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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60년] 모주석과 함께 찍은 추억의 50년대 사진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7.09일 17:39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맞이 특별기획 《기억속의 60년》

--50년대 전국신용대부금결산선진사업자 박세균옹의 추억 스토리

1956년 11월 4일, 지금으로부터 어언 56년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속에 그날의 소중했던 기억을 어제일처럼 또렷이 간직하고있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지난세기 50년대 전국신용대부금결산선진사업자로 전국에 크게 소문났던 박세균(80세)옹이다.

24살에 전국에 이름 날리고 모주석과 기념사진 남기다

당시 24살밖에 안된 젊은이였던 박세균은 전국신용대부금결산선진사업자로 북경에 가서 전국신용대부금결산선진사업자대표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회의에 참석했으며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음과 동시에 모주석과 함께 앞줄에 앉아 기념사진까지 찍는 무한한 영광까지 지니게 되였다.

일전에 기자는 연변주심계국의 국장사업을 마감으로 지난세기 90년대에 퇴직휴양하고 연길에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있는 박세균옹을 만나보았다. 박세균옹은 80고령의 년세라고는 전혀 믿고싶지 않을 정도로 젊고 정정해보였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부근에 있는 연길공원에 나가 신체단련을 꾸준히 견지한다고 했다.

50년대 모주석과 함께 찍은 추억의 진귀한 사진(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박세균)

우리의 화제는 자연히 박세균옹이 모주석의 접견을 받고 함께 기념사진까지 남겼던 1956년 11월 4일로 돌아갔다.

《그날 모주석께서 사전에 미리 대기중이던 우리들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문안의 인사말을 하셨고 앞줄 제가 앉아있는 곳까지 오셨다가 다시 돌아섰는데 가까이에서 거룩하신 령수님을 우러러 본 느낌은 한마디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것 같았습니다…》박세균옹은 그날의 그 격정을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말주머니를 풀어놓았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초중도 채 졸업못한채 힘들게 살아오다가 광복을 맞았고 당과 모주석의 은덕으로 편벽한 변강농촌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에서 전국신용대부금결산선진사업자로 크게 성장해 전국에 이름나고 모택동주석을 가까이에서 우러러 모실수 있는 무한한 행운까지 지니게 되였으니 당시로서는 그 격정과 감동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것이다.

그러나 박세균옹의 행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주석께서 앉으셨던 북경 천안문성루우의 관례대에도 직접 앉아보는 영광을 가졌고 또 당시 모주석께서 거처하시던 중남해의 처소도 직접 방문해 모주석의 생활체취를 피부로 직접 느껴보는 등 행복한 시간들의 련속이였기때문이다.

《모주석께서 살고계시는 처소는 소박하면서도 깨끗했으며 밥상에는 간소한 음식들을 드실것으로 짐작되는 식기 몇개만 차려져있었습니다. 화장실에는 모주석께서 애연가임을 느끼게 해주는 피우다만 담배곽이 놓여져있었습니다…》

당과 모주석의 은덕으로 고아가 전국선진사업자로 성장

24살 젊은 나이에 전국의 신용대부금결산선진사업자로 크게 소문나고 모주석의 접견을 받기까지는 박세균옹의 타고난 총명과 재질 그리고 새 중국을 창건해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게끔 이끌어주신 당과 모주석의 은덕과 갈라놓을수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가 살던 마을인 연길현(현 룡정시) 지신구 승지툰이 고향인 박세균(1933년생)은 해방전에 3년은 일본사람들이 꾸리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해방후 3년은 민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초중공부할 때 어머니가 세상뜨는 바람에 부득불 학업을 접고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머니의 사망과 함께 고아로 되여 어린 녀동생 둘을 돌봐야 하는 세대주가 됐기때문이다.그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박세균은 마을의 야학에도 나가고 주위 학식있는 사람들한테서도 허심히 배우면서 부단히 지식수준을 높여나갔는데 마을에서는 글 잘 쓰고 계산을 잘하는 재간둥이로 불리면서 마을의 각종 문서를 작성하거나 돼지 등 집짐승을 잡을 때면 계산서를 작성하는 일들을 도맡다싶이했다.

천성이 부지런한 박세균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 풍작도 거두었고 겨울이면 나무를 해서 룡정장마당에 내다 팔아 돈도 벌며 살림을 제법 잘했다.

그러던 1951년 3월, 박세균은 룡정시가지를 나갔다가 은행 직원모집광고를 보게 되였다. 행여나 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덜컥 시험에 합격되여 은행직원으로 일할수 있게 되였다.그때로부터 박세균의 타고난 총명과 재질은 빛을 발하게 되였다. 은행에 들어온지 석달도 채 안돼 박세균은 은행의 기본적인 업무는 물론 어려운 업무마저 모두 배워냈으며 글씨 잘 쓰고 문장 잘 짓는 뛰여난 재주로 날이 갈수록 은행지도부의 중시를 받게 되였다.

석달후 박세균은 조직의 배치로 개산툰은행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당시 개산툰에는 전국적으로도 이름있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이 있었다. 개산툰은행에는 또 한족직원들이 많아서 한어를 잘 배울수있었으며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에 있는 재능있는 원로회계사들한테서도 많은 회계재간들을 배웠다.

박세균은 개산툰은행에 있으면서 신용대부금사업을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타고난 총명과 재주로 신용대부사업령역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다. 특히 박세윤은 5종신용대부금사업에서 큰 성과를 따내고 그 경험을 연변 나아가 전국 각지에 크게 보급시켜 소문났다. 그의 이같은 5종신용대금사업성과는 전국적인 현지회의가 개산툰에서 소집될만큼 당시 큰 성과를 거두었고 경공업부에서 전국적인 범위에 박세윤의 5종신용대부금성과경험을 보급시킬만큼 영향력이 컸다.

5종신용대부사업은 구쏘련전문가가 1953년도에 중국에서 보급한 강습반에서 처음 제기되였는데 당시 개산툰은행에서 신용대부사업을 하던 박세균이 운명처럼 이 강습반에 참가해 학습하게 되였다. 강습후 박세균은 돌아와 실제와 결부하여 깊이있는 연구를 진행, 향후의 신용대부사업에서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5종신용대부금사업에서 정액신용대출 한가지만 놓고보더라도 박세균은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에서 원목을 쪄서 종이를 만들어 팔기까지 원가가얼마 들고 수익은 얼마쯤 되며 이같은 수익을 올리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등등 상세한 수치들을 정확히 계산해낼수 있었다. 이러한 계산수치에 근거해 기업에 맞춤한 신용대출을 제공하고 기업의 생산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불필요한 리식부담은 하지 않도록 하여 기업에도 리롭고 국가은행에도 리로운 신용대부금경험을 모색해내고 실제에 적용해 좋은 효과를 거두었던것이다.

그때 박세균은 공장에서 종이생산에 필요한 원재료인 표백분을 한꺼번에 3개월치씩이나 들여와 원재료가 적치되고 자금 회수와 리용이 원활하지 못한것을 보고 매번 한달치 원재료만 들여오게 하여 기업의 자금부담을 줄이고 자금리용률을 높여주었는데 기업생산은 물론 종업원들의 원자재절약열조까지 불러일으켜 좋은 효과를 보았다.

신용대부사업에서의 이같은 좋은 경험과 방법은 인차 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는데 길림성은행에서 반달간 개산툰은행과 기업에 내려와 상세한 조사와 대조사업을 진행하고 확인한후 널리 보급가치가 있다고 국가경공업부에 추천, 국가경공업부에서 원가를 낮추고 리식을 적게 물며 경제효익을 높이는 상술한 5종신용대부사업에 대해 크게 긍정하고 개산툰에 찾아와 전국적인 현장회의까지 소집했는데 모여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찬사를 받았다.

최고의 영예 그 이후…

회의의 주석단 성원으로 맨 앞줄에 앉아 기념사진을 남긴 박세균(가운데 사람)

24살 한창 나이로 전국신용대부금선진사업자로 표창받고 전국신용대부사업선진사업자회의 주석단에까지 올라 모주석의 접견과 함께 영광의 기념사진까지 남긴 박세균옹, 북경에서 돌아온 후 박세균은 조직의 배려로 길림재무학원에 가서 공부하면서 학문을 닦을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였으며 졸업후에는 연변의 공업, 상업, 국영농장을 주관하는 연변주재정세무국 부국장으로 발탁되였으며 사업성과가 돌출해 연변재정무역부 부부장, 연변주심계국 국장 등 직무를 련임하면서 연변의 재정회계사업과 심계사업의 발전에 돌출한 기여를 했다.

특히 박세균옹은 퇴직전 연변 심계사업의 선구자로 연변의 심계사업을 전국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게끔 이끌었고 수차 성 및 전국 심계사업선진으로 표창받았다. 과거의 영예앞에서 박세균은 입버릇처럼 본인의 성장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었고 그들이 이끌어주고 도와주었기때문에 자그마한 성과라도 따낼수 있게 되였다고 허심하게 자세를 낮추군 한다.

모주석과 함께 남긴 빛바랜 50년대 사진속 젊고 패기있는 박세균의 멋진 모습은 그가 걸어온 발자취속 숨겨져있던 이야기들과 함께 오늘날 우리들에게 분투와 도전 그리고 신심과 용기라는 삶의 자세를 제시해주고있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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