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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신라의 고승 [제20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7.27일 09:39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승려 무상(無相)이 신라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그가 왕자 출신이라고 할 때부터 이 암살사건은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 '신승전(神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의 동생이 (신라) 본국에서 새로 왕이 되었으며, (왕은) 그 자리가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내 죽이고자 했다." '신승전'은 민간에서 유전되는 승려들의 사적을 기록한 명나라 때의 불교전적이다.

  다행히 국왕의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있었다. 자객은 웬 일인지 천정에서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무상이 좌선(坐禪)하던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무상 스님이 이인(異人)이라고 하니 그 무슨 신명(神明)이 스님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무상의 암살사건 이야기를 읽었다면 누구라도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물음이다.

  실제로 무상은 중국불교에서 숭상하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의 455번째 나한(羅漢)으로 모셔져 있다. 오백나한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5백 명의 성자(聖者)이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摩)가 307번째 나한이며, 육조 혜능(慧能)조차 오백나한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백나한의 한명인 무상 대사, 북경 벽운사의 나한당에 있다.

  정작 암살사건이 벌어졌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정중사(淨衆寺)에서 무상은 무명의 승려로 되어 사찰의 명부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만불사(萬佛寺)는 이름처럼 부처의 조각상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사천박물관의 해설원은 이렇게 조각상만 일일이 열거하고 있었다.

  만불사는 정중사의 다른 이름으로서 일찍 동한(東漢) 시기에 세워졌다. 남조(南朝) 때 안포사(安浦寺)라고 했고 당(唐)나라 때 정중사라고 불렀으며 송(宋)나라 때 또 정인사(淨因寺)라고 개명했다. 명(明)나라 말, 병란으로 훼손될 때는 만불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고찰은 19세기 말 성도의 만불교(萬佛橋) 근처에서 웬 농부의 호미에 묻어나와 마침내 볕을 보았다. 그날 농부는 신이 들렸는지 밭에서 무려 백여 존의 불상을 파냈다고 한다. 성도에서 일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만불교 근처에서 또 불상 등이 발견되는데, 1950년대 초에는 한꺼번에 200여 존의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9년, 사천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하며 특별히 만불사 석각관(石刻館)을 따로 만들었다.



만불사 석각관에 있는 부처 조각상.

  "아육왕(阿育王) 조각상은 중국에 그리 많지 않은데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조각상은 우리 성도에서만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석각관의 부처상, 보살상, 삼존불… 흙으로 빚고 금칠을 올린 조각상은 해설원의 입에서 줄을 이어 나온다. 아니, 해설원의 자랑거리는 또 하나 있었다. 세계의 첫 지폐인 교자(交子)는 북송(北宋) 시기 성도에서 탄생했는데, 바로 정중사에서 찍어냈다는 것이다. 당․송(唐․宋) 시기 정중사는 장경(藏經)을 조각, 인쇄하는 등 상당히 높은 인쇄술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무상은 석각관의 정중사에서 끝내 만나지 못했다. 정중사에서 20여 년을 수행하면서 중생을 교화했고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 칭송되었던 무상은 기어이 석각관에 상(像)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혹여 무상은 아직도 정중사 옛터의 땅속 어디엔가 그의 형체를 감추고 있을까…

  사실상 무상의 신라왕자 신분부터 미스터리한 부분이 있다. '신승전'은 "무상 스님은 본래 신라국의 사람이요, 그 땅 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한다. 무상은 당(唐)나라 보응(寶應) 원년(762)에 79세를 일기로 원적했으니, 684년에 출생한 걸로 된다. 이에 따라 신라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태자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문왕은 셋째 태자가 없는 걸로 전하며 무상은 성덕왕(聖德王, ?~737)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니, 무상은 신문왕의 왕손이 되는 것이다. 어찌됐거나 선종(禪宗) 법통의 전승사(傳承史)로 일컫는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도 "무상선사는 속성(俗姓)이 김씨이요, 신라왕의 족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미루어 무상의 신라왕족 신분은 확실한 것 같다.

  시야비야를 떠나 무상의 행적은 신화 같은 이야기처럼 하나하나 모두 신비스럽다. 그의 이런 자취는 '송고승전(宋高僧傳)', '신승전' 등 불교전적의 행간에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무상은 개원(開元) 16년(728) 바다를 건너 입당(入唐)했다. 그가 44세 되는 해였다. 장안(長安)에 이른 후 현종(玄宗)을 알현했으며, 현종은 그를 장안의 선정사(禪定寺)에서 수행토록 하였다. 그 후 무상은 오지의 사천성(四川省)으로 옮겨가서 지선(智詵) 선사를 알현하며 고승 처적(處寂)의 문하에 들어간다.

  무상의 남다른 이적(異蹟)은 처적 선사에게서 제일 먼저 나타난다. 무상이 도착하기 전 처적 선사는 "내일 밤에 손님이 오니 너희는 마땅히 닦고 쓴 후 기다리라"고 주변에 귀띔을 한다. 그로부터 하루 사이에 과연 무상이 도착했다. 이때 처적 선사는 무상에게 가사袈裟와 더불어 무상이라는 이 법호를 내리는 것이다.

  무상은 처적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혼자서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성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70㎞ 상거한 청성산(靑城山)이었다. 청성산은 상고시절 황제(黃帝)가 선인(仙人)으로부터 풍운을 다스리는 술수를 전수받아 수도(修道)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사실상 청성산은 도교가 발원한 산이며 또 도교 4대 명산의 으뜸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청성산은 고대 신화에서 "청도(淸道), 자미(紫薇)로 천제의 거소(居所)"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도교의 명산으로 이름난 것은 장릉(張陵)이 와서 전도를 하면서부터이다. 장릉은 본래 성도 부근의 학명산(鶴鳴山)에서 수도하면서 도교의 원류인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설립하였는데, 신자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한데서 이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두미교는 일명 천사도(天師道)라고 하며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삼고, '도덕경(道德經)'을 경전으로 삼는다.

  잠깐, 고구려의 28대왕 보장왕(寶藏王)이 이 도교를 신봉했다고 고사(古史)가 전한다. 그 무슨 운명의 작간인지 몰라도 보장왕은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도교가 일어난 성도 근처로 유배되는 것이다.

  청성산은 수․당(隋․唐)나라 시기 도교를 숭상하면서 또 '신선의 거소'로 존숭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청성산에는 도관이 수풀처럼 일떠섰고 도인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중국 속담에는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 즉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당나라 초, 불교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청성산에는 불교와 도교의 영역 다툼이 일어났다.

  나중에 종단의 이 소송사건은 현종에게 알려지게 된다. 황제의 칙령은 "도관은 도가에 돌리고, 사찰은 산밖에 의탁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관은 앞산인 전산(前山)에 있게 되었고, 사찰은 뒷산인 후산(後山)에 서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조서에서 본명 '청성산(淸城山)'의 맑을 청(淸)에 물 삼수변이 없어지면서 푸를 청靑으로 되었고, 산 이름도 차츰 푸를 청(靑)을 쓴 '청성산(靑城山)'으로 전해진다.



관광객이 붐비는 청성산 입구.

  무상은 불교와 도교가 함께 만나는 청성산의 계곡에서 두타(頭陀)의 수행을 했다. 두타행은 출가인이 세속의 모든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행을 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어찌 보면 무상은 종단의 세속적인 논쟁의 복판에서 그 소용돌이를 몸으로 잠재우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무상(無相)이라는 이 이름 자체가 바로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초연한 경지를 말한다.

  무상은 좌선을 시작하면 5일이 지나는 일이 많았다고 '신승전'이 기록하고 있다. 산에 머문 지 오래되자 옷은 해지고 머리칼은 길었다. 사냥꾼이 동물인 줄로 의심하여 활을 쏘려다가 다시 멈췄다고 한다.

  어느 날, 맹수 두 마리가 깊은 눈을 밟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무상은 맹수에게 먹이로 자기의 몸을 보시하기를 원하고 맹수 앞에 흔연히 누웠다. 맹수는 무상의 머리에서 발까지 냄새를 킁킁 맡더니 가버렸다. 가끔 밤중에 바위의 아래로 호랑이의 머리털이 손에 잡히고 있었다.

  "이야기가 천 년 전의 실화라고 해도 신화로 들어야 하겠네." 일행 중 누군가 이렇게 농을 했다.

  하긴 청성산은 더는 청정한 수련장소가 아닌 세속의 관광명소로 되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숲을 이뤘다. 산짐승이 있다면 지레 놀라서 천방지축 산 밖으로 달아날 것 같았다. 실제로 일행은 종일토록 청성산에서 네발 가진 짐승이라곤 다람쥐조차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무상은 두타행의 세계에서 나와 성도에 들어온다. 현령 양익(楊翌)은 그의 괴이함에 의심을 했다. 무상을 추적하는 방을 붙이고 무리 20여명에게 명하여 잡아오도록 했다. 무리는 무상의 몸 근처에 다가서자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었으며 낯빛이 변했다.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돌과 모래가 관청으로 날아들었다. 장막이 펄럭이고 책이 날아갔다.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감히 말조차 못했다. 사죄를 해서야 비로소 바람이 멎었다. 이에 무상을 옛 거소에 봉송(奉送)했으며 시주하는 사람들을 권유하여 정중사, 대자사(大慈寺), 보제사(菩提寺), 녕국사(寧國寺) 등 사찰을 짓게 했다. 바깥 마을에 지은 종탑 등속은 헤아릴 수 없었다.

  현종은 이때 성도에서 또 한 번 무상을 만나고 있었다. 이맘때 현종은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성도에 있었다. '안사의 난'은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나라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은 당나라를 쇠퇴하게 만든 전환점이다.

  거두절미하고, 무상은 구법을 하러 왔던 예전의 그 무상이 아니었다. 수행을 깊이 닦았고 신자들의 존숭을 받는 고승이었다. 이에 현종은 무상을 높은 예의로 대했으며 그들의 이 상봉은 가화(佳話)로 사책에 기록된다.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수리시설 도강언을 구경하기 위한 관광객이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또 있었을 법한 다른 만남은 전하지 않는다. 청성산 부근에는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수리시설 도강언(都江堰)이 있다. 도강언은 2천 여 년 전에 강줄기를 나누기 위한 제방과 이에 딸린 수로이다. 청성산에 들어가는 길가에 있으며 청성산 못지않게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다. 청성산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한 사람처럼 이 도강언에 들린다.

  "무상 스님도 청성산에 가시면서 도강언을 경유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강언의 입구에서 떡메의 먹임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두 사내가 가게 앞에서 떡메를 엇갈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대륙의 오지에도 찰떡을 쳐서 먹는 풍속이 있던가?…



도강언의 식품가게 앞에서 떡메질을 하는 직원.

  사실 떡판에 놓인 건 찰떡이 아니라 과자였다. 호두 씨를 엿에 버무리고 떡메로 쳐서 바삭바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순간 좌중에는 웃음이 터졌다. "이거 참, 표상(表象)에 다들 눈이 싹 가려졌네요."

  그러고 보면 눈에 보고 있는 형상은 실상인지 가상인지 구분키 어려운 오묘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762년 5월 19일, 무상은 성도의 정중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홀연히 입적했다. 이때 "해와 달은 빛을 잃었고 하늘과 땅은 백색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수행자들은 의지하던 곳이 끊어졌다"고 '역대법보기'가 통탄하고 있다. 하늘을 치솟는 무상의 위상을 알려주는 서술의 일부이다.정말이지 무상의 이름이 중국불교의 오백나한 명부에 들어간 그 이유를 이제는 잘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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