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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음악이 살아야 자부심도 남는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11.09일 11:32
조선족전통음악의 보존과 계승 고민해온 김남호의 음악인생

  (흑룡강신문=하얼빈)마국광 윤운걸 기자=지난 10월 31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출판식을 가지고 공식 출판된 '중국조선족전통음악론'. 지인들의 말을 인용하면 전통민족음악의 력사가 이 책에 담겨있다.

  저자 김남호씨는 조선족 예술사회에서 성망높은 작곡가일뿐만 아니라 음악연구와 평론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실적을 올린 음악평론가이다.



  그는 또 조선족 전통민요 '아리랑'의 중국무형문화재 등재에 관건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전반 예술생애에 직장을 수많이 옮기면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한편 가곡, 동요, 기악곡, 무용곡 등 다양한 장르와 풍부한 소재의 700여수 음악작품을 창작했다.

  그는 국가급무형문화재 '판소리'와 '아리랑'의 전승인이라는 신분과 더불어 여러 음악관련단체의 성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중국조선민족음악의 발전에 힘써왔다. 그는 특히 조선족전통음악의 앞날에 대해 고민하면서 민족의 정신의식과 기백이 깃들어있는 전통음악을 계승해나가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있다. 민족전통 계승발양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본지는 김남호선생님의 음악생애를 통해 그의 주장을 정리해본다.

  현재까지 김남호씨의 삶은 중국조선족민간음악의 수집과 정리, 연구와 창작으로 점철됐다.

  그는 '중국조선족민간음악연구'와 '중국조선족전통음악.대중음악론'등 여러편의 저서를 저술했고 기타 국가급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해 중국조선족민간음악의 수집과 정리, 리론연구수준의 제고와 대내외 홍보에 큰 기여를 했다.

  말 그대로 중국에서 조선족 전통음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일에 혼신을 바쳤다.



  도급변했던 환경속에서 변하지 않았던 꿈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 하는 아버지의 영향과 동네 오른들의 소리판을 통해 민족음악을 접촉하면서 음악재능을 보였던 김남호는 커서도 음악창작에 대한 추구를 계속했다.

  '반우파투쟁', '정풍운동'과 같은 극좌적 정치운동이 중국을 휩쓸때 연변인민방송국에 있었던 김남호는 '반동작가'모자를 쓴 한 작곡가의 음악 '벼가을의 노래'를 방송해 '방송사고'를 내고 연변가무단에 전근됐고 이곳에서 음악과 관련없는 행정업무를 보게 됐다. 이때는 비록 창작활동이 저조기에 들어선때였다. 그럼에도 공백은 남기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는 주로 동요창작에 몰두했다.

  연변가무단에서 화식관리원직을 맡으면서도 '우리네 구입원은 밤낮 바쁘다지요'라는 곡까지 써내는 사람이였다.

  연변가무단에서 행정업무를 맡았던 시기는 음악로정에서 저조기였지만 전화위복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음악창작은 자유로워지면서 장르가 다양해지고 소재가 풍부해졌으며 민족풍도 짙어졌다.

  60년대 부터는 무용곡을 창작하기 시작해 왕성한 창작활동과 더불어 음악예술생애가 또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그의 일관된 민족음악관이 관철되고 투철한 민족음악사상이 실현된 시기였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그도 '복고주의'등 루명을 쓰고 비판과 투쟁의 대상이 됐지만 정치운동을 경험한적 있는 그는 수령숭배와 같은 당시 사회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창작하면서 음악창작을 계속했다.

  그는 퇴직 전까지 10번이나 전근을 했지만 왕성한 창작의욕은 줄곧 불탔으며 가는곳마다 인정을 받을수 있었다.

  1980년대부터 그의 음악창작은 전례없는 전성기를 맞았다.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김남호 작곡집'과 동요곡집 '우리마을 보배산'을 출판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리론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앞서 기술한 저서들이 하나둘 출판되기 시작했다.

   "아리랑은 조선반도뿐 아닌 조선족의 음악"

  조선민족의 전통음악인 '아리랑'(21가지 버전)은 2011년에 국무원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로 등재됐다. 이 과정에 김남호씨는 기초작업을 해 아리랑이 무형문화재로 등재될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 근거란 아리랑은 중국 조선족의 음악이기도 하다는것을 분석한것이다. 아리랑이 문화재로 지정된후 해외에서 론난이 불거졌지만 김씨는 자기의 당당한 주장을 폈다.

  아리랑의 뿌리는 말할나위 없이 조선(한)반도이지만 중국에서 조선족의 음악이라고 주장하는건 아리랑이 대중성, 민족성은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민속성도 함께 띠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본에 의해 우리 민족이 중국에 건너올 때 아리랑을 부르며 건너왔다. 중국에 가서 일을 잘해서 집에 돌아가 잘 살자는 생각으로 건너오면서 불렀고 그런후 몇십년이 지나가니 민속성이 됐다.

  해방전쟁시기에는 수만명 조선족들이 싸우러 나갈때도 가족들은 아리랑 타령을 부르면서 그들을 배웅했다. 당시는 빨리 국민당을 몰아내고 행복하게 살자는게 민속성이 됐다.

  해방후 조선민족도 중화민족의 식구가 됐다. 소수민족으로 주인공이 돼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면서 노동했다. 한마디로 공산당의 인솔아래 잘 살아보자는 념원이 민속성으로 됐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서 민속성도 변화됐다.

  이런 시대에 따른 조선족만의 민속성이 배여있기 때문에 아리랑은 조선족의 음악이기도 한것임을 김남호씨는 력설했다.

   조선족전통음악 앞날에 대한 우려

  김남호씨는 90년대부터 조선족전통음악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찍 1998년 발표한 '조선민족 전통음악문화의 사나운 운명'이란 론문에서 벌써 조선족 전통음악의 현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통음악이란 조선족이 연주하고 노래하고 창작한 작품이 아닌 조선족의 민요, 판소리, 민족기악 등 전통음악을 말하는것이며 또 이를 기초로 발전시킨 창작음악, 구연음악 및 그 창법등 일련의 진짜 전통음악문화를 이른다고 그는 말한다.



  시장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조선족전통음악의 립지는 점점 줄어들고있다. 그는 "전통음악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당시 60년대 정치환경에서 다른 일을 한다는건 허락되지 않았다. 현재 고작 해금, 가야금을 연주하는 정도지만 이것조차도 무대에서나 볼수 있지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은 없다. 연변에 8개 현시가 있는데 전통음악을 하는 인재를 요구하는 곳이 없다. 인재를 송출해봤자 다른 업무를 맡은 경우가 절대다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도 사람들이 전통음악에 대한 연구를 달가와하지 않고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음악만 해서는 밥벌이가 안된다는 극히 현실적인 리유때문이다.

  그가 전통음악의 앞날을 걱정하는것은 리유가 있었다. 1990년대 중국 중앙민족관현악단의 오스트리아(奥地利) 공연이 대성공을 거뒀는데 다른 나라 민족에게는 없는 민족적인 특징과 풍격때문에 초청공연이 가능했던것이고 큰 사랑을 받았던것이다. 또 연변교향악단이 한국초청공연에서 민족악기를 배합한 공연이 더 절찬을 받았는데 민족요소가 출로임을 말해줬다.

  우리의 민요와 전통음악은 대대손손 내려오며 이룩한 민족적 재부로서 여기에는 우리민족의 강인한 정신적 의지와 기백이 슴배여있다. 때문에 민요를 부르고 전통음악을 배우는것은 곧 우리민족의 자부심과 기개를 떨치게 하는 정신문화의식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김남호씨는 말했다. 그는 "다른 나라들도 민족의 사물을 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가"고 비교하며 설명했다.

  민족전통예술을 발전시키는데서 김남호씨는 서양과 민족간의 예술체계비례를 조절하고 서양음악과 통속음악은 자립하게 하고 민족음악은 국록을 주는 우대정책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예술홍보관련 당정부문 령도자, 문화예술계, 라디오방송, 텔리비전과 협력해 전통음악청취자 양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김남호씨는 "물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구촌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옅어지겠지만 민족이 존재하는 한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력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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