중앙홍군이 모택동의 령솔하에 가까이서 청강파전역을 치르다가 감쪽같이 물러나 네번 적수하를 건넌 첫 도강지였으니 홍군의 첫 도강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이런 곳에 “사도적수기념관”을 비롯하여 모택동-주은래-주덕의 류숙지, 홍군총사령부-총참모부 옛터, 녀홍군기념관, 토성도강기념비, 홍군1차적수하도강지, 청강파전적지 등이 우후죽숙처럼 일어서니 토성진은 말그대로 오늘의 중국력사문화명진이요, 홍군장정의 찬란한 명주였다.

이날 필자는 귀주 토성진에서 토성진의 옛 거리와 “사도적수기념관”을 돌아보고 곧추 택시를 달려 토성진에서 동쪽 5~6키로메터 거리 산언덕에 웅장하게 일어선 “청강파홍군렬사기념비”를 찾았다. 바로 그제날 토성전역이라 불리우는 청강파전투자리였다. 여러 계단들을 톺으며 기념비아래에 이른 필자는 산언덕에서 주위를 일별하면서 홍군장정중의 청강파전투 모습, 양림의 모습을 찾아보고저 했다. 분명 보이지는 않으나 전투의 함성소리는 분명 들리는 시각이였다.

귀로에서 필자는 다시 토성진에 들려 적수하 강반에 자리한 제1차 적수하 도강자리와 토성도강기념비, 녀홍군기념관 등을 답사하였다. 사도적수기념관에서 양림의 이름 두 글자도 찾아볼수 없으니 서운했지만 홍군장정과, 양림과 관련된 중요한 토성기념지들을 두루 현지답사하였다는것이 중요하다고 보아진다. 70키로메터밖 적수시로 돌아오는 길에서 적수시에서 남으로 58키로메터 떨어진 적수하 제1차 원후 도강자리, 적수시에서 남으로 25키로메터 떨어진 병안 도강자리, 적수시의 “적수홍군렬사릉원” 등지도 찾아보았다. 여러날을 거쳐야 돌아볼수 있는 장정관련 현지들을 택시로 하루 낮도 안되는 사이에 돌아보았으니 시간을 많이 당길수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토성진 적수하 강반에 세워진 토성나루터 기념비. /이상 사진 2011년 7월 15일 현지촬영)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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