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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후 윤수범선생의 다채로운 삶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9.10일 14:55

2011년 10월 3일 화피창렬사릉원을 찾은 윤수범선생과 그의 부인

누가 퇴직후의 삶을 사막이라 하였던가? 아니다,그것은 날마다 새로와지는 달콤한 오아시스이다.

누가 퇴직후의 여생을 성 쌓고 남은 돌들의 허랑한 삶이라 하였던가? 아니다, 그것은 로쇠와 싸우면서 인생의 크라이막스를 엮어가는 다채로운 삶이다.

퇴직간부 윤수범(75세)선생이 바로 이런 다채로운 로후생활을 엮어가는 분이다.

윤수범은 1961년에 길림대학 법률학부를 졸업하고 선후 신강위글자치구 카라마이시 인민검찰원 비서, 왕청현인민법원 간부, 왕청현공안국 부교도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검찰원 검찰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인민법원 원장,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내무사법위원회 부주임위원, 정청급 순시원 등 요직에서 사업하다 1999년 4월에 정령 퇴직했다.

그는 재직때에도 인민의 참된 공복이였다. 위의 4분의 3을 절제하고 후유증으로 앓으면서 30년 끈질기게 사업하였다. 그는 집법, 치법, 립법 등 일련의 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고 열심히, 보람있게 떳떳하게 살아온 인민의 훌륭한 조선족법관이다.

1999년 상반년 60세에 퇴직한 윤수범선생은 여느 퇴직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로후를 보낼것인가하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였다.

인생의 3분의 1은 로년생활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신체상황으로 보아 오래 살 자신이 없지만 그렇다고 허송세월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이때 그의 머리속에서는 1995년 당시 길림성위 서기였던 장덕강동지가 성직속기관 간부대회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컴퓨터를 다룰줄 알아야 하고 외래어를 알아야 하며 차를 운전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모르면 장래에 현시대의 간부자격이 없습니다.》 그때는 장서기의 이 말씀이 《너무나 실제를 떠난 말이 아닌가?》고 의심하였다.

그런데 형세는 급속히 발전하여 불원간에 컴퓨터와 승용차들이 개인집에까지 들어간 현실을 지켜보면서 장덕강동지의 연설이 얼마나 원견성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그는 퇴직을 앞두고 현시대의 로인답게 건강을 돌보는 토대우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락관적으로 보람있게 로후를 살아야 하겠다고 다지였다.

그때로부터 어언간 15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 그의 위병, 심장병, 뇌혈공급부족, 전립선염 등 만성병이 더 심해졌고 골다공증으로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갑상선수술을 받고 심장에 심박조률기를 넣었다. 그는 거의 해마다 한두번씩 입원하여 각종 질병과 싸우며 풀대같이 가냘픈 몸으로 락관적인 로후를 살면서 두가지 큰 일을 해내고 두가지 새 기술을 배워냈다.

40만자나 되는 장편회억록 조선어와 한어로 출판

그에게는 지나온 일들을 책으로 엮고싶은 생각이 언녕부터 있었다. 재직에 있을 때는 시간이 없었거니와 저명한 인물도, 영웅인물도 아닌 자기가 이런 책을 쓴다는것이 너무나도 주제넘는 일인것 같아 종시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나 퇴직하고 꼼꼼히 생각해 보니 훌륭한 사람, 총명한 사람, 높은 차원의 선진인물로 되려고 평생을 노력하고 분투해 온 그 과정이 바로 자기의 인생이란것을 알게 되였다. 또 그 과정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갈수만 있다면 법률박사공부도 하고 외래어도 많이 배우고 지구를 활무대로 법에 관련한 사업을 많이 하고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할수없는 자기로서는 좋은 세상을 만난 후대들에게 건국이래 우리 나라의 법제사를 이야기 하고 자기의 법률인생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의법치국에 저그마한 도움이라도 주고싶은것이 그의 바램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1998년 9월부터 필을 들어 짬짬이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그는 진실성에 모를 박았다. 그는 평소에 일기를 쓰고 학습필기를 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책을 쓰려고 그런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아끼고 보람있게 살기 위해 자기 발자취와 흔적에 신경을 기울였기때문이다. 여러 곳을 전근하면서도 보관한 자료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기록들이 사실을 진실하게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 이밖에도 많은 력사자료들을 학습하고 수집하였다. 대학시절의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하여 근 한달동안 길림성도서관에 박혀있으면서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길림일보》를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책을 쓰는데 필요한 력사자료인 《중화인민공화국실록》(5권), 《중국조선족발자취》,《연변조선족자치주지》,《길림대학지》,《카라마이지》,《화룡현지》 등 책도 수집하고 학습하였다. 자기의 생애가 주어진 력사배경속에서 고찰하고서야 자기 인생을 더욱 진실하게 재인식할수 있었다.

그는 책에 쓰는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기의 소감을 진실하게 쓰려고하고 절대 허위적으로 분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진실성을 바탕으로 사상성, 자료성, 지식성, 취미성을 부여하기에 주의를 돌렸다.

그는 이렇게 끈질기게 달라 붙어 장장 5년간의 품을 들여 2003년 9월에 회억록 《법률과 나의 인생》을 북경민족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리정문 부주임은 《법률과 나의 인생》은 정말 한번 읽어 볼만한 책이라고 하였다.

2004년 3월 7일에 있은 《법률과 나의 인생》 출판기념회에서 사회자로 저명한 시인이며 《장백산》잡지사 사장으로 있던 남영전은 《<법률과 나의 인생>은 우리 조선족들에게 공부하고 또 분투해야 한다는 정신적의미지를 심어주었으며 인품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유익한 인생 참조이고 또 우리 민족의 발전과 부흥, 그리고 우리 민족문화를 고수하는데 있어서 력사적인 가치가 있다. 더욱 많은 분들의 자기 인생을 자서전 또는 회억록으로 쓰는 일을 제창해야 한다》고 하였다.

윤수범선생은 책 후기에다 이 책은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 보귀한 삶을 영위하고 후세에 남기는 선물》이라고 썼다.

그렇다, 《법률과 나의 인생》은 연변인민출판사 월간잡지 《법률과 사회생활》 2004년 1기로 부터 2006년 10기까지에 련재되면서 보귀한 정신적 재부로 후대들에게 널리 전파되였다.

그리고 2009년 11월에는 한문으로 번역된 이 책이 연변인민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였다.

그는 선후 근 10년간의 품을 들여 이 두부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자기의 전반생을 정리하여 후대들에게 진귀한 정신적 재부를 남기였으며 글을 쓰고싶던 자기의 오랜 소망도 로후에야 풀게 되였다.

변호사 법률고문 맡고 법률봉사에

퇴직한후 윤수범선생은 풍부한 법률지식과 법률사업경험에 근거하여 변호사와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로년세계》잡지 등 여러 부문의 법률고문을 맡고 적극적으로 법제교육에 참가했으며 법률자문에 해답을 주었고 많은 의난 법률문제를 처리해 주면서 당사자들의 리익을 수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돈화림업국 림모는 집을 헐고 이주할 때의 계약분쟁으로 13년동안이나 송사를 했다. 윤수범은 이 사건을 8년 9개월이나 추적해 2010년에 끝내 림업법원계통의 1심, 2심, 재심 재판을 뒤엎고 당사자에게 경제손실보상비 170 여만원을 찾아 주었다.

2005년 상반기에 변방부대와 공안기관에서 한국으로부터 장춘공항을 통하여 중국으로 돌아오는 로무일군들에게 1000원에서 5000원에 이르는 벌금을 안긴 사건이 있었다.

2005년 한국법무부에서는 중국조선족로무일군들이 한국에 불법체류하는 상황에 근거해 2005년 3월 5일부터 8월 31일까지 주동적으로 귀국신청하면 재차 한국에 입국해 취업할수 있다는 새로운 정책을 반포했다.

그런데 길림성공안청 형사지대에서는 귀국하는 약 수백명 조선족로무일군들에게 《비법월경》이라는 터무니 없는 명목으로 1000원에서 5000원의 벌금을 안겼다. 공안기관에서는 벌금을 시킨후 그중 일부분 벌금액을 변방검사소에 나누어 주었다. 지어 3월 16일부터 5월 중순까지 170명 중국조선족로무일군들에게 벌금을 시키고는 벌금령수증과 행정처벌문서를 주지 않았으며 어떤 집법일군들은 욕하거나 손을 대기까지 하였다.

중국조선족로무일군들과 가족들은 이런 상황을 다투어 《길림신문》편집부와 해당 부문에 반영하였다. 길림신문사에서는 윤수범선생에게 법률자문을 하였다.

윤수범은 변호사들을 조직해 이 문제에 대한 연구토론회를 열었다. 변호사들은 이런 벌금은 행정처벌법을 위반했으므로 마땅히 시정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했다. 윤수범은 이 사건이 파급면이 넓고 시간상 긴박하기에 시급히 해당 기관과 책임자에게 반영해야 하며 종합처리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길림신문사 편집부와 함께 《변방검사소에서 마구 벌금시켜 수많은 물의를 일으켰다》는 글을 써서 법률각도로부터 집법기관에서 벌금시킨 행위의 위법성, 엄중성을 천명하였으며 군중의 목소리를 반영하였다. 이 글을 길림신문사 남영전 사장은 《내부참고》에 실어 성장판공실과 길림성연성환경판공실, 길림성당위 기률검사위원회, 길림성공안청 등 부문에 보냈다.

길림성당위, 길림성재정청 등 단위에서는 련합조사조를 무어 반영된 문제들을 조사했다. 길림성공안청 책임자는 이 문제를 매우 중시하고 직접 벌금 당한 로무일군들을 만났고 특별조사조를 조직해서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사를 거쳐 제기된 문제가 대체상 사실에 부합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길림성공안청에서는 해당 단위와 일군들을 정돈하고 120 여명 조선족로무일군들에게 벌금당한 돈을 돌려 주었다.

돈을 되찾은 조선족로무일군들은 주동적으로 길림성공안청과 길림신문사,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에 축기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윤수범은 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의 법률고문이였는데 그해 년말에 선진사업일군의 영예칭호를 받았다.

길림시 화피창렬사릉원에는 고점자 전투와 전오가자 전투에서 희생된 654명의 중국인민해방군 156사의 혁명렬사들의 유체가 모셔져있다. 대부분이 조선족 렬사들이였다. 이 릉원은 1948년 4월15일에 건립되였기에 60 여년이 지난 오늘 상급에서 관리비용도 내려주지 않은데다 관리가 따라가지 못해 기념비가 황페하기 그지 없었다. 로전사들과 렬사유가족들, 사회인사, 중소학교학생들은 청명과 추석에 렬사들을 추모하러 왔다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군 했다. 로전사, 렬사유가족, 윤수범선생을 비롯한 장춘의 조선족사회인사, 렬사유가족 등은 렬사릉원을 잘 수건하고 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애국주의교양기지로 건립할것을 제기하였다. 렬사유가족과 로전사들의 간곡한 념원을 안고 윤수범은 2007년1월에 주동적으로 장춘과 길림, 연변 등지의 8개 사회단체와 련계해 《화피창렬사릉원을 수건하고 관리를 강화할데 관한 건의》를 작성해 길림성 제11기 제1차인민대표대회에 보냈다. 성인민대표 조춘자는 이 건의를 정식으로 성인민대표 건의안 제164호에 넣고 해마다 대회에서 건의안을 재촉했지만 진전은 늘이였다.

2010년 12월 23일 윤수범은 개별적으로 《화피창렬사릉원보수개조는 언제 가야 준공될수 있는가?》라는 글을 써서 길림신문사에 보내 《내부참고》에 실어서 성과 길림시 해당 부문 지도일군들에게 보냈다. 그는 또 직접 화피창렬사릉원에 여러 번 찾아 가서 보수상황을 알고 성민정국과 성인민대표대회 해당 부문, 그리고 길림시창읍구 민정국에 찾아가 보수상황을 반영하고 건설적인 건의를 제기했다.

2010년과 2011년에 《화피창렬사릉원을 수건하고 관리를 강화할데 관한 건의》는 성인민대표대회 10대 중대건의안에 들어갔다.

2011년 하반기에 성인민대표대회의 중시와 길림시창읍구 정부의 노력으로 화피창렬사릉원 보수가 대체상 끝냈으며 릉원관리는 화피창진에서 길림시 창읍구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장춘시조선족사회에서는 새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마다 청명, 추석이면 화피창릉원을 참배하는 전통을 이어왔다. 그런데 근년에 점차 그 열이 식어가며 2013년에는 어느 단체도 릉원에 가 보지 않았다 한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윤수범은 여러 모로 의견을 제기하여 이런 현상을 시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14년 청명에는 길림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와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위원회의 주최로 장춘시 각계 조선족 사회단체 대표들과 장춘시조선족중학교학생 100여명이 화피창렬사릉원을 참배하였다. 그 규모와 형식은 왕년보다 더 성대하였으며 감동적이였다. 주최측에서는 화피창전투와 릉원을 기록한 선전책자를 참여자들에게 일일이 배포하였다. 장춘시조선족중학교에서는 금후 매년 청명절에 초중에 입학한 학생들을 동원하여 화피창렬사릉원을 참배하고 애국주의교육과 민족력사에 대한 교육을 계속 이어 가련다고 하였다.

중앙인민방송국, 길림신문사의 기자도 성묘상황을 취재하고 널리 보도하였다. 각 단체들에서는 이번 활동을 적극 추진한 윤수범동지를 이구동성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윤수범은 화피창렬사릉원 보수와 혁명전통 교육에 마멸할수 없는 공로를 세웠다.

윤수범은 변호사로 있으면서 여러 부문의 법률고문을 맡고 법제교육에 적극 참가했으며 법률자문을 받아들였고 각종 의난법률문제들을 처리했거나 해답을 주면서 말 그대로의 《법률인생》으로 사회에 기여하였다.

만년에 컴퓨터를 배우다

윤수범은 발전하는 시대를 따라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퇴직한 이듬해인 2000년에 컴퓨터를 사놓고 300원 학비를 내면서 전문 컴퓨터학습반의 훈련을 했다. 그러나 정작 단독으로 컴퓨터앞에 앉아 조작하자니 서툴기 그지 없었다.

《부지런히 실천하면 배워낼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는 타자를 배우는 한편 책을 쓰기 하였다. 조선문타자는 자모여서 한어 타자보다 간단하고 배우기 쉬웠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페지를 타자하기도 힘들었는데 매일 일기를 타자로 쓰며 《법률과 나의 인생》 책 한권을 매일이다싶이 타자하다보니 늙은이 손에서도 타자가 제법 슬슬 잘 되여 나갔다.

인테넷은 조문판 《법률과 나의 인생》이 출판된 다음인 2003년 년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넷을 사용하면서부터 그의 지식령역은 신속히 넓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각종 자료들을 찾으며 이메일을 통하여 통신련락을 하며 자기가 쓴 원고를 제때에 매체에 발송하는 등 면에서 생각밖의 편리를 보았다. 인터넷에 사전도 있고 각종 법률문건도 구전하였다. 생소한 글자나 단어를 찾기 위하여 또는 법률조문을 찾기 위하여 별도로 힘들게 책에서 찾을 필요없이 컴퓨테에서 직접 찾을수 있었다. 변호사사업에 종사하면서 출정하여 변호하거나 대리인으로 나설 경우, 사건 및 증거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정리 분석하며 관련되는 법조를 인터넷에서 찾아 사건과 대조 연구하며 법정발언제강도 컴퓨터에 적어넣고 출정하니 상상밖으로 편리하였다. 지금은 법원에서 개정할 경우, 법정참여자들의 발언이 직접 록음되고 그자리에서 타자 되여 나온다. 영사막에 개정영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현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특점은 컴퓨터의 보급이라고 생각했다. 컴퓨터는 지식의 해양으로서 컴퓨터조작수준을 제고하는것은 다양한 지식을 섭취하는 지름길이다. 컴퓨터에서 한가지 조작방법을 더 배우면 그만큼 지식분야가 넓어지고 또 그렇게 배우는 재미로 살아가는것이 그는 행복스러웠다. 그래서 컴퓨터는 그와 떨어질수 없는 딱친구로 되였다.

로인님들은 력사적 원인으로 젊어서 배우지 못한 탓으로 늙어서 힘들게 컴퓨터를 배운다. 그래도 배우고 나면 늙어서도 현대화의 성과를 향수할수 있고 젊은이들과 공동 언어와 공동 즐거움이 있어 세대격차를 줄여주기도 한다.

그는 컴퓨터를 배운것으로 해서 온 천하를 얻은듯한 뿌듯함을 느끼고있다.

운전 배우다

재직에 있을 때 그는 다년간 지도자의 신분으로 승용차에 앉아 다니며 사업하였다. 그때 운전수들의 능란한 운전솜씨를 보면서 그도 자동차운전을 배우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온 기관에 몇대밖에 없는 승용차는 아주 귀중한 국가재산이여서 운전수 외에는 누구도 함부로 운전할수 없다는 규률이 있었다. 지도간부는 규률집행의 모범이 되여야 하므로 운전을 배우려는 생각을 접을수 밖에 없었다.

2004년에 그는 관심병으로 입원치료를 받았다. 출원하면서 관심병에 걸린 사람이 음주해도 되는가고 물었다. 의사는 《적당히 마시면 되지만 과음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반주술에 습관되여 얼근한 《얼량》쯤은 들어가야 시름을 놓는 편이였다. 《적당히》란것이 그에게서는 지키기 어려운 계선이였으므로 차라리 술을 딱 떼기로 작심하였다.

그 무렵에 70이 된 공상은행에서 행장으로 있었던 김창옥이 자동차면허증을 탔다고 무등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그도 부러워 났다. 법률을 배우고 줄곧 기관에서 사업해 왔으므로 손재간도 없거니와 기술과는 거리가 멀므로 기술함량이 있는 자동차운전을 배운다면 유감스러운 한구석을 메울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9일에 그는 1500원을 내고 회통자동차학교에서 차운전을 배우게 되였다. 그날 일기에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인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희망과 동력이 생겼다.》

약 두달반의 학습을 거치고 2005년 1월 20일에 마지막시험을 쳤다. 시험내용에는 리론시험, 주차운전시험, 도로운전시험 등 세가지가 있었다. 도로운전시험을 칠때 처음엔 서투른 솜씨에 어름거리다 가동하여 1단에서 2단으로 제꺽 들어가지 못하여 몇메터도 나가지 못하고 《내리시오!》라는 시험관의 엄한 호령과 함께 락방되였다. 둬주일후에 다시 시험을 치자고 차에 오르니 시험관이 《이렇게 나이 들어서 운전시험이 다 뭡니까? 다른 사람이 모는 차에 앉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기분 잡친 말을 던졌다. 나중에 시험관은《합격은 되였습니다.그러나 면허증은 받아도 차는 몰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윤수범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돌아오면서 《흥, 두고 보자 나는 앞으로 꼭 차를 몰것이고 몰아도 훌륭히 몰것이다!》라고 속다짐하였다.

면허증을 탔으나 그에게는 차가 없었다. 그는 아들의 업무용차를 빌어서 련습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2005년 설기간에 아들 내외간이 연변으로 나간 틈을 타서 처음으로 아들의 회사에서 사용하는 미니봉고차를 몰고 밤낮으로 련습을 했다. 혼자서 차를 몰고 길에 나서니 처음엔 당황하고 손발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2월 11일에 차를 몰고 대학동창생들의 집에 놀러 다니다가 그만 골목길에서 가로수의 아지를 꺾으면서 후퇴하는 바람에 차의 《궁둥이》에 사발만한 상처자국을 남겼다. 3일 후엔 어느 한 도로교차점에서 정차한다는것이 브레이끼를 제대로 밟지 못하여 차가 천천히 밀려 나가면서 점잖게 서있는 앞차의 궁둥이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두주일 후엔 성로간부호텔 앞마당에서 좌회전을 한다는것이 그만 정차하고있는 남의 차 《옆구리》를 슬쩍 《헤딩》하여 경미상을 입혔다.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세번이나 재국을 치면서 아까운 돈도 없애고 남에게 미움도 받고나니 마음이 착잡하고 어깨가 더욱 쳐지는 느낌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초학자의 서투름을 자기로서도 모르는바가 아니여서 련습을 더욱 늦추지 않았다. 아들의 업무용차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운전련습을 계속 하기 위하여 시간당 학비를 내고 배워주는 자동차학교의 차에 앉아 10 여차례를 배웠다.

2006년부터는 손자를 차에 앉혀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과 공항에 나가 손님도 맞아올수 있었다.

이해 6월 28일은 해맑은 날이였다. 이날따라 로친은 느닷없이 자동차로 연길려행을 해보자는것이였다. 워낙 자동차를 몰라면 정신이 번쩍 나는 윤수범인지라 그는 장춘시 남관구신통자동차임대처에서 《제다》차를 4일간 임대맡고 연길로 떠났다. 그런데 안도를 약 25킬로메터 앞두고 내리막길에서 평지에 이르는 급한 굽인돌이에서 속도를 죽이지 못하고 좌측으로 급회전을 하다가 왼쪽 콩크리트방토벽에 차를 처박았다. 차는 360도를 거의 돌다 멈춰섰다. 범퍼,물땅크가 박산나고 차체의 앞뚜껑이 입을 쩍 벌리고 오그라졌으며 운전대옆의 문이 찌그려져 겨우 빠져 나왔다. 그러나 다행이였다. 발동기는 여전히 으르렁거렸고 왼쪽방향의 지시등도 그냥 번쩍이였다. 윤수범과 뒤좌석에 앉은 처는 충격을 받았어도 상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들은 즉시 자동차임대처에 소식을 알리고 그들이 밤에 와서 보험회사와 련계하여 사후처리를 하도록 하였다

이 일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운전을 계속하느냐 아니면 이것으로 그만두느냐이다. 그는 심사숙고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사고의 주요 원인은 기술이 능숙하지 못하고 경험이 적은 탓이다. 이번 사고에서 아슬아슬한 고비도 넘기고 돈도 많이 허비(수리비와 기타 비용 만원)했지만 사람이 무사하다는것이 였다. 자동차운전수는 숙련공이다. 련습, 련습, 또 련습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

결국 그는 운전을 견지하기로 작심하였다. 그리고 장춘에 돌아온 이튿날 아침에도 여전히 차련습 했다.

그 뒤로 그는 조선에서 오신 누님, 친척, 친구들을 모시고 연길로, 길림으로, 심양으로 본계로, 수분하로 장도려행을 다녔다. 2009년 3월부터 자식들이 넘겨준 자가용이 있어 더욱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한 그다.

칠순도 훨씬 넘은 《로운전수》가 모는 그의 차에는 늘 그의 부인, 그의 손군들, 친척들과 그의 동창생, 로친구들이 앉아서 웃음꽃을 피웠다. 그의 차는 그 한사람만의 기쁨인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기쁨으로 되였다는것이 그에게 있어서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윤수범의 로후생활은 그야말로 풍부하고 다채로왔다. 그는 재직시기에 환경의 제한성으로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많이 쓰지 못하고 지어는 잊어진 단어도 많아 서투르기까지 하였다. 그는 로후에 자기 민족언어와 글을 다시 배우면서 쓰기 시작하였다. 자서전외에도 각종 체제의 다양한 조선어 글을 40 여편이나 써서 중앙인민방송국조선어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중국민족》, 《로년세계》잡지사, 길림신문사 등에 보내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는 또 촬영을 배워서 일기와 나란히 사진을 편집하여 력사자료로 만드는 한편 자기가 쓴 글에 필요한 사진자료들을 삽입하여 신문사, 잡지사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서법을 즐기여 로인협회의 서화전람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또 피아노를 치면서 로후에 《늙은이도 차를 모네》, 《삼아만의 석양노을》 등 작사작곡도 하였고 카라오케이 콩클에 참가하여 입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정청급 간부이지만 틀이 없이 로인협회 활동,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활동지어 애청자애독자클럽활동, 가요창작협회 활동 등에 참가하면서 군중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재직에 있을 때보다 로후생활이 더 분망하고 다채로왔고 살멋이 있다고 말한다.

2012년에 윤수범선생은 장춘경제기술개발구 조선족로인협회로부터 《특수공헌상》을 수여받았고 《로년세계》 잡지사로 부터 《우수특약저작상》을 수여받았다.

2013년 1월에 길림성위조직부와 로간부국에서는 퇴직간부 윤수범선생에게 《리퇴직 간부 선봉일터 선진개인》 칭호를 받기도 했다.

나는 범상치 않은 윤수범선생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로후생활을 무딘 붓으로 정리하면서 아래와 같은 시상이 떠올라 결속어로 삼는다.

석양의 미

로쇠를 달고 다니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하루로

오늘도 어제와는 다르게

무엇인가를 배우고

이겨내고

해놓으면서

나날이 애쓰며

자라나는

로후의 일과표

그것은 정녕

삶의 보람을 익혀 가고

행복지수를 늘여가는

석양의 아릿다움이 아니겠는가!

/최금란(대련)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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