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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境界人) 김룡철 ‘문화의 운반자'로 살기까지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2.15일 10:22
--김룡철교수: 우리 교육의 제일 큰 목적은 인격을 양성하고 발달시키는



“나는 누구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일본의 연구학자들과 일반독자들속에서 깊은 반향을

일으킨, 중국서남지구 모쒀인(摩梭人)의 모계사회전통문화를 다룬 저서 (結婚のない国を歩く)와

(東方女人国の教育)을 뒤늦게야 읽고 난 필자는 팬의 한사람으로 학자라기보다 작가에게 다가서는 분위기로 저자

김룡철과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2019년

중일교육교류40주년포럼에서 발언하는 김룡철교수

“조선반도에 뿌리를 두고 중국에서 태여난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고 일본류학을 경험했습니다. 중국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현재는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북경호적, 중국려권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일본의 주민등록증과 영주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대학교수로서 공무원대우도 받고

있습니다.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못하지만 중국어로 중국현지에서 조사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영문자료를 읽을수

있으며 일본어로 대학교강의, 학술발표, 강연을 불편없이 하고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사회학적 전문용어로 자신을‘경계인(境界人,

marginal man)’이라

칭하는 교육학 학자 김룡철교수와의 인터뷰 첫 마디이다.

가장 큰

전환점

1955년, 화룡현의 평강벌에서 태여난 김룡철교수는

미술을 전공했던 아버지를 따라 자리잡은 도문시 마반촌에서 소학교,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당지부 서기 겸 농업중학교 교장이였던 아버지가

갑자기‘인민의

적'으로 몰리우게 되면서 갖은 무시와 비난을 당하면서도 김룡철은 책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김룡철은 아버지가 명예회복을 받고난 후 뒤늦게야

홍위병에 가입할수 있었고 다시 학생간부를 맡았고 학업을 마친 후 마반산에 귀향해 소학교에서 3년간 민영교원을, 3년간 마반산촌당지부 서기를

맡아하면서 나름대로의 평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1년 3월은 기억에 남는 한해였다. 전국적으로

상영된 기록영화 을 통해 김룡철은 일본이 페허에서 다시 일어 서게 된 요인이 축적된 인재의

존재이며 인재 양성의 고리인 교육을 틀어쥐였다는 판단을 감히 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몇년이 지난 후 아버지가 서점에서 사온 일본어교과서를

넘겨받게 되였고 아버지한테서 배운 기초일본어를 토대로 열심히 일본어를 독학했다.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김룡철은 학생시절에

꼼꼼히 머리속에 저장해 둔 지식과 그동안 자습했던 일본어능력을 크게 인정받고 동북사범대학 일어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순풍만범(顺风满帆)도 노력의 결과

10년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또 한번의 기회가

77급 대학생들을 찾아 왔다. 1981년, 학위제도재건의 일환으로 77년급 대학생을 주요대상으로 한 전국대학교연구생통일시험시범제도가 나왔고

따라서 합격자중 900명을 선발하여 미국, 일본,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등 나라에 국비류학을 보낸다는 중앙교육부의 전례없던 결정이 내려졌다.

때마침 자신의 전도를 두고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김룡철은 전공이였던 일본어전업과는 큰 련관성이 없는 비교교육학연구생시험을 치기로 결정했다. 시험을 석달 앞둔 1981년 여름방학에 김룡철은

동북사범대학 교육학부의 친구들한테서 30여권에 달하는 교과서를 빌려서 메고 고향으로돌아왔다. 그는 모교 선생님들의 배려로 매일 마반산소학교

교실에 묵으면서 교육학부 4년간의 교과서를 전부 통달했다. 시험 결과 그가 친 네개 과목 전부가 전국 1등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따냈다.

중앙교육부의 위탁을 받은 동북사범대학 비교교육학회 회장 량충의(梁忠义)교수의 지명선택을 받고 두번째 전환점에 도달한 그는 1982년 10월,

일본국비류학생 149명중의 한사람으로 일본히로시마(広島)대학 교육학부 대학원에 입학했다.

일사천리로

달렸다.

김룡철에게 있어서 노력은 항상 성과와 인과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결과는 과정을 배신하지 않았다. 1985년에 교육학석사학위를 수여 받은 그는 련속적인 흐름으로 1988년에 교육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1980년대는 인문학, 사회학부문의 박사학위취득이 힘들기로 유명한 일본이였다. 3년만에 순조롭게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사람이 그해 중국류학생인

김룡철 한사람 뿐이였던 연유로 여러번 신문과 텔레비죤에 뉴스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오끼하라 은사님(왼쪽)과

함께

1988년 류학생활을 마친 김룡철은 귀국의 길을

택했다. 그후 중국교육부 중앙교육과학연구소 비교교육쎈터에서 학술위원, 부주임 등 직을 맡으면서 부단히 학술론문집필과 연구조사를 멈추지 않은 그는

1991년,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육부의 파격발탁정책에 의해 중앙교육과학연구소 부교수로 발탁되였다. 서남소수민족지구에 대한 연구에 흥취를 갖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중국과 일본을 물론하고 교육학박사가 드문 시기였던

1995년, 류학시절의 지도교수였던 일본히로시마대학 오끼하라(沖原)학장의 퇴관으로 일부 인사변동이 있게 된 모교에서 교육학부 조교수 부임가능성에

대해 타진해왔다. 더욱 성숙된 연구자의 길을 걷기 위해 김룡철교수는 가족을 거느리고 8년만에 다시 일본땅을 밟게 되였다. 그는 대학원시기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교육학연구과 박사과정 전기와 후기의 연구지도 자격을 인정받게 되였고 수년간 방송대학 비상근강사로

초빙강의를 하게 되였다.

그러던 2003년,

가나가와겐리츠보건복지대학(神奈川県立保健福祉大学) 설립에 즈음하여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초빙받은 김룡철교수는 선후하여 인간종합・전문기초담당과 과장,

대학원보건복지학 연구과 보건복지학 전공 전임교수로 임명받았으며 수도대학도꾜(首都大学東京)의 비상근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2011년부터 3기에

걸쳐 보건복지학부 학부장을 련임한 6년간 그는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분야인 보건복지의료부문 전문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대학교의 운영방식의

확립에 확실한 공헌을 해왔다.

현재 일본교과서연구쎈터 특별연구원, 보건복지대학

지역공헌연구쎈터 쎈터장, 중일교육연구학회 회장, 학회지「중일교육론단」편집위원 등 중책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중국출판),

(중국출판), , ,

등 24권의 저작과 100여편에 달하는 론문을 발표하였다.

서남지구 소수민족교육문화에 대한

연구

1990년 여름, 류학을 마치고 귀국해 취직한 후 첫

출장이 잡힌 곳이 사천성 량산지역이였다. 1986년에 제정된 의무교육법의 실시정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산 좋고 물 맑은 신비하고 리상적인

곳이라는 인상밖에 없었던 그곳에 가서 받은 제일 큰 쇼크가 의무교육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인식이였다.“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우리한테 술이

차례지는가?”라는 사람들의 반응에 어찌할바를 몰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다.



운남성에서 희망공정으로 지은

학교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는 김룡철교수(왼쪽)

14년후인 2004년, 김룡철교수는 교육과 문화에

관한 비교연구방향을 중국서남지구에 돌렸다. 그해 가을, (和親政策)의 산 증인이며 로도

불리우는 마지막왕비 소숙명(肖淑明)씨를 만나러 루구호(泸沽湖)에 간것을 계기로 모쒀족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다. 그로부터

10년간 해마다 모쒀족부락에 대한 그의 조사연구가 진행되였다. 모쒀족의 모계사회체제에 관한 연구, 중국서남지구에서의 성인의례의 사회화기능에 대한

연구, 서남소수민족문화의 교육과정화(課程化)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를 세우고

모쒀족문화재기록 추진, 학교기숙사건설 지원, 도서기증, 일부교사와 기숙사취사원의 임금지불, 어린이복장제공 등 그들의 문화를 지켜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지금도 전통문화보전사업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연구자가 조사를 펼치는 현지에 영향을 끼쳐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은 뒤떨어진 견해입니다. 연구자는 현지인들과 친구로 되여 함께 고민하고 힘을 합쳐 미래를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다년간의

연구조사활동중 시종여일하게 지켜 가는 김룡철교수의 연구자세이다.

금후의 쩨마, 자신만의

교육학

제일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한 택시운전수가

철학과를 졸업했다고 하여 놀라웠고 의문스러웠다고 말하는 김룡철교수. 헌데 절대 놀라울 일이 아니였단다.

“재래의 교육학은 대체로 직업인, 국민성을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우리 교육의 제일 큰 목적은 인격을 양성하고 발달시키는 것이다. 대학은 엘리트만 들어 가는곳이 아니며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학교교육은 인류의 문화적인 다양성의 보전과 발전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문화를 보호하고 유지, 존속시킬수 있는가를 시야에 넣은 교육학을 제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문화에 대한 소비는 강요받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해야 한다. 귀찮고 합리적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인류에게 있어서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좋은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 남기겠는가가 교육의 과제라고 본다.그 과제를 풀어가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한가지만 말한다면

우리의 교육은 국어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하며 소수민족언어와 방언도 홀시해선 안된다.”

취재를 마무리 지으면서‘아이덴티티',‘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가장 쉬운 해석을 부탁해 보았다

아이덴티티란 바로 “나는 누구인가?”에 해당되는

대답이다. 아이덴티티는 한 개인이 소유하는 다면적이고 복층(複層)적인 개념으로서‘한사람에게 하나의 아이덴티티'라는 견해는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에서 생존하는 인간이 갖고 있는 다종다양한 요소를 무시하는 견해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하여 선택할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하다.

이문화적인 두개 이상의 집단들속에서 그 어느 하나의

집단에도 완정하게 소속되지 않는 존재를 ‘경계인(境界人)', 혹은‘주변인(周辺人)'이라 한다. 조선족이 바로 중화민족, 화교, 재일(혹은 미,한

등)중국인, 재일(혹은 미,한 등)조선족 등등의 여러가지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경계인'인 것이다.

“글로벌세계의 문화적인 공간을 이동하는

조선족은‘경계인'으로서‘문화의 운반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심을 주고 긍지로 차넘치는

한마디였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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