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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낭비가 국가 번영을 위한 필수요소'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5.02.20일 09:31
미국인은 기회 잡는 방법을 안다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1950년대에 본 미국의 모습과 현재가 놀랍도록 닮아



1957년 3월 라이프 잡지에는 크리스티앙 디오르 창업 10주년을 기념해 디오르의 대표작들이 소개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디오르는 불과 7개월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지난 1월 런던에 갔을 때 우연히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의 자서전 ‘디오르 바이 디오르(Dior by Dior)’를 손에 넣게 됐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최근 다시 펴낸 책이다. 난 그의 글에 금세 매료됐다. 그다지 매끄럽진 않지만 매혹적이었다. 당대의 미국과 프랑스를 비교한 그의 솔직한 견해가 놀랍기도 했다.



1947년 디오르가 데뷔 컬렉션에서 발표한 작품.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스커트로 여성미를 강조한 이 스타일은 ‘뉴룩’이라고 불리며 전후 패션계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디오르는 이 책에서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의 신세계 미국에 대한 인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당시 유럽의 궁핍한 생활과 미국의 풍요로움을 비교했다. 최근 미국이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나가면서 유럽과 미국의 경제 수준이 다시 한번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점에 디오르의 책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110년 전 1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태어난 디오르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다른 많은 프랑스인과 달리 그는 평생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 경제를 찬양했다. 디오르는 경쟁이 치열하면서도 매혹적인 미국 사회가 자신에게 귀중한 성공의 교훈을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디오르는 1947년 잘록한 허리와 길고 풍성하게 굽이치는 스커트로 여성미를 강조한 ‘뉴룩(New Look)’을 발표했다. 이 스타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음울하고 중성적인 특성을 보였던 여성 패션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미국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디오르는 뉴룩을 발표하자마자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미국 순회 패션쇼를 열었다. 그와 함께 매우 여성적인 그의 오트 쿠튀르 브랜드의 수요가 치솟았다.

하퍼스 바자 미국판의 카멜 스노 같은 패션 전문가들은 뉴룩이 쿠튀르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칭송했다. 이 스타일은 디오르를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만들었고 프랑스를 이론의 여지가 없는 패션의 중심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지금은 이 일이 역사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몰락한 왕국이 어떻게 한 남자의 어깨 위에서 부활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사건이었다. 프랑스 패션업계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디오르의 큰 업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는 많은 고객을 잃었고 한때 독일이 쿠튀르 산업을 베를린으로 옮겨가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디오르는 미국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 패션산업을 다시 일으킬 방법을 찾았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미국은 모든 신생기업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더할 수 없이 환영 받고 굉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계획부터 실현까지의 과정이 이렇게 빠르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곳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자서전 ‘디오르 바이 디오르’는 모험을 감수하는 미국인의 태도에 경탄한다. 전후 유럽의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 “미국인은 기회를 잡는 방법을 안다”고 디오르는 썼다. “그들은 성공을 위한 모든 수단을 인심 좋게 제공한다. 일이 잘 안 돼도 별 문제 없다. 늘 또 다른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패를 그렇게 쓰라리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의 기회주의는 디오르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기업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 가세가 기울었다. 1949년 퀸 엘리자베스호를 타고 뉴욕으로 간 디오르는 미국 동해안부터 서해안까지 여행하면서 미국인의 소비성향과 자유분방함, 낡은 사고를 버리고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는 융통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른 모든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미국의 엄청난 부에 놀랐다”고 디오르는 말했다. “미국에서는 낭비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국가 번영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장려됐다. 내가 자라면서 교육받은 것과는 너무도 달라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인의 놀라운 창조적 에너지는 내게 한층 더 창조적인 기업을 이끌어가도록 용기를 북돋워줬다.”

처음에 디오르의 패션은 영국 등지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전후 식량배급제가 계속되던 그 시절 그의 호화로운 의상은 고급 옷감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영국 왕족들은 그의 데뷔 컬렉션을 공개적으로 관람하지 않고 런던의 프랑스 대사관에서 비밀리에 봤다.

디오르는 뉴욕에 패션하우스를 지을 때 건설 일정 지연부터 복잡한 법적 문제까지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재정적인 손실도 컸다. “우리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아무 것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미국인은 일을 서둘러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명예를 걸고 늑장을 부리는 듯 보인다. 도급업자들이 특히 그렇다!”

디오르는 1949년 뉴욕 맨해튼 5번가(나중에 이스트 57번가로 자리를 옮겼다)에 매장을 열기 전 미국 독점규제 당국에 불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고객들에게 디오르의 디자인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한 것과 관련해 무시무시한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계약서는 백지화됐다”고 그는 회상했다. “미국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모두 동의한 이 일로 ‘미국에서는 예술적 창조를 약탈하는 행위가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된다’는 내 믿음이 한층 더 굳어졌다.”



1955년 미국 CBS TV의 유명인사 인터뷰 프로 ‘퍼슨 투 퍼슨’에서 방영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모습.


디오르의 군림은 10년밖에 가지 못했다. 그는 1957년 이탈리아 몬테카티니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심장마비 원인으로 생선 가시로 인한 질식설과 성관계 후유증설이 나돌았다. 하지만 크리스티앙 디오르 뉴욕 지점을 연 지 1년도 안 돼 그의 의상은 파리 패션 수출의 약 75%, 프랑스 연간 수출 액수의 약 5%를 차지했다.

미국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땠을까? 자서전에서 그는 유럽과 미국 여성 사이에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썼다. “미국 여성은 새 동전처럼 반짝거린다. 그들의 옷은 흠 잡을 데 없고 머리와 손톱도 손색없다. 한마디로 미국 여성은 완벽하다. 백만장자부터 엘리베이터 안내원의 딸까지 미국 사회의 모든 계층 여성이 그렇다.” 그는 미국 여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의지가 강하고 충동적”이라고 말했다.

디오르는 미국 여성이 완벽한 건 좋지만 획일적인 인상을 주며 “안목이 결여됐다”고 유감을 표했다. 그가 뉴욕 거리에서 본 요란한 색깔의 향연(자동차의 페인트 색상부터 여자들의 옷 색깔, 남자 운전자들의 흉측한 타이 색깔까지)은 그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과장된 걸 좋아하는 취향이 미국인의 우아함을 덮어버린다”고 디오르는 말했다. 그는 회색과 크림색을 가장 좋아했다.

물론 이건 1950년대 초의 이야기다. 디오르는 그 후 10년 동안 유럽 여성이 새 동전처럼 반짝이는 미국 여성의 스타일을 따라 하게 될 것이며, 미국인은 “모든 취향 중 최고인 섬세한 색상에 대한 취향”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오르는 미국의 여러 도시를 돌아본 뒤에 “사실 미국 여성은 취향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상점들은 세계 각지의 패션 제품 중에서 훌륭한 것을 골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명품에 그렇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은 대량생산 덕분에 명품을 인구 대다수가 접할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들었다.”

디오르는 유럽인 사이에서 “미국인은 물건을 살 줄 모른다”는 말이 돌지만 그것은 미국의 물가가 싸서 옷을 살 때도 어느 한 가지만 골라야 할 필요가 없고 그냥 다 사버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놀라웠던 것은 미국인은 습관처럼 엄청난 돈을 쓰면서도 생활이 그다지 사치스럽지는 않다는 점이었다”고 그는 썼다. “미국인이 인생의 규칙으로 삼고 있는 듯한 낙관주의적 이상에 충실한 여성은 오로지 구매의 집단적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유럽인은 제품에 깃든 솜씨와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물건을 고른다. 제품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실용성은 어떤지를 꼼꼼히 따진다. 디오르는 이런 습성이 유럽인을 더 우아하게 만든 듯하다고 지적했다. “궁핍은 놀라운 요술봉이다.”

“미국은 질보다 양을 선호한다. 미국인 남성과 여성 모두 세심하게 고른 물건을 조금만 사기보다 그냥 평범한 물건을 많이 사들이기를 좋아한다. 풍요로움이 취향을 무디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결론 내려도 좋을까?”

디오르는 또 미국이 다른 모든 경쟁을 짓밟아 버리는 방식으로 세계 경제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불만을 표했다. 그는 미국이 “수입품에 상상도 못할 정도의 높은 관세를 부과해 오직 자국만이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상업적 팽창을 주도한다”고 비난하며 이 같은 행동을 “오직 이기기 위해 놀이를 하는 어린이의 이기심”에 견주었다.

그는 또 기본적으로 박애 정신을 지닌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한 원조를 명예로운 무상 상거래가 아니라 자선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러 프랑스처럼 역사 깊은 나라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썼다. “이는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보인다. 자국 정부가 정치적 기량 부족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프랑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요령 없는 일일지는 몰라도 말이다.”

디오르는 프랑스와 미국 법의 차이가 자신에게 큰 두통거리였다고 토로했다. 특히 프랑스 법이 디자이너의 지적 재산을 세심하게 보호하는 데 반해 미국 법은 상업 분야의 예술적 작품과 관련해 훨씬 더 느슨하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프랑스 컬렉션이 발표된 직후에, 그리고 고객이 주문한 의상을 채 받아보기도 전에 모조범들이 그 새 디자인의 드로잉을 복제한 앨범을 비밀리에 유포 중이라는 소식을 듣곤 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1955년 한 해 동안만 1000여 명의 (앨범) 구독자가 이런 방법으로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중 약 300가지 디자인을 입수했다”고 디오르는 썼다. “내 디자인 중 142가지가 그 앨범에 실렸는데 그중 57가지는 완전히 똑같았다.”

파리 등지에서 열리는 디오르 패션쇼에서는 스케치 행위가 철저히 금지됐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패션쇼에 참석한 뒤 디자인을 모방한 사람들은 기억력에 의존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십 가지 의상의 상세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디오르는 모조 방지를 위해 고객에게 자신의 의상을 다른 패션업계 종사자들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의상이 어떤 경로로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가는지 추적하기 위해 “겉감과 안감 사이에 비밀 표시”를 해뒀다. 만약 그 의상들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될 경우 그것이 어떤 고객으로부터 나왔는지, 즉 누가 약속을 어겼는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였다. 자신이 만든 의상은 자신의 자녀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디오르는 모든 의상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표시를 했다. 그 표시는 옷감에 자외선을 쪼여야만 보였다.

디오르가 미국인에 관해 가장 불쾌하게 생각했던 두 경우가 있었다. 자신이 새 컬렉션을 발표하던 날 긴장한 기색이라곤 없이 너무도 느긋했던 미국인 직원들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지나치게 말을 아꼈던 미국인 기자들이다. 이런 분위기가 “사기를 꺾어놓았다”고 그는 썼다. “프랑스에서 우리 패션쇼를 보면서 눈에 띄게 환호했던 바로 그 기자들이 냉랭한 반응을 보여 걱정이 됐다. 그들이 신문에 나를 칭찬하는 기사를 쓴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디오르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뉴욕 잡지의 고위 편집자는 그에게 “그런 냉랭한 겉모습이 앵글로 색슨족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치고 이웃에게 입을 맞추면서 감정을 표출한다. 하지만 미국인은 같은 감정을 느껴도 그냥 침묵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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