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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우리말 지명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4.14일 07:53
작성자: 허성운

  (흑룡강신문=하얼빈)연변의 많은 지역들에는 조선이주민들이 인가없고 이름없던 곳에서 황무지를 뚜지어 밭을 일구면서 정착하여 생활하는 과정에 지형특징에 따라 순수한 우리말로 지명을 단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본이 동북을 강점하면서 행정서류를 작성할 때에 한자로 표기하기 바쁜 우리말의 지명들을 본래의 뜻과 다르게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 적지 않다.

  용정시 삼합진에 위치한 '천불붙이'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 노인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불살라진 땅을 뜻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고유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옮겨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만들어 옛 간도지도에 한자로 '天佛旨山'으로 표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나타난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즉 사슴을 가리키며 저것은 말(馬)이다 하니까 정말 말이 되어버리는 고사처럼 '천불지산'이라는 잘못된 지명이 반세기동안 그대로 작동되어 내려오면서 '천불붙이'란 네 글자는 어느덧 세월의 비바람에 마모 되여 그 판독조차 어려워지게 되는 너무나도 서글픈 일이 생겨났다.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붙이는 원시림으로 빼곡히 들어선 망망한 임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들어와 화전을 일구면서 천불붙이의 역사가 시작 되였다. 하지만 '천불붙이'라는 원래의 지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그 대신 '천불지산'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최초에 두터운 봉금지대 장벽을 뚫고 나온 풀처럼 화전민은 천불붙이 산속에 움터 나온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초들이다. 혹독한 삭풍이 몰아치고 무시무시한 공포가 드리운 봉금지대에서 얼마나 많은 삶들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삶의 꿈이 허무하게 내버리어졌을까. 허나 오랜 세월을 거쳐 이런 화전민의 진출은 끊임없이 해를 이어 거듭되여 마침내 봉금장벽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연변에로 이주 할 수 있는 터널로 천불붙이는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온갖 전란과 변란에 휩쓸리어 삶의 터전이 무참하게 짓밟히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화전민의 처절한 몸부림은 천불붙이 심산계곡 곳곳에 묻혀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화전민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존재는 닥치는 대로 빼앗는 마적 떼들이였다. 이런 마적 떼들을 피해 천불붙이에서는 연기가 잘 나지 않은 싸리나무만 골라 불을 땠다고 하여 '싸리밭데기'라 부르는 마을지명까지 생겨났다. 수많은 화전민들은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하여 점점 더 높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아예 입구조차 막아버리고 살아왔다. 이로 하여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높은 고산지대에 올라와 정착하며 모진 혹독한 추위에 견뎌내야 하였다.

  "그 옛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화전 밭을 일구다 보면 얼굴까지 새까맣게 되어 늦은 저녁 집으로 들어서면 개도 임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짖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시기 불을 질러 나무와 풀들을 태우는데 곳곳에 타다 남은 나무 밑둥이 많았는데 이런 덜 탄 나무들을 부대라고 불러왔다. 연로한 할아버지들은 종종 한전 밭을 부대밭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화전민들은 순수 흙만 있는 땅보다 굵은 돌들이 섞여있는 밭을 선호하였다. 더욱이 천불붙이와 같은 고산지대에서는 돌들이 열기를 저장하고 수토유실을 막을 수 있어 천불붙이에는 숲으로 우거진 땅에 가끔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웅크리고 있는 곳들이 많다. 토박이 노인들은 그 자리가 바로 그 옛날 화전을 일구던 곳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천불붙이에 '파밭고래'라는 땅이름이 있다. 서래골을 거슬러 올라가 석이바위 맞은편에 음달진 곳에 자리한 골 지명이다. 최초에 화전을 일굴 때 땅속에 묻힌 나무뿌리와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기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파헤친 나무 뿌리와 돌들 사이사이로 봄이면 뿌리가 억센 풀들이 새파랗게 고개를 쳐들어 그야말로 파밭을 일군다는 말이 실감나게 맘에 와 닿는다.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가 입버릇처럼 자주 쓰는 파밭을 캔다. 파밭을 맨다는 말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마치 화석 같이 굳어져 내려오며 일상용어로 정착되어왔다. 삼합진 '비전동'은 원래 화전으로 불을 지른 땅에 봄이 되면 빼래풀들이 다른 풀뿌리보다 땅속에 깊이 박혀 있다가 재차 파랗게 고개를 쳐든다고 하여 '빼래밭골'로 붙인 이름인데 한자로 두리뭉실하게 "비전(菲田)동"으로 적어놓았다. 삼합진 "문암동"은 원래 함경도 전통가옥의 바당문 문턱처럼 바위가 들어앉은 곳에 마을 취락이 형성되었다 하여 '문턱바위'라 불렀으며 그 옛날 두만강을 자주 건너 제집 문턱처럼 드나들던 화전민의 이주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지명인데 "문암동"으로 모호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호전(户田)동'은 원래 '새밭데기'로서 새풀을 뜻하는 한자 구어체 '蘆'가 약자 '卢'로 바뀌어 적는 과정에 어처구니없는 '户'자로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와서도 이런 지명들은 '천불붙이'가 '천불지산'으로 둔갑되어 있듯이 여전히 '새밭데기' 지명은 '호전동'으로 '문턱바위' 지명은 '문암동'으로 '빼래밭골'은 '비전동'으로 표기되어 세월의 비바람 속에 그 고유지명의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천불붙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석사, ,동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 60호로 적혀 있고 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 되었으며 20세기 30~40년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 있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산비탈에 북빼기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 초에 접어들어서 산골이 깊어서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을 이주한 적도 있었다.

  해방 후 1958년도에 이르러 마을들을 통합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 서래골 마을들에서는 차츰 학교가 있는 청천 혹은 공사 마을과 수전이 있는 타지방으로 이사하는 집들이 많아 61년도에는 10여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70년대초에 와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90년대에 청천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서래골 마을 흔적은 사라졌다.

  연변에는 '천불붙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훈춘시 춘화진에도 있다. 훈춘 천불붙이도 삼합 천불붙이와 마찬가지로 화전민들이 최초에 연변에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에 나타난 지명 흔적으로서 이주민들이 이주경로를 파악하는데 관건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어쩌면 이는 먼 훗날 이주민들이 연변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를 앞서 절체절명 시기에 접어들어 화전민들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첫 이정표이다. 천불붙이는 화전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환기시킬 수 있는 연변 이주 역사의 풍토를 정착시키는 주요한 문화 아이콘으로서 천불붙이를 떠올리면 화전민이 으레 따라오고 화전민을 말하면 최초의 이주민을 거론하게 된다.

  오늘날 분명 시대는 변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버려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버리고 떠나보내야 하였다. 잘 살아보자고 초가집을 허물어 버리고 길을 넓히려고 고목를 베어버렸다. "경관 십년, 풍경 백년, 풍토 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산천초목의 경관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새기어 풍경의 한계를 뛰어넘고 대대손손 이어진 풍토는 천년 세월을 버텨나간다."는 도리이다.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선인들이 쌓은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거대한 자본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일어서고 있다.

  진실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문화의 유전자를 찾는 관건적인 첫 걸음이며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미래를 여는 비밀의 열쇠로도 될 수 있다. 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 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토종 씨앗처럼 우리 살과 뼈에 녹아들어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으로 움터 자라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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