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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7]하룡원수가 극찬한 연변팀의 철문 박장수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8.25일 09:06
연변팀 전국 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을 찾아서 》(7)

-길림성팀 1등 공신 박장수



박장수선생과 부인 피화자녀사

길림성팀 설립 60주년과 월계관을 차지한 50주년을 맞으면서 필자는 길림성팀을 위해 크게 공헌한 내 고향 유명 꼴키퍼 박장수를 소개하련다.

박장수는 축구발원지인 룡정시 덕신향 중성촌 박남칠가정의 차남으로 태여났다. 덕신향은 해방전에 백익환명장을 비롯한 리혜봉, 정수일 등 많은 선수들이 나온 고장이다. 건국전에는 2명의 조선족선수가 중국국가팀에 입선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후에는 5명의 조선족선수가 국가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로는 최태환, 최증석(형제임), 최호균, 손중천, 박장수이다. 이들 5명 선수는 모두 중국축구무대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중 제1기 웽그리아류학을 다녀온 최증석과 최호균은 중국 일류 공격수로《분사식 비행기》라는 별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고 공격수 손중천은 길림성팀과 국가팀에 있을 때 꼴을 제일 많이 넣어 득점왕으로 되였으며 박장수선수도 중국 갑급팀중 제일 훌륭한 키퍼로 꼽히며 중국과 세계 여러 나라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장수에 대해 말하기전에 길림성팀이 설립되기전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후 조선족으로 조직된 동북팀이 나오게 되였다. 당시 중국의 최강을 자랑한 동북팀은 그 어느 팀도 꺾을수 있는 막강한 실력을 가지고있었다. 어느 축구팀이든 단시기내에 발전하고 강팀으로 성장되는것이 아니다. 선배들의 축구 기술과 정신을 본받아 오랜 세월을 거쳐 그 맥을 이어가야 하는것이다. 광복전과 해방후에 연변에서는 축구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빈번한 축구경기를 조직한데서 우수한 축구건아들이 용솟음쳐 나왔다. 그 덕에 동북팀에서 단꺼번에 4명 선수가 중국 제1대 국가팀 선수로 선발되였는데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4명 선수가 국가팀에 입선된 일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었다. 그때 4명 선수로는 김병규, 리봉춘, 최증석(룡정시 덕신향 출신), 김룡호였다.

1955년초에 중국축구협회가 설립되여서부터 동북팀이 해산되고 이해 8월에 길림성팀이 설립되였다. 첫해에 위만주국때부터 뽈을 차온 박로석이 지휘봉을 잡다가 1956년부터 중앙방어수로 있었던 박상복이 줄곧 길림성팀의 감독을 맡아하다싶이하였다.

1958년 길림성팀에서 일부 선수들이 나가고 지운봉, 허명호, 정지승, 동경춘 등 우수한 선수들이 팀에 들어왔는데 이때는 길림성팀이 장대했던 시기였다. 그때 웬만한 감독이 맡아도 1등을 할수 있는 팀이라는 평을 들었으나 길림성팀에는 제일 큰 허점이 있었다. 바로 훌륭한 키퍼가 없어 좋은 성적을 올릴수 없었다는 점. 길림성팀의 꼴키퍼는 갑급팀가운데서 꼴찌나 다름없었다.



1965년 전국축구갑급리그 우승을 한 뒤

필자는 과거에 리광수, 정종섭, 정지승, 문승학 등 로선수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우리 팀이 높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원인은 꼴키퍼에 있었습니다. 잡을수 있는 공도 잡지 못하다보니 패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년간 여러 곳에 가서 키퍼를 물색해보았지만 그꼴이 그꼴이였습니다.》

필자는 10년전에 조선족축구 발원지인 룡정시 덕신향의 흘러간 축구사를 쓰면서 연변대학 축구학부에 있는 윤학주교수, 최동섭 등 길림성팀의 생전 축구원로들을 만나 과거 길림성팀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

윤학주교수는 필자와 이런 말을 했다.

《길림성팀은 꼴키퍼가 없어 내가 학교 다닐 때 우리 동북사대 꼴키퍼까지 데려간적 있었습니다. 생전에 리광수는 나와 자주 접촉하면서 길림성팀이 키퍼때문에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고 아쉬운 마음을 늘 털어놓기도 하였으며 그 <문화대혁명>을 크게 원망하였지요.》

필자와 허물없이 지냈던 최동섭교수는 《너의 고향인 덕신향에서 훌륭한 키퍼와 선수들이 많이 나왔기에 길림성팀이 상승세를 그었고 1등까지 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덕신향에서 나온 유명 선수들을 자상히 알려주는가 하면 길림성팀의 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신 김문선생을 꼭 글에 넣으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1957년 길림성팀에서는 연변 각지를 누비면서 골키퍼를 물색하던중 연길현체육학교 권투반에 있는 박장수가 눈에 들어 연변체육학교 훈련반에서 그를 양성하기로 하였다.



젊은 시절의 박장수선생

박장수는 같은 년령대에서 키가 득별히 컸으며 손도 매우 컸다. 산골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이 심부름을 시키면 아무리 먼 곳이여도 그리고 야밤중이라도 갔다오는 그런 효자였고 담이 큰 소년이였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그를 《겁 모르는 아이》라고 불렀다. 중성촌은 앞뒤산이 꽉 막힌 시골로 그때 그 시절에는 범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도 곰, 승냥이를 봤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담이 큰 박장수는 남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도 시키는대로 심부름을 다녀오군 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덕신중학교에 입학한 박장수는 키가 크다보니 롱구와 권투에 흥취를 가졌을뿐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권투에 흥취를 가진 그는 유명 축구선수인 김문의 소개로 연길현체육학교 권투반에 오게 되였다.

필자와 동창생인 박광식의 아버지 박장송(93세, 박장수의 형님)도 한때 길림성팀과 연변팀에서 이름이 있었다. 지금 생전인 박장송로인은 동생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걔는 연변체육학교 훈련반에 있을 때 국가팀과 함께 조선에 갖다온후 조선으로 가겠다고 어찌나 애를 먹였던지 훈련반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셨수다. 부모들 속이 얼마나 탔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엔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나는 그때 걔를 보고 길림성팀에서 꼴키퍼가 없어 너를 양성하자고 하는데 가지 말고 중국에서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라고 얼마나 타일렀는지 모릅니다. 나도 축구를 해보았기에 알지만 팀에서 관건은 꼴키퍼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꼴키퍼를 웬간해서는 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는 나의 물음에 박로인은 《솔직히 말해서 모든 꼴키퍼는 심술이 많습니다. 욕하면 점점 왜지밭으로 가지요. 우리 동생이 바로 그런 성미였지요. 꼴키퍼는 다른 선수보다 흔치 않고 양성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장수는 나와 부모들의 권유로 끝내 조선에 가지 않고 훈련에 뛰여들었지요. 혹 집에 와서도 공을 갖고 소학교 운동장에서 고심히 훈련하였지요. 내가 슈팅을 날리면 받는 련습을 무수히 하였는데 돌멩이 많은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막 뒹굴면서 공을 잡군 하였지요. 걔는 워낙 겁이 없다보니 흙탕이고 뭐고 가리지 않았지요.》라고 했다.

박장수는 타고난 재질이 있었는지 훈련에 인츰 적응되여 1958년부터 길림성팀의 꼴문을 지키게 되였다. 몇년간의 노력을 거쳐 박장수의 꼴잡이기술이 점점 제고되자 《인제야 길림성팀에서 꼴키퍼를 잘 양성하였다》는 선수들과 팬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그도 인기인물로 되였다. 그 당시 전국갑급팀에서 날아오는 공을 몸을 날리면서 잡은 꼴키퍼는 오직 박장수뿐이였다고 한다.



1982년 형님, 형수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박장수선생(오른쪽).

제일 훌륭한 감독에 잘 정비된 축구팀이라도 꼴키퍼가 잘못하면 치명적타격을 받는다.

1950년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박장수가 길림성팀의 꼴문을 금성철벽처럼 지켜낸데서 길림성팀은 상승세를 그었다. 그때 운동장내의 기본지도는 선수인 리광수가 많이 하였다. 덕분에 1958년 4등, 1960년 4등, 1962년 4등, 1965년 1등 등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런 성과에는 꼴키퍼 박장수의 노력이 절반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축구계 원로들과 많은 축구팬들은 《박장수의 큰 공로가 있었기때문이였다》고 칭찬하였고 다른 선수보다 박장수선수를 에워싸고 포옹까지 하는 축구팬들이 많았다고 한다.

길림성팀은 꼴찌 키퍼로부터 전국갑급팀 최고 키퍼를 양성하여 전국 갑급팀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후에 국가팀에서 박장수를 꼴키퍼로 요구하였으나 당시 중공연변주위 서기 겸 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장수가 꼴문을 오죽 잘 지켰으면 당시 중앙정치국 위원이며 국무원 부총리,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있었던 하룡원수까지 《당신은 철문과 같다(你是铁门一样)》고 극찬해마지 않았겠는가?! 이런 극찬을 받은 사람은 중국의 축구사에 오로지 박장수밖에 없었다.

1965년 길림성팀이 1등을 할 때 감독에 한수은, 지도원에 박만복, 리창린이였으며 선수들로는 박장수, 라산묵, 홍정우, 김정식, 정지승, 류진석, 김석주, 지운봉, 동경춘, 정동권, 허경수, 문승학, 지청룡, 문학실, 지수길, 정종성, 문형덕, 최창국, 당봉상(한족) 등이였다(《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체육사에서 참조).

1965년 1년간 지도를 맡았던 박만복이 물러나고 1966년에는 《중형땅크》별호를 단 리광수가 사령탑을 잡았다. 길림성팀은 남방에 가서 고강도 훈련을 마치고 전해 1등한 그 기세로 갑급경기에 뛰여들었다. 이해 6월까지 길림성팀은 1등과 몇점 차이 없이 2등에 머물렀다.그러나 《문화대혁명》이란 사악한 바람이 중국대지에 불어치자 길림성팀의 우수한 축구건아들은 농촌이나 공장으로 쫓겨가는 비운을 맞게 되였다. 박장수도 연변자동차수리공장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걔는 워낙 술을 좋아하는데다가 안해마저 먼저 세상을 뜨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 일찍 돌아갔다》고 말하는 박장수의 형님인 박장송로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박장수의 안해 (피화자)는 길림성스케트팀 선수로 1959년 전국스케트경기 3000메터 개인종합 5등, 1963년 1월 목단강에서 열린 전국대회 500메터 6등,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에스빠냐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따낸 선수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꼴키퍼였던 박장수는 길림성팀을 위해 자기의 청춘과 정열을 바친 명선수임에 틀림없다. 그가 그라운드에 남긴 자욱은 조선민족의 축구사에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것이다.

/김원범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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