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의 60년》-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특별기획(8)
1963년 내가 소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6.1절이 가까워왔다. 학교에서는 저급학년이였던 우리 학급은 집단무에는 참가 하지않지만 고급학년학생들과 함께 단체로 공원에 간다고 통지를 내렸다.
반급은 온통 기쁨으로 들끓었다. 지금처럼 볼거리 놀거리가 많은 세월이 아니였던 시절에 공원놀이는 우리들의 가장 큰 기쁨이였고 소망이였다.
퇴근하는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리자 기쁨대신 어머니는 한숨이 앞섰다. 입힐 옷이 변변치 않았던것이다. 평일에는 그런대로 기운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입히면 되 였지만 처음 참가하는 단체활동에 그럴수도 없어 난감했던것이였다.
어머니가 상심하시는 까닭을 어렴풋이 알게 된 나는 낡은 이불안으로 만든 대복 (하얀샤쯔)을 빨아 입으면 된다고 말은 하면서도 은근히 속으로는 한반에 다니는 승희처럼 이쁜 원피스를 사주었으면 했다.
맞벌이도 힘든 세월에 아버지가 우파로 징역살이를 떠나가고 어머니 혼자로임으로 식구들이 겨우 하루 세끼를 이어가는 형편인지라 대놓고 새 옷을 사달라는 말은 못하 고 틈만 나면 나는 한반에 다니는 누구의 옷은 어떻게 이쁘다고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6.1절을 앞둔 며칠전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가득했 다. 친구들은 출장갔던 아버지가 6.1절에 먹을 사탕 과자를 사왔다고 자랑이였고 또 누군가는 어머니가 새옷을 지어주었다고 폼을 냈다. 하지만 나는 자랑할것이 없었다.
투정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것은 알았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어머니와 심통 을 부렸다. 그날은 6.1절에 들고 갈 꽃을 만들려고 친구와 마을앞 가로수에 매달려 나무가지를 꺾었다. 어린 생각에도 혹시 옷이 해여지면 어쩔수없이 해줄지도 모른다고 나는 일부러 학교 갈 때만 입던 대복을 입고 나무에 올라갔다.
워낙 낡은 이불안을 쳐서 만든 대복이였기에 아껴 입어도 실룩거리는 옷을 일부러 나무에 오르면서까지 입었으니 결과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뻔하였다. 내가 바라 던대로 대복은 나무가지에 걸려 보기 흉하게 찢어졌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고약한것은 나는 일부러 찢어진 옷을 입은 채로 어 머니의 직장에까지 찾아가 꽃을 만드는 색종이를 사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해여진 대복을 보고서도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호주머니에서 돈 5전을 꺼내주셨다. 그 길로 나는 백화점에 가서 핑크색 종이 한장을 사왔다.
이튿날 아침 핑크색 종이는 내가 꺾어온 나무가지에 진달래꽃으로 변해있었고 하얀 대복은 어머니의 솜씨로 알뜰이 기워져있었다. 그것을 보고 억울한 나머지 나는 학교에 안간다고 울며 앙탈을 부렸다. 물론 어머니가 억지로 잡아끌어 학교에 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먹장구름이 드리워 기분이 우울했고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저녁에 퇴근하여 돌아온 어머니의 손에는 종이꾸러미가 들려있었다. 나를 불러 세운 어머니는 종이 꾸러미에서 요술쟁이마냥 하늘색 원피스를 꺼내였다. 깜짝 놀란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오똑하니 어머니만 쳐다보았다.
며칠전부터 장농을 뒤적거리며 고민하시던 어머니가 소중히 간직하셨던 첫날 한복을 뜯어 염색하고 친구에게 부탁하여 나의 원피스를 지어왔던것이다.
뜻밖의 기쁨에 나는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주정부에 출근하셨던 어머니는 그때 겨우 30세였다. 멋은 몰라도 나들이 옷 한 견지 변변치않았던 어머니는 몇번이고 첫날 한복으로 남들처럼 짧은 치마를 만들려 고 옆집 아주머니와 상의하면서도 시집올 때 외할머니가 지어 준 기념이라며 차마 손 을 대지 못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는 나에게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시 면 우리집도 남부럽지않게 살것이고 그때가 되면 내가 원하는 이쁜 옷들을 많이 사 준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6.1절날 아침이였다. 나는 어머니가 지어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남부럽지않게 기념활동에 참가하였다. 어머니의 사랑에 나는 온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이였다.
세월이 수십년 지난 지금도 어머니가 첫날 치마로 지어준 원피스는 나의 생애에서 둘도없는 가장 예쁜 옷으로 기억의 장농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여있다.
/림선자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