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한민족 > 한민족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비밀의 숲에 있던 그 마을의 이야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9.06일 08:4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그곳의 기차역은 1936년 도문(圖們)-가목사(佳木斯) 노선을 부설하면서 생겼다. '임구(林口)'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져 기차역에 불리기 시작했다고 흑룡강(黑龍江)의 '성지(省志)'가 전한다.

  기실 '임구'라는 뜻의 '삼림의 입구(森林之口)'는 청나라 말에 벌써 생겼다고 한다. 그때 이 지역에는 수림이 바다처럼 일망무제했다. '임구'는 로야령(老爺嶺)과 장광재령(張廣才嶺)이 문득 합친 골짜기에 '삼림의 입구'를 만든 동네였다. 이 입구는 그야말로 누군가 창문에 달아놓은 공기통을 방불케 했다. 실제로 임구 시내의 이름은 한때 복판의 공기통이라는 의미의 중량자(中亮子)라고 불렸다고 한다.

삼림의 입구인 임구 기차역, 건물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그때 그 시절, 노(盧)씨의 가족이 반도에서 수천 리 밖의 이곳으로 허위허위 달려온 것은 넓은 만주 땅에서 공기통처럼 시원한 세상을 숨 쉬고 싶어서였다.

  "땅이 많고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임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노영길(55) 씨는 조부가 부친을 데리고 이 고장에 이삿짐을 내려놓은 이유를 이렇게 전했다.

  노영길 씨의 외가도 힘든 살길을 열려고 두만강을 건넜다. 독립군이었던 외할아버지를 붙잡기 위해 일본 군경이 시도 때도 없이 뛰어들어 늘 집을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한다. 숨통이 확확 막히는 그 세상을 떠나 외조모는 세 살짜리의 모친을 등에 없고 무작정 만주로 향했다.

  약 90년 세월이 지나 이민 제2대의 노영길 씨는 임구 철도부문의 관리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소설처럼 힘들고 곡절적인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마침내 철길 위에 즐거운 여정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양철지붕의 옛집에서 기념사짐을 남긴 노영길 씨.

  노영길 씨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임구 기차역에서 북쪽으로 약 20리 떨어져 있었다. 임구의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하량자(下亮子)라고 불렸다는 고성진(古城鎭)이었다. 예전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어서 동네가 임구보다 더 컸다고 노영길 씨가 밝히고 있었다.

  "지난 70년대에 비행기 격납고랑 폭파했는데요, 지금은 다 밭으로 되었습니다."

  옛날 옛적의 그 이야기가 모두 땅 밑에 사라진 게 아니었다. 노영길 씨는 고성진에 아직 남아있는 양철지붕의 흙집을 안내했다. 8.15 광복 전까지 일본인이 살고 있던 옛집이었다. 노영길 씨는 어린 시절을 바로 이 양철지붕의 흙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시멘트와 벽돌의 수풀에 가려 볼품이 없는 양철지붕의 흙집이지만, 그때로서는 시골의 별장처럼 유표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양철을 지붕을 덮어씌우는 작업은 단 1회로 끝날 수 있었지만 초가는 해마다 새 볏짚으로 새끼를 꼬고 이엉과 용마루를 엮어 지붕에 올리는 작업을 신물이 나도록 반복해야 했다.

이순길 촌장이 촌민위원회 사무실 밖에서 명단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인이 지붕에 양철을 올리던 그 무렵 고성진에는 조선인이 이주하면서 자연촌락이 생기고 있었다. 1930년대 이씨와 권씨, 양씨 등이 처음으로 고성진에 이삿짐을 풀었다고 한다. 이렇게 생긴 조선족 마을은 훗날 고성진의 여타의 마을과 더불어 그 무슨 부대처럼 각기 아라비아 숫자를 달아서 5촌(村)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때 새로 부설되는 임구의 철도 연선에는 이처럼 조선인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고성진의 동북쪽 아하(亞河) 역과 청산(靑山) 역 부근에도 1930년대 후반부터 2백여 세대의 조선인들이 화평촌(和平村) 등 4개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임구가 소속한 목단강(牡丹江)은 남쪽으로 경계선을 넘으면 조선인(족)이 집거하고 있는 연변이다. 다시 남쪽으로 연변을 건너 국경선을 넘으면 두만강 저쪽의 조선의 땅이다. 이로 하여 목단강에는 흑룡강성의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조선인(족)이 많았다. 목단강에는 조선족이 12만여 만 명이며 37개 소수민족의 가운데서 인구가 제일 많은 것으로 제6차 인구전면조사(2010)에 의해 밝혀졌다.

주인 없는 빈 집이 임대물 고지서가 걸려있다.

  이순길(59세) 씨의 부친 이달춘은 원래 조부를 따라 아하 지역에 이주했다. 워낙은 남쪽 연변의 왕청(汪淸)에서 살다가 이 임구의 삼림에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이순길 씨의 외가도 왕청에서 아하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뒤미처 그들은 이삿짐을 둘러메고 도망하듯 고성진으로 이주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있은 일이었다. 그들처럼 아하와 조령(刁嶺) 일대에서 피난민들이 밀려오면서 고성진의 조선족 마을은 100여 가구로 급증했다.

  "그곳에 토비가 욱실거렸다고 하는요. 아버지는 토비 굴에 잡혀갔었다고 하지요."

  동북은 역사상 토비가 제일 창궐한 지역이었다. 토비가 제일 많을 때 무려 2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목단강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 조선 3국의 접경지역으로 토비우환이 더구나 심했다. 임구현의 경우 1945년 12월 토비로 인해 현(縣) 정부는 부득이 목단강시로 철거하기까지 했다. 소설 '임해설원(林海雪原)'은 8.15 광복 후 바로 목단강 유역에서 토비들을 숙청하던 실재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참고로 1946년 9월부터 1948년 5월까지 임구현에서만 도합 1만 4천여 명의 토비가 섬멸되었다고 하는 관방의 문헌기록이 있다.

  동북의 조선인 마을에는 토비의 피해가 유달리 심했다. 괴뢰 만주국(滿洲國, 1932~1945) 때 일본은 민족을 차별화하고 배급을 달리하는 등 민족갈등을 의도적으로 유발했다. '2등 국민' 조선인과 '3등 국민' 중국인의 갈등은 일제가 패망한 후 토비들이 조선인마을을 습격하는데서 표출되었다. 토비들은 조선인 마을을 제멋대로 약탈, 살인하는 등 그동안의 묵은 감정으로 보복했다.

  토비들의 수중에서 마을과 땅, 사람을 지키기 위한 동북 조선인들의 의지는 공산당의 군대에 용약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국공내전 말기까지 조선인은 약 6만 3천 명 참전, 조선족 인구의 약 5%를 차지했다. 반면 국민당의 군대에 참전한 조선인은 극소수였으며 별도의 조선인부대는 없었다. 임구 경내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동북민주연군의 직속부대인 3개의 독립사단에 편입, 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로 되어 대륙 남부의 해남도(海南島)까지 진군하였다. 와중에 고성진 5촌의 한룡운은 대공을 여러 번 세워 '인민의 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촌사(村史)에 기록한다.

  정작 토비를 지척에서 만났던 이달춘은 토비라는 이름조차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 이순길 씨는 부친 이달춘에게 그와 '토비'를 한데 이을 이야기를 한 토막도 찾지 못한다고 회억하고 있었다.

  그럴 법 했다.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이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1968년 국민당 간첩과 일본 간첩, (구)소련 간첩을 잡아내고 해방 전의 변절자를 잡아내는 운동이 중국 전역에 일어났다. 대륙 북쪽의 숲에 숨은 고성진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족마을 5촌에는 밤에 낮을 이어 군중대회를 소집하고 적발, 비판하는 고조가 일어났다.

  이달춘은 난데없이 '토비' 감투를 쓰고 회의장에 끌려나와 비판을 받았다.

  "그토록 잔인한 토비에게 잡혔다는데요, 토비 소굴에서 쉽게 도망했다니 그걸 믿을 수 있겠습니까?"

  증거라곤 없는 이 엉뚱한 감투는 오랫동안 이달춘의 바위처럼 머리를 지지눌렀다. 1969년 가을 현에서 공작대가 파견되어 조사를 한 후 비로소 '토비의 무리에서 탈출하여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

  고성진 조선족 마을의 자랑거리도 실은 '해방'이라고 이순길 씨가 거듭 말한다. 이순길 씨의 회억에 따르면 1970년대 마을에서는 구리를 제련하고 폐품 타이어를 수집하여 재활용품으로 이용했다. 그때 그 시절 부근 동네에서 너남 없이 부러워했던 마을의 '돈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다종경영은 가정부업과 더불어 자본주의로 간주하던 '문화대혁명' 때 정말로 기존의 틀을 탈피한 '해방' 그 자체였다.

  그들 조선족 마을은 또 1982년에도 임구현에서 선참으로 음식업 등 봉사업으로 치부의 길에 오른 마을로 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1982년부터 일명 '도거리'라고 하는 가정연대책임제(家庭聯産承包制)가 시작되고 있었다. 5촌의 촌민이 남보다 먼저 고성진 중심거리에 음식점을 꾸렸고 또 현소재지 기차역 부근에 음식점을 세웠다. 농한기에는 마을의 20%나 되는 인력이 음식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도시진출, 해외노무 등과 더불어 마을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을에 호적상으로는 70여 가구에 3백여 명의 인구가 있어요, 실제는 10여 가구의 20여명 인구가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이순길 씨는 이렇게 마을 가계부를 밝히고 있었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노인들뿐이라고 한다. 촌장 이순길 씨는 명실공한 '양로원' 원장으로 되고 있는 셈이었다.

  5촌의 이 실태는 소속된 임구현의 일각이었다. 1982년 임구현은 조선족 인구가 공화국 초기의 1953년의 3,667명에 비해 훨씬 늘어난 7,801명에 달했다. 그러나 1982년을 시점으로 도시진출과 해외노무가 전격 진행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기 시작했다. 불과 20년 후인 2000년 임구현의 조선족 인구는 6,616명으로 줄어들었다.

  와중에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고성진 북부의 아하 지역은 워낙 산간지대여서 저온냉해가 심했다. 벼농사에 재미를 잃은 조선족 농부들은 1958년에 벌써 48가구로 급감, 아하촌(한족마을)의 촌민소조로 소속되면서 개척민이 물려준 '화평촌'의 촌명을 상실했다. 이 작은 동네마저 2003년 그때 벌써 6가구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방기록물인 '임구의 조선족'을 편찬했던 한문일 씨는 마을 토박이의 말을 인용, 임구 서남쪽의 옛 조선족 마을인 조양촌(朝陽村)을 '정거장 마을'이라고 일컫고 있었다. 이민들이 마치 이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처럼 한두 해 머물다가 더 좋은 타고장으로 뿔뿔이 떠나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혁과 개방 초기는 1983년, 조양촌은 41가구로 큰 덩치를 자랑했지만 약 20년 후인 2002년 조선족 인구가 12세대로 줄어들었다. 대신 타민족 농가가 13세대로 늘어났다고 한다.

  조선족 마을의 학교가 줄어든 건 조양촌 마을 뿐만 아니다. 이순길 씨는 고성진 2촌의 복판에 있던 마을의 조선족소학교도 사라진지 오래다고 말한다.

  "학생이 적으니 교육 수준도 낮아져요. 모두 시내의 한족학교로 갔어요."

  마을의 학교 건물은 오래전에 벌써 농부 몇몇에게 매입되어 있었다. 구경을 하려고 바깥 사립문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 주인이 자물쇠를 채우고 어디론가 외출했던 것이다. 문을 채우고 비운 집은 한둘 아니었다. 부근의 아파트에 이주하거나 아예 도시로 자리를 뜬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웃한 한 조선족 마을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빈자리를 채우면서 촌장도 조선족이 아닌 한족으로 되었다고 한다.

  임구현은 1986년 일부 조정과 합병을 거쳐 조선족 마을(행정촌)을 도합 15개로 구성했다. 그러나 불과 5년 후 다시 6개 향과 진의 10개 마을(행정촌)로 거짓말처럼 크게 줄어들었다.

  "다른 마을도 그렇지만요, 우리 마을도 예전처럼 그렇게 흥성할 것 같지 못합니다."

  이순길 씨의 말을 따른다면 옛 마을은 임구에 사라진 옛 숲처럼 비밀의 옛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 정말로 고성진의 조선족 마을 역시 그 '정거장 마을'처럼 누군가 잠깐 들렸다가 가는 마을이던가.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88%
10대 0%
20대 0%
30대 63%
40대 13%
50대 13%
60대 0%
70대 0%
여성 13%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13%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가수 폴킴이 9년 만난 연인과의 결혼 소식을 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5일, 폴킴은 공식 홈페이지 '폴킴 스토리'를 통해서 손편지로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이날 그는 "폴인럽에게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 글을 적는다"며 입을 열었다. 그는 "어떤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길림성, 로인 외국인 위한 지불 써비스 향상

길림성, 로인 외국인 위한 지불 써비스 향상

4월 25일, 길림성정부에서는 소식공개회를 개최해 근일 발표한 〈지불 써비스를 한층더 최적화하고 지불 편리성을 향상하기 위한 실시 방안〉에 대해 소개했다. 해당 ‘실시 방안’은 의 모바일 결제에 익숙하지 않은 로인과 외국인 방문객들이 결제를 편리하게 할 수 있

연변대학MPA 교육센터 '제8회 중국 대학생 공공관리 사례 대회'서 눈부신 성적 안아와

연변대학MPA 교육센터 '제8회 중국 대학생 공공관리 사례 대회'서 눈부신 성적 안아와

4월 21일, '제8회 중국 대학생 공공관리 사례 대회'가 북경중국과학원대학 안치호 캠퍼스에서 막을 내렸다. 김수성교수가 수상단위를 대표해 우수조직상을 수상하고 있는 장면. 연변대학 MPA교육센터 교사와 학생 팀은 이번 대회에서 이채를 돋구면서 여러가지 눈부신

제12기 '배협컵' 광동성조선족배구경기 개최

제12기 '배협컵' 광동성조선족배구경기 개최

광동성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이 휴일을 리용해 친목을 도모해주기 위한 제12기 '배협컵'광동성조선족배구경기가 지난 4월 20, 21일 이틀간 광동성조선족배구협에서 주최로 광동성 혜주시에서 열렸다. 250여명 선수가 녀자 20개팀, 남자 11개팀으로 구성해 열정과 실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