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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의 신화로 전하는 신라사찰 [제21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8.12일 09:22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헛갈리지 않도록 먼저 설명을 해둔다. 이 천태산(天台山)은 천태종이 일어난 그 천태산이 아니다. 대륙 남부의 녕파(寧波)가 아니라 동부의 일조(日照)에 있다. 일조는 일출의 첫 햇살이 제일 먼저 비춘다는 말에서 취한 지명이다. 이 지명은 천태산에 있는 동이(東夷)의 상고시절 태양숭배 신화로 인해 생긴 것이다.

  신화가 있는 이 태양의 산에는 한때 신라인들이 촌락을 이뤄 살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손(天孫)의 자식들은 태양부족의 이 옛 고향을 찾아 바다 저쪽에서 일부러 온 듯싶다.



부족장이 앉던 돌바위의자에 태양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천태산의 신라촌에는 노비로 팔려온 신라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지국(鞠志國, 일조시 태양문화연구회 부회장) 씨는 이렇게 그가 알고 있는 신라촌 옛 촌민의 신분을 밝혔다.

  산동성(山東省) 일조 시내에 있는 태양문화연구회의 사무실에서 국씨를 만났다. 근처의 기차역에서 오구작작 붐비는 인파가 실루엣처럼 창밖으로 하얗게 비쳐들고 있었다. 약 10년 전 국씨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우연하게 옛 비석을 만났으며, 나중에 이 신비한 비석의 출처를 찾아 천태산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천태산의 산봉우리마다 널려 있는 태양유적은 그를 경이로움과 감동의 경지에 빠지게 했다. 드디어 국씨는 천태산의 태양유적을 발굴, 연구하는 고고학자로 일대 변신을 한다.

  국씨의 말에 따르면 신라노비는 성이 이씨(李氏)이며 그 후예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씨의 이 후예가 조상의 옛 기억을 옮긴 글에서 지금까지 잘 몰랐던 신라촌의 많은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촌은 천태산의 산골짜기에 있었고 소금 말리기와 어로, 농사를 생계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唐)나라 영태(永泰) 원년(765), 초대 치청평(淄靑平)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산동 일대를 점거하고 할거세력을 형성했다.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의 후예이다. 그는 신라노비 교역을 방임했으며 이로 하여 한때 신라노비의 매매는 더구나 창궐했다. 819년, 당나라는 이정기의 할거세력을 평정한 후 823년과 828년에 걸쳐 두 번이나 칙령을 내리고 신라인을 노비로 사지 못하게 했으며 그들을 귀국하게 했다.

  대부분의 신라인들은 방면된 후 여전히 대륙에 남아있길 원했으며 연해 일대에 기거하면서 군락을 형성했다. 그들을 제외하고 대륙에 안착한 신라인들은 또 통역, 항해기술자, 학자, 승려, 심지어 바둑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신라인들의 군락은 신라방(新羅坊), 신라채(新羅寨), 신라보(新羅堡) 등 이름으로 불렸으며 산동성(山東省) 지어 남쪽의 복건성(福建省) 연해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했고, 일본과 신라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그들은 당장 당나라에서 땅을 얻어 농사를 짓기보다는 즉시 돈이 되는 일, 즉 배 만들기, 소금 만들기, 숯 굽기 등을 하기도 했다.

  당․송(唐․宋) 시기, 천태산의 부근 지역에는 염장(鹽場)이 있어 아주 번화했으며 신라촌의 인구도 다른 신라마을에 비해 훨씬 많았다고 한다.

  현재로선 천태산의 신라촌에 이씨의 선조처럼 노비 출신이 얼마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천태산에 신라사를 지은 것은 그들 촌민이 아니라 승려라고 옛 비기(碑記)가 기록하고 있다. 대만(臺灣)에서 발견된 '석봉사중수비기(石鳳寺重修碑記)'는 "당나라 초, 신라승려 지은(智隱)이 사원을 재건했으며 신라사(新羅寺)라고 했으니 불문이 재흥했다."고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사찰이 먼저 섰나요? 아니면 신라 마을이 먼저 섰나요?" 부지중 이런 물음이 흘러 나왔다.

  국씨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건 모르겠다고 하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천태산 답사길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국지국 박사.

  신라인들은 촌락을 이룬 후 부근에 새로 사찰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천태산에는 신라마을보다 신라사가 먼저 생긴 것 같다는 지적이 나왔다. 분명한건 신라사가 천태산의 옛 사찰을 재건했다는 것. 남북조(南北朝, 420~589) 시기의 승려 혜심(慧深)이 일찍 천태민사(天臺憫寺)를 세웠다고 '석봉사중수비기'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때 혜심은 산기슭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으며 무덤 옆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자에 불쌍히 여길 민(憫)을 넣어 사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북위(北魏, 386~557) 때 불교도들이 모반을 꾀한다고 하면서 모든 사원을 소각하게 했으며 승려와 비구니를 일률로 참했다. 이 시기 "불문이 불행을 입어 그 화가 민사(憫寺)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혜심은 "분개해서 출해(出海)"를 하며 "정토(淨土)를 찾고자"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건너갔다.

  재건한 신라사는 이 천태민사보다 훨씬 오랫동안 존립했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1368~1398) 연간까지 약 5백 년 동안 천태산에 줄곧 향불을 피워 올렸다. 신라촌도 여전히 천태산에 존립하고 있었으며 신라인 후예가 위주였고 촌장도 신라인 후예였다. 이씨의 옛 선조는 홍무 연간에 한시기 신라촌의 촌장으로 있었다고 전한다.

  당나라 이후 오대십국(五代十國)과 요(遼), 금(金), 원(元)의 여러 대의 왕조가 마치 동해의 일출처럼 나타났다가 또 일몰처럼 사라졌다. 대륙의 신라인들은 차츰 현지인들에게 동화되었으며 대부분의 마을에서 신라인과 중국인이 혼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천태산에는 대륙의 여느 신라인 마을치고 아주 희소한 정경이 펼쳐지고 있은 것이다.



신라사원 옛터에서 발견된 불상 조각.



  정말로 그래서일지 모른다. 천태산의 신라촌에는 일대 희사가 생긴다. 고려 말기의 문신 정몽주(鄭夢周)가 신라촌을 찾아왔던 것이다. 정몽주는 무너지는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숨진 충절의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를 사신으로 방문한 기간 일부러 일조의 천태산을 찾아와서 신라촌의 유민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신라인의 뿌리를 찾고 맥을 잇기 위해 신라촌에서 젊은이들을 일부 선정하여 반도에 데려갔다고 전한다. 정몽주는 또 은자를 내어 신라사 부근에 신라서원(新羅書院)을 세웠다.

  정몽주는 천태산에서 신라 유민을 만난 후 감개가 무량하여 시를 지었다. 시 '일조현(日照縣)'는 신라촌 동쪽의 봉황산(鳳凰山) 산마루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 비각으로 남는다.

  "海上孤城草樹荒바닷가의 외로운 성에는 초목이 황량한데

  最先迎日上扶桑제일 먼저 해를 맞아 부상에 오르네.

  我來東望仍搔首내가 온 동녘을 바라보노니 시름이 여전하네.

  波浪遙應接故鄕파도의 물결은 멀리 저 고향에 잇닿으리."

  정몽주는 이 시문에서 '산해경'에 나오는 전고(典故) "탕곡(湯谷)에 부상(扶桑) 나무가 있으니, 열개의 태양이 그곳에서 목욕을 했다.(湯谷上有扶桑,十日所浴)"를 빌어 바다 건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서술하고 있다. 정몽주는 또 시 "일조의 천태산(日照天臺山)", "천태산의 안기사(天臺山安期祠)"를 남기는데, 여와(女娲)가 하늘을 깁고 해상의 신산(神山)에서 "랑아(琅玡)의 천대(天臺)"에 옮겼다고 하는 고서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전설 그리고 방선도(方仙道, 도교의 초기 파벌)의 시조인 안기(安期)가 천태산에서 두루미를 타고 신선계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정몽주는 천태산의 태양문화 유적과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선도의 시조 안기의 이름자가 새겨진 천태산 산정의 바위.

  솔직히 정몽주는 물론이요, 승려 지은도 천태산의 신라촌을 찾아왔는지 아니면 신라촌의 천태산을 찾아왔는지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혹여 그들 모두 천태산에 배달족의 태양숭배와 잇닿는 혈연의 '족보'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천태산의 산마루에서 해는 날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신라인들의 흔적은 명나라 때에 이르러 고무지우개로 지우듯 가뭇없이 사라진다.

  명나라 건문(建文, 1399~1402) 연간, 연(燕)나라 왕 주체(朱棣)가 "정난지역(靖難之役)"을 발동했다. 전란은 4년 남짓이 지속되며 거주(莒州) 일대는 "백리 가도록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 거주는 수․당(隋․唐) 시기의 행정지역으로, 천태산 북쪽의 지금의 거현(莒縣) 일대에 치소가 있었다. 천태산 사찰의 비각 비문도 "건문 연간 산불이 불시에 일어나서 경서와 사원이 하루아침에 훼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라촌 역시 이 무렵 전란과 산불로 인구가 분산되고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십분 크다.



신라사원이 있던 천대산 기슭의 옛터, 부근의 채석장때문에 말끔히 훼손되었다.

  그 후 새로운 이주민들이 천태산 기슭에 끼리끼리 찾아온다. 진씨(秦氏)의 족보에 의하면 그들의 선조는 전란이 끝난 건문 4년 이후 동해 즉 연운항(連雲港)에서 천태산으로 이주를 했다. 진씨 종족(宗族)은 나중에 신라사의 옛터에 사찰을 중수하며 석봉사(石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사와 신라서원, 신라촌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은 것은 신라인들이 일부 천태산에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어찌됐거나 이때부터 천태산에는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천태산의 고찰에 얽힌 악연은 천년의 윤회를 반복하고 있었다. 청(淸)나라 말, 일조에서 향민(鄕民)과 독일 천주교 교회 사이에 충돌이 생기며, 이를 진압하던 독일군이 천태산을 떠날 때 거국(莒國) 시조 제사비석과 정몽주의 시문비각 그리고 석봉사 재건비석 등 3점의 유물을 훔쳐갔던 것이다.

  국씨가 미국에서 만났던 옛 비석은 바로 거국 시조의 제사비석이었다. 이 비석의 도난은 실은 나중의 참혹한 겁난(劫難)을 예고하고 있는 듯 했다. 20세기 60년대, '홍위병'들이 천태산에 올라와서 불상을 훼손하며 이어 70년대 촌민들이 대량으로 채석을 하면서 석봉사는 철저히 훼멸되는 것이다.

  기실 석봉사 자체도 불교와 태양숭배 문화의 응집체였다. 사찰은 부처님을 공양했지만, 벽화는 태양이 천태산에서 미역을 감고 후예(后羿)가 활을 쏘아 해를 떨어뜨리는 등 신화 이야기였다고 전한다.

  잠깐, 명나라 말기에 비로소 천태산에 나타난 진씨 종족은 어떻게 이 전설을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천태산의 최초의 이주민이라고 일컫는 신라인들은 또 어떻게 이 전설을 알게 되었을까…

  "그러고 보면 신라의 지은 스님이 일부러 '태양 신화'를 찾아왔다고 해도 얘기가 되네요."

  배달족은 워낙 상고시절부터 태양을 숭배하던 족속이 아니던가. 신라의 승려 지은은 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천태산을 찾아왔을 수 있다. 아니라면 이역의 승려가 천태산의 골짜기에 숨어있는 옛 사찰의 폐허를 미리 알고 왔다는 걸 해석하기 어렵다.



천태산의 태양토템탑, 홍위병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탑이다.

  태양숭배 유적 역시 사찰처럼 신라인들의 하나의 구심점으로 되었을 수 있다. 신라마을이 천태산에 나타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그러나 한때 천태산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그들은 단지 옛 시, 글에서 간신히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촌락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고시절의 신화는 천태산에 돌탑과 암석화, 석총으로 분명하게 남아있다.

  천태산의 신라사는 더구나 비문에만 적혀있는 허망한 전설이었던가?…

  드디어 특기할 만한 사실이 발견된다. 몇 년 전, 산으로 통하는 길을 닦을 때 신라사의 옛 부처 조각상이 골짜기의 모퉁이에서 발굴되는 것. 신라사는 그 흔적을 분명하게 천태산에 묻고 있었던 것이다.천년의 전설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한 실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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