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총재 서일장군의 발자취 더듬어
(흑룡강신문=하얼빈)최성림기자 = 지난 6월 16일, 한국 국학연구소 김동환 ,정길영 ,임찬경 연구원, 국제국교상대학원 우대석 박사,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신효철 홍보국장,국학운동 시민 련합회 리명학 사무국장 등 한국 학술계 인사 6명으로 구성된 답사단이 밀산 독립운동유적지를 탐방하고 학술행사를 가지였다.
밀산시 김향란 부시장, 맹고군 전임부시장,민족종교사무국 채명군 국장 등 시위시정부 주요령도들이 답사단을 만났으며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고서일씨를 주제로 한 학술좌담회를 가지였다.
좌담회에서는 주제발언을 통해 만주땅을 질주하던 “독립의 혼” 서일장군의 항일 정신과 력사적가치를 평가하고 재조명했으며 학술적연구와 정부차원에서 밀산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한 발굴과 보존상황 및 연구대책에 대해 소감을 나누었다.
밀산은 당시 나라 잃고 만주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걸고 항일했던 곳이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최초 해외무장기지였던 한흥동,십리와가 이곳에 세워 졌으며 3500여명 대한독립군단의 근거지도 여기에 있었다.
이튿날 한국 학계 인사들은 현지답사를 진행했다. 제일 먼저 헤그회의 특사 리상설 선생이 세운 한흥동,안창호 선생이 개척한 십리와 등 독립운동 기지였다. 여러 선렬들에게 고유인사를 올린후 계속해서 밀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들을 돌아보았다. 중점적으로 서일장군의 반일활동 발자취를 역추적하면서 장군의 삶의 궤적과 민족사의 진수를 체험했다.
서일(1831-1921)장군은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이였다. 31세에 만주로 망명해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비였다. 그는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실질적지도자였고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였으며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였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흑하참안”이라고도 함)에서 부대를 잃고 마적에 의해 재기불능의 비운을 맞이해야 했던 그는 41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결하는것으로 민족에 사죄했다.
서일장군이 자결했던 당벽진 마을뒤 밀림속현장을 돌아보면서 동행했던 많은 사람들은 가슴떨리는 전률과 시대적 아픔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력사외곡과 함께 서일장군에 대한 인지는 제대로 되지 못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력사기록은 자료가 미비하고 이외일 정도로 빈약했다. “이분들이 이국 땅에서 흘린 피의 발자취가 력사의 뒤길로 희미하게 잊혀져가는 현실이 슬프고 가슴 아프다.국사책 덮고 국문을 나서서 현장속에서 력사를 연구해야 겠다.”고 김동환 단장이 침통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