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7일(현지 시각) 서명한 '반(反)이민' 행정명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밝혔을 때보다 훨씬 큰 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행정명령은 '이민 국가' 미국의 정체성을 건드린 데다 가뜩이나 민감한 난민 문제 해법을 꼬이게 하면서 전 세계적인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척 슈머 상원 의원은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행정명령은 비열할 뿐 아니라 비(非)미국적이다. 이민자들을 환영해온 미국의 위대한 전통이 짓밟혔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감정적 언사를 자제하는 미국 정치권에선 이례적인 '눈물의 기자회견'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이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고 했다. 공화당의 거물인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 의원도 이날 공동성명을 내고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이슬람국가(IS)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들은 증오의 종말론적 사상을 거부하는 대다수의 무슬림"이라며 "이 행정명령은 테러리스트 모집을 돕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15개 주(州)와 워싱턴DC의 법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행정명령은 위헌(違憲)일 뿐 아니라 불법적"이라고 했다. 실제 뉴욕·보스턴·시애틀 등지 법원은 이번 행정명령으로 공항에 억류된 이라크인 등의 본국 송환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미국 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요 공항에서 시작된 시위는 뉴욕과 워싱턴DC에서 각각 1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로 확대됐고, LA와 휴스턴, 디트로이트 등에서도 수천명이 시위를 벌였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이란의 아스가르 파라디 감독은 오는 2월 26일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 불참을 선언했고, 노벨상 수상자 12명을 포함한 미국 학자 2000여명은 행정명령 반대 청원 운동에 참여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난민 수용의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며 "유럽은 우리의 입장을 확고히 정한 뒤 (트럼프 정부와) 단호한 대화로 세계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대변인을 통해 "테러에 맞서 싸운다고 할지라도 특정 출신 지역과 신념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혐의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며 트럼프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트위터에 "박해, 그리고 테러와 전쟁을 피해 도망온 사람들에게 캐나다 국민은 종교와 관계없이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트럼프의 국빈 방문을 반대하는 청원 서명자가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BBC가 30일 보도했다.
이번에 입국 금지 대상이 된 이라크·이란 등 7개국에선 "미국에 배신당했다"는 격한 반응이 나왔다. 이라크 의회는 "미국에 상응하는 보복 조치를 하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유엔난민기구(UNHCR) 등도 성명에서 "난민을 환영해온 미국의 전통을 지켜달라"고 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모든 난민의 입국을 일시 중단한 이번 행정명령으로 탈북 난민들도 입국할 수 없게 됐다"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9·11 테러 용의자들의 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 등은 이번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이들 국가는 모두 미국의 동맹국"이라고 보도했다. 나아가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에 제외된 사우디·인도네시아·UAE·터키·이집트 등의 무슬림 국가는 트럼프의 사업상 이익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시민단체의 주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진화 작업에 나섰다. 그는 성명을 통해 "언론이 알면서도 잘못 보도하고 있다"며 "이것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테러로부터 우리나라를 안전하게 하는 일이다. 이번 행정명령에 영향을 받지 않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나라가 세계에 40개국도 넘게 있다"고 했다. 백악관은 행정명령 강행의 뜻을 밝혔다.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비자 발급 중단 등으로 인한 혼란에 대해 "안보를 위해 치러야 할 작은 대가"라고 했다. CNN은 "외국인 방문객의 웹사이트와 소셜미디어 방문 기록, 휴대전화 연락처 등을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joyjune@chosun.com]
출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