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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 위에 피여난 한떨기 꽃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4.11일 10:12
다롄대관무역유한회사 현정옥 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이수봉 기자=거센 파도가 휘몰아 치는 다롄의 푸른 앞바다, 키가 작달만하고 백옥처럼 흰 피부를 가진 50대 초반의 여인이 바다의 해돋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있다. ‘해변의 여인’ 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시원한 바다 바람을 깊이 들이 삼키며 바다가의 백사장을 사뿐사뿐 걸어간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무슨 결단을 내린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롄 해변의 여인은 조선족 여성 기업인-현정옥이다.



  그녀는 1964년 생으로 열정적이고 활달하며 예지로운 상업계의 한떨기 꽃으로 불리운다.

  현재 다롄시 정협위원이며 다롄대관무역유한회사를 모체로 4개의 회사를 진두지휘하는 사장이며, 연간 2억위안의 매출을 올려 중국에서 타인이 공인하는 한국식품 판매 1인자로 자리 매김했다.

  현재 다롄시를 중심으로 대관무역회사와 건축면적이 1만6천 제곱미터 되는 소머리다시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1200제곱미터 커피숍과 고기집을 함께 경영하고 있다. 또 칭다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에 회사를 설립했다. 전체 직원수는 160명 된다.

  2009년에는 한국식품 수입 한화 300억원(약 1.5억위안)을 실현해 세계에서 4명 우수 바아어를 뽑았는데 중국에서는 유일하게 뽑여 한국농림부 장관 감사패를 받았다. 또 2010년에는 '제 47주년 무역의 날'에 한국무역협회(KOTRA)로부터 중한무역 공로를 인정받아 코트라사장 표창장을 받았다.

  현정옥 사장은 민족과 고향을 위하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는바 2011년부터는 다롄조선족기업가협회 상무부회장, 다롄한인회 자문위원, 연변상회 상무부회장, 월드-옥타 다롄지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순금은 진토속에서도 변함이 없다

  현 사장은 한 보통 지식분자 가정의 둘째딸로 태여나 조그마한 군 소재지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30만 인구의 연변 왕청군에서 수석으로 전국 중점고등학교 연변1중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 끼쁨도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여기에서 우물안의 개구리 었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고 좌절도 많이 당했다.

  세상에는 원래 자신 보다 훨씬 총명하고 우수한 애들이 많다는것도 알았고 공부 1등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것도 깨달았다.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 기숙사 생활하고 또 사춘기때인지라 3년간 길 잃고 방황하다 보니 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겨우 다롄에 있는 공업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반급에서 4명이 각각 칭화대학과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고 10명 이상이 기타 명문대에 입학했다.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엄청 실망했었다. 그러나 현사장은 아무생각 없이 진학하여 바다가 있는 도시 다롄에서 4년간 무난이 대학을 다녔다.

  미모가 뛰여난 그녀는 대학교에서 오리무리 속의 학이었다.

  모든 면에서 빛나고 뛰여나 4년간 학생회 간부로 활약하며 학생들의 총애를 한껏 받아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현정옥 사장(중)이 2015년 여름 하얼빈에서 한국식품 판촉행사 진행중에 하얼빈시도리조선족중심소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소감을 얘기하고 있다./본사기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총장이 그녀를 단독으로 불러 꼭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것이라며 학교에서는 공부가 제일 중요하지만 사회에 나가서는 공부 보다 70% 이상이 교제능력이나 성격, 인품 등 이라고 타일렀다.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숭달숭 했지만 살아가면서 점차 그 뜻을 터득하게 되었다.

  옛 성인들이 “하늘은 큰 일할 사람에게 먼저 심신단련의 고생을 하게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우물 안에서 나와 세상을 보다

  현사장은 1987년 대학 졸업후 국가 배치에 따라 하얼빈에 있는 홍콩합작기업에 근무하게 되었다. 천명 넘는 기업에 대학생이 달랑 두명 이어서 엄청 총애를 받았다. 기술설계부에 하루하루 즐겁게 출근하며 의욕도 욕망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4년 무난이 출근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로 책임자와 다투고 자존심 때문에 다른 회사로 이전했다.

  현사장은 “그 책임자가 둘밖에 없는 대학생 인재를 쫓아냈다고 직원들한테 미움을 받았을것 같다” 며 지금 생각하면 그 분한테 너무 미안한 일을 했다고 자책했다.

  반면에 그 책임자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번 일로 전화위복이 되어서 도리어 그녀의 앞길에 어떤 광명을 비추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1년 500명 되는 새 회사에 기업관리원으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 곳이 그녀의 인생 전환점 이었다. 그 회사는 플라스틱그룹 소속인데 일본 설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현 사장은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쭉 일본어를 공부 했기에 새 회사에서 일본어 통역도 했다. 그때 외국의 기술이 중국 보다 훨씬 선진적이라는것도 알았다.

1994년 그녀한테 출국기회가 왔다. 회사가 한국 SK회사로부터 설비구매를 추진하면서 일주일간 처음으로 설비구매단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처음으로 출국하고 처음으로 한국 사람 만나고 처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알게 되었고 또 처음으로 통역비 200달러를 받았고 처음으로 자신의 봉급이(당시 기본금 300위안 ) 한국인 평균 봉급의 50분의 1 수준 이라는것도 알았다.

  현사장은 그때 우물 안에서 나와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고 어섯 눈을 뜨게 되었다.

  강에서 노는 고기가 욕심나 집에서 그물을 만들다

  현사장은 그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그녀는 성격상 언제나 만족하고 안일하고 즐겁게 사는 전형적 O형 이기에 아마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국유기업에 쭉 몸을 담그고 과장자리에 진급해 55세 퇴직때까지 하루하루 똑 같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다.

  봉급 300위안에 크게 만족하며 살던 그녀가 돈을 벌고 싶어했다. 그래서 회사에 출근하며 한국 의류 판매에 손을 댔다. 그때 한창 한국에서 수입해온 호주머니에 수 놓은 곤색바지가 유행했는데 바지 하나에 100위안가량 되었다. 하얼빈 지하 도매상가에 있는 부스 하나에서 한달에 500장씩 팔리는 인기 상품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한테 부탁하여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그 바지를 구입하여 따이공으로 다롄에 보내고 또 다롄에 있는 친구들한테 부탁하여 하얼빈에 보내고, 하얼빈에 도착하면 지하상가에 넘기는 방식으로 의류 도매업을 부업 삼아 시작했다.

  그때 한국의류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매장에서 한국 신라면을 몇박스 팔았다. 유통기한이 반년 넘게 지나 스프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처음 먹어보는지라 너무 맛 좋아 불티나게 팔렸다. 신라면,꿀과배기.새우깡 등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있다는게 너무 즐거웠다. 또 자신처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별미를 함께 맛 볼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중국과 한국은 정상무역이 아닌 민간무역을 많이 하던 시기여서 한국식품이 극히 적었다. 션양 서탑과 연길에 몇집 있고는 다른 지역에는 없었다.

  그녀는 무릎을 탁치며 “바로 이것이다”고 소리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날듯이 기뻤다.

   옥돌도 닦아야 빛이 난다

  현 사장의 성장 여정을 되돌아 보면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으며 또 희열과 수확도 있다.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한떨기의 꽃처럼 눈부시게 피어 생명의 화려한 색채를 뽐내고 있다. 정말로 눈물에 백옥은 더 하얘지고 역경 속에서 의지는 굳어진다는 말이 떠오른다.

  현사장도 옥돌을 부지런히 닦았기에 빛이 날수 있었고, 살벌한 장사 판에서 성공해 살얼음 위에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녀도 다른 기업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조건이 구비돼 장사를 시작한것이 아니다. 빈주먹과 용기만으로 장사에 남먼저 눈을 뜬 사람이다.

  현사장은 1994년, 하얼빈조선상점에 20제곱미터 되는 한국식품 슈퍼마켓을 오픈했다. 처음에 직원 2명을 데리고 한국식품 소매에 나섰다. 첫달부터 대박이었다. 300위안 봉급을 받던데 비해 한달 이윤이 1만위안 되었고, 그후부터 반년간 매출이 계속 올라 한달 이윤이 3만위안 되었다.

  현사장은 아무런 계산도 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하얼빈에 가게 3개를 더 내고 대학생 개체호가 되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장사를 하는것이 별것 아니지만 그때는 대학 나와 개체호가 되었다면 쪽 팔리는 일로 여겼는데 그 금기를 깨고 호걸이 되었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길가는 사람들을 충실한 고객으로 만들가하고 머리를 썼다. 점차 상도에 미립이 떴고 매출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현사장은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담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힘이 들어도 일이 너무 재미 있어 드디여 내 삶을 찾았다는 즐거움에 도취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차가 없는 넓은 몽골 초원의 아스팔트 길에서 자가용을 고속으로 몰고다니는 기분이란다.

전화 한통이 슈퍼 아줌아의 인생을 바꾸어 놓다

  현사장은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는 션양이나 연길에서 물건을 들여와 판매하는 슈퍼 아줌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할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정상 통관이 잘 안 되던 때라 물건 구입이 엄청 힘들었다. 또 전국적으로 누가 물건을 많이 취급한다는 정보도 없어 고생하다가 공부한 덕이라 할까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직접 한국 공장에 문의하면 중국 수입상을 찾을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포장지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찾아 한국 청정원,CJ, 동서,농심 등 회사에 직접 전화했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 했던가. 무작정 한 전화가 오히려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때 중국에서 국제 전화로 문의하는 사람이 없었던지라 전화 받는 분들은 한결같이 열정적 이었고 전화번호를 남겨 달라고 했다. 결국 수출부장 한테까지 보고되어 수출 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구체적으로 거래처도 알려주고 애로사항도 해결해 주었다.

  그 전화 한 통이 향후 현사장이 CJ동북총판, 청정원 중국총판,동서 중국총판을 따내는데 길을 열어주었다.

  그 때 전화했던 수출 부장 두 분은 지금은 대기업 부사장과 상무로 승진했고, 아직도 그녀의 사업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 정말로 좋은 인연이고, 전화 한통에 억원 돈이 굴러 들어온 셈이다.

  세상에 불가능한 꿈은 없다

  콘테이너가 들어오고 사업이 대폭 확장 됨에 따라 물류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2000년 한국 청정원 중국총판 계약을 맺고 그에 걸맞게 직수입을 하기 위해 하얼빈슈퍼는 언니한테 맡기고 다롄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현사장은 물류의 편리를 위해 다롄항에 있는 보세구내에 창고를 임대하고 한국식품 국제무역에 팔을 겉었다.

  당장 들어온 콘테이너를 통관시켜야 하는데 세관문이 어디 있고 상검은 또 뭘 하는데고 통관은 또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았다.

  너무나 힘들었다. 정상 통관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앞질러 갔는지 그때까지 통일된 한국식품 수입 가격이 없어 제멋대로 수입 가격을 정하고 세금을 매겼는데 첫 3개월 100만위안을 날렸다. 설상가상으로 수입 실적이 계약에 못 미쳐 3개월만에 한 대기업의 총판권도 해제 당했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상업 검사국에서 수입식품 등록을 하지 않고 식품을 도매한다고 회사에 정지령을 내렸다. 그때 식품 도매업을 하려면 상업 검사국에 등록해야 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현사장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큰 마음을 먹고 상검담당 과장을 찾아갔다.

  “과장님, 다롄에 온지 반년도 안되고 또 구체적 관리법을 익숙하지 못해 빚어진 차질이지 고의로 한건 절대 아닙니다.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합니다.”

  과장은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말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되는가?”

  “예. 믿어도 됩니다.거짓말이라는것이 드러나면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이후부터 정말 열심히 법을 지키며 회사를 잘 키워 나라에 세금 많이 내고 직원들한테 항상 기쁨을 주는 사장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정상 통관 업체 정보가 없어 얼뜨기 통관 업체를 선정한 탓에 너무 힘드니 좋은 통관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정을 해도 부족한 판에 부탁까지 하다니 ….”

  담당 과장은 어이없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녀처럼 솔직한 사람은 없다며 우선 돌아가라고 했다.

  이튿날 신사차림을 한 사람이 회사를 찾아와 상검 과장이 소개했다며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들여다 보니 다롄에서 유일한 AAA통관사 사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상검에서 처장으로 사업하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꾸렸기에 인맥이나 통관 능력이 뛰여났다. 그와 손을 잡은후 15일 걸리던 통관도 3일이면 통관되어 나왔고 가격도 세관에서 마음대로 올리지 않고 회사가 신고한 대로 인정되여 통관 되었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듯 하다. 그때부터 사업이 순풍에 돛단격으로 일사천리 십년을 쭉 달려왔다. 2004년 매출은 1억위안 관을 넘었고 현재는 2억위안 대관을 넘었다. 호황기에는 열몇개 대기업의 중국 총판권도 따냈었다.

  현사장은 ‘세상에 불가능한 꿈은 없다’는 진리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가능한 꿈은 꾸지 않기 때문이다.

신용과 신의를 지키고 배려하면 돌아온다

  현사장은 '신용과 신의를 지키고 배려하면 돌아온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간직하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다.

  2003년 2월, 모 한국 회사와 대리판매 계약을 체결하고, 한국 회사로부터 3억 원(한화)어치에 달하는 식품을 공급 받았다. 그런데 그 한국회사가 4월 달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겨 급히 자금이 수요 된다며 송금을 요구했다.

  마침 중국에서 사스가 발생해 자금 조달이 아주 어려웠다. 모 한국 회사는 다른 두 중국회사와도 대리판매 계약을 체결했는데 두 중국 회사는 사스 때문에 팔리지 않는다며 송금을 거절했다.

  현사장은 밑지는 한이 있더라도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50% 할인 판매에 나섰다. 두 달만에 50만위안을 밑지며 물건을 팔아 제때에 결제해 주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국인들 속에서 미담으로 전해졌고 덕분에 한국 회사들이 그녀에 대한 신용 등급이 'OK'로 낙인 되었다. 그후로 어떤 한국 회사는 그녀를 믿고 10억원(한화) 어치에 달하는 식품을 두달 기한으로 우선 판매해 보라고 보증도 없이 서슴없이 보내 주기까지 했다.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신용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원래 천리를 달리는 말의 기능은 먼 길을 간 연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다.

  베풀어 내 편을 만들다

  현사장은 '우물을 마실 때 우물판 사람을 잊지 말라'는 속담처럼 조금이라도 도와 주었던 사람들은 언제나 잊지 않고 보답했다.

  그리고 여자이지만 밥을 열심히 샀다. 자기가 살 자리에서도 사고, 안 사도 될 자리에서도 사고 하니 모임만 있으면 무조건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인맥을 열심히 키웠다. 그녀가 산 밥을 세번 먹은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무조건, 먼저 알려 주었다. 덕분에 누구보다 빨리 새로운 정책, 새로운 소식, 새로운 아이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할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기 싫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은 조건으로 모셔와 회사를 대기업 못지 않은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20여년간 사업하면서 많은 동종 기업인을 상대했는데 경쟁 상대지만 언제나 그들을 협력 관계로 생각하고 함께 발전할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여직껏 적을 둔적 없다. 상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그녀는 함께 발전하려고 노력 했기에 마음은 언제나 편하고 즐겁게 일했다.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

  어려운 사람 돕기 위해 더 열심히 뛴다는 현사장은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언제나 가슴 아프다. 내 주위에도, 내 친척 중에도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 많다. 그들은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렇게 힘들다. 그래서 난 그런 일을 보면 눈물을 많이 흘린다. 그러나 내가 해 줄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며 항상 미안한 마음이란다.

  대학 다닐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현사장도 엄청 힘든 생활을 했었다. 막내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이고, 언니와 그녀는 대학에 다녔다. 아버지가 받는 80위안 봉급으로 다섯 식구가 생활하다 보니 그녀한테 보내던 생활비가 40위안에서 10위안으로 줄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를 악물고 배 고픔을 이겨냈다. 어쩌면 그때 배 고팠던 생활이 불우이웃을 돕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녀는 몇 년간 다니던 모교에 달마다 돈을 보내 엄마없이 주정뱅이나 장애인 아버지랑 생활하는 몇십명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지난해 하얼빈의 모 소학교에도 장학금을 전달했다.

  현사장은 “그 지역에서 번 돈의 일부를 그 지역에 남기고 가는 나눔을 통해 좋은 이웃이 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돈이 많아서 불우이웃 돕기에 적극나서는 것이 아니다. 은행대출도 많고, 주위에도 손을 내미는 사람이 적지 않다.그러나 엄마 없이 아침 밥도 못 먹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면 모성애가 자극을 받아 더 많이 보내 주지 못해 도리여 미안한 마음이다. 엄마 없는 불쌍한 애들이 살아 가는데 작으나마 힘이 되고 싶다. 더 많은 사람한테 나누어 주기 위해 더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엔돌핀이 생겨 더 열심히 뛴다.

  “합격된 경제인은 이윤만 따지는게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온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살얼음 위에 꽃 피다

  현사장은 20여년 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해 인정사정이 없는 장사라는 살얼음 위에 꽃을 피웠다. 무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나이도 50 고개를 넘었으니 그런대로 편안하게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었다.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꿈이 꿈틀거렸다.

  20여년 동안 줄곧 남의 제품만 팔아주다 보니 때때로 한국 회사가 그녀의 모든 기획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가격을 인상하고 총판권을 빼앗었던 일, 불량제품을 보내 어느 한순간에 열심히 키워온 시장을 잃었던 가슴아픈 기억이 생생했다.

  여직것 노력이 하루 아침에 그녀의 의지나 열정과 상관 없이 완전 타의로 물거품이 되어 무너지는 것이 너무 가슴아팠다. 완전 불공평한 갑을 관계었다.그때면 절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몇날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크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를 다 키워놓으니 생모가 찾아와 아이를 무작정 빼앗아 가는 기분이다.

  현사장은 이런 뼈져진 아픔을 겪은후 10년 후를 바라보며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정성을 다해 자기 손으로 최고 상품을 만들고, 전부의 열정을 다해 막둥이 키우듯 새 상품 생산에 전부 사랑을 솥아 붓고 키우고 싶었다.

  현사장은 산업의 꽃으로 불리우는 제조업에 뛰여들겠다고 선언했다.

  2014년 7000만위안을 투자해 다롄개발구에 소머리다시 생산공장을 세웠다.또 2015년에는 1000만위안을 투자해 다롄시의 번화한 거리에 1200제곱미터 되는 커피솝을 오픈했다.

  그녀는 제조업 꿈을 향해 앞으로 10년은 더 열심히 달리겠다고 작심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항상 즐겁고 행복하며, 꿈이 있는 여자는 더 아름다워 보인다.

  50대에 들어선 현사장은 대학 공부를 했지만 가방 끈이 짧다며 한국 연세대학에서 단기 EMBA 공부를 했다. 공부는 끝이 없는것 같다.여기서 경영의 더 높은 단계를 배우고 싶어 2015년초부터 쭉 1년간 한국 고려대학교경영전문대학원 최고 CEO과정을 열심이 수료하고 있다.

  공부를 통하여 기발한 생각이 든 그녀는 결단성 있게 두개 회사를 합병했다. 작은 회사가 큰 회사를 먹어버리는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또 한번 회사가 도약했다. 매출도 30% 신장했고 이윤도 많이 늘어났다.

  공부가 너무 재미 있다는 그녀는 고려대 공부가 끝나면 이번엔 서울대에 가서 2년간 최고경영과정을 수강하고 싶단다.

  “학교마다 가르치는 방식이 틀려 배울것이 너무 많아요”

  그녀는 배우면서 실천하여 10년후에는 제조업 분야에서 유명 브랜드를 키워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고 말한다. ‘100년 기업은 없어도 100년 브랜드는 있다’고 그녀는 굳게 밑고 있다.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배우면서 살고 싶다는 그녀,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고, 불우이웃을 돕는데 정성을 다해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녀, 정말로 창공을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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