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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의 검은 샘물을 마시던 명승의 이야기 [제22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8.19일 09:59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산중의 옛 이야기는 웬 농가의 뜰에서 발견된 비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광양산(廣陽山)의 산 고개는 마치 담처럼 이 농가의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다. 광양산은 하북성(河北省) 남부의 명산으로 삼면 모두 해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산은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있어서 이름이 나는 법", 도교의 교조(敎祖)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을 쓴 후 바로 이곳에 은거하면서 수련했다고 전한다.

  솔직히 사장촌(寺庄村)도 이름처럼 산중에서 수련하는 사찰 마을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택시기사 임씨(任氏)는 형태(邢台)의 도심에서 불과 80㎞ 상거한 곳에 이런 산골 마을이 있는 줄은 여직 몰랐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산 어귀에는 마을 이름이 아닌 사찰 이름의 비석이 서있다.

  "처음입니다, 오불꼬불한 산길을 오르면서 무척 긴장이 되던데요."

  산속의 촌락은 대개 흙집이나 초가이지만, 이곳은 흙처럼 흔한 돌을 쌓아 집을 짓고 있었다. 농가의 뜰에 뉘어있는 옛 비석도 원래는 식탁 대용품으로 쓰였다고 한다. 네모반듯한 돌비석은 이리저리 손질할 품을 덜어주고 있었던 것.



농가의 툇마루로 되고 있는 옛 비석.

  집주인 진생금(陳生金, 86세) 옹의 알아듣기 힘든 현지 방언 때문에 아들 진맥량(陳麥良)이 드문드문 '통역'을 했다.

  "사찰의 비석은 네 조각인데요, 달구지로 실어온 것은 그중의 두 조각이라고 해요."

  마을 근처의 이 고찰은 지난 세기 60년대 대륙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에 의해 철저히 훼손되었다. 진금생 옹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 무렵 사찰 터에서 옛 비석 일부를 집에 옮겨왔다고 한다.

  옛 사찰은 칠천사(漆泉寺)라고 불렸다고 현지의 지방문헌인 '사하현지(沙河縣志)'가 기록하고 있다. "칠천사는 (당나라) 정관(貞觀)5년(631) 칙령으로 설립"한 황실사원이며 "칠천(漆泉)이 사찰의 왼쪽에 있는데 그 색깔이 옷처럼 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칠천은 물이 깊어서 색깔이 검게 보인다는 의미였다. 산중의 샘터 아래에 둑을 쌓고 있었는데, 물이 많아서 작은 댐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이지 사찰에서 물은 어떻게 길어먹나 하고 머리에 달고 산을 올라왔던 의문이 풀리는 대목이었다.

  샘물은 사찰의 이름을 만들었고 또 형태의 지명을 만들고 있었다. 나라 이름 형(邢)은 옛날 우물 정(井)과 통했다. "혈지(穴地)에서 물이 나오니 정(井)이라고 한다"고 '강희자전'이 해석한다. 형태는 옛날부터 샘물천지로 소문난 고장이었으며 이에 '따라 정방(井方)이라고 불렸다. 상고시절 황제(黃帝)가 형태 일대에 우물을 파고 밭을 만들었으며 성읍을 쌓고 거주했다. 후세의 사람은 황제의 이 공덕을 기리기 위해 우물 정(井)과 고을 읍(邑) 두 글자를 하나로 합쳐 나라 형邢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우물은 실은 뙤창을 신문지로 도배한 이 돌집이 아닐지 한다. 눅눅하고 침침한 집에는 햇빛이라곤 들어오지 않았다. 어둔 집에서 얘기를 나누다 말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진생금 옹은 곧바로 문가의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처마 아래에 툇마루로 놓은 그 돌이 바로 옛 비석 조각이었다. 이제는 식탁이 아니라 툇마루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비석은 마을은 물론 시에서도 다 알고 있는 '보배'라고 진맥량이 자랑했다. 언제인가 한국의 학자들이 돌집에 찾아와서 비문의 탁본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당신들 선조의 '보배'가 아닙니까? 돈을 내고 사가세요." 진맥량이 권하는 말이다.

  사실상 음식 찌끼가 널려있는 이 비석 조각은 진씨네 집에서는 그저 '툇마루'로 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외국 학자들도 관심하는 것은 그 무슨 '보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선뜻이 사회에 반환할 의향이 꼬물치도 없는 듯 했다.

  '대당광양칠천사혜각선사비(大唐廣陽漆泉寺慧覺禪師碑)'는 2014년 현지의 고고학 요원들이 칠천사 옛터를 발굴하면서 발견되었다. 뒤미처 누씨(樓氏) 성의 한국 유학생이 논문 '새로 발견된 신라 입당구법승 혜각 선사의 비명(碑名)'을 발표하면서 또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혜각 선사는 육조(六祖) 혜능(慧能, 638~713)과 칠조(七祖) 신회(神會, 670~762)의 법맥을 이은 계승자이다. 그는 대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에 의해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에 소개될 정도로 신라 최고의 명승이었다.

  혜각 선사의 비석은 전체 높이와 넓이가 각기 215㎝와 104㎝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 내용을 분석한 누씨 성의 유학생 논문에 따르면 혜각 선사는 유식학(唯識學)이 성행했던 신라 성덕왕(聖德王, ?~737) 때 선종(宗禪)을 배우기 위해 입당(入唐)했다. 혜각 선사는 칠조 신회의 직계제자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그는 형주(邢州, 형태) 개원사에 육조 혜능 비석을 세우는 등 하북 지역에서 남종선(南宗禪)의 권위를 확립했던 것이다.



혜각 선사가 육조 혜능 법사의 비석을 세웠다고 전하는 형태 시내의 개원사.

  칠천사는 형주 나아가서 전국에서 남종南宗의 '돈오선종(頓悟禪宗)' 중심사원이었다. 사찰을 지을 때 당나라의 명장 위지경덕(尉遲敬德)이 직접 현장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위지경덕은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저택의 수호신 즉 문신으로 되고 있는 인물이다. 유불선의 성현과 신선의 사적을 서술한 명나라 때의 저서 '삼교원류수신대전(三敎源流搜神大全)'은 문신의 연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일찍 싸움터에서 사람을 무수히 죽였다. 그래서 즉위한 후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았다. 귀신들이 날마다 악몽에 나타나서 궁전 내외에 기와와 벽돌을 뿌리며 소리를 지르지 몹시 두려워했다. 신하들은 원수 진경(秦琼)과 대원수 위지경덕 두 사람이 밤중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소지한 채 궁문 양쪽을 지키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날 밤 과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또 날마다 이러했다. 시간이 오래되자 이세민은 두 장군이 밤마다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여 궁중 화공에게 두 눈을 부릅뜨고 손에 무기를 든 갑옷 차림의 두 장군의 그림을 그려서 궁문 양쪽에 걸어놓게 했다. 그때부터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훗날 민간에서 이를 따라 문신 풍속이 생기게 되었다."

  민간에서는 문짝에 진경과 위지경덕 두 영웅인물의 그림을 붙이고 집안의 평안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했다. 재미있는 일은 한때 이세민의 당나라 군대를 뒤쫓아 하북 일대에 이르렀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淵蓋蘇文) 역시 이런 문신으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청(明․淸)과 민국(民國, 1912~1949) 시기, 형태 북쪽의 석가장(石家庄) 일대를 중심으로 하북성의 많은 지역에서 연개소문은 문짝에 붙어있는 수호신이었다고 한다.

  어찌됐거나 형태 부근에서 이세민의 군대를 뒤쫓은 적장은 연개소문이 아닌 두건덕(竇建德, 573~621)이라고 전하고 있다. 두건덕은 수(隋)나라 말, 당나라 초 하북 일대에 웅거하고 나라를 세웠던 농민봉기군 수령이다.

  잠깐, 옛 비석의 비문에 적힌 이야기는 공교롭게 '고구려'에서 한데 만나고 있다.

  대업(大業) 7년(611), 수양제(隋煬帝)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의 징병을 한다. 이때 두건덕은 군중에서 두목인 백인장百人丈을 맡고 있었다. 그는 병사와 민중들이 고생에 허덕이는 걸 보고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나라 건국시기에 두건덕이 세운 하(夏)나라를 비롯하여 대륙 경내에는 무려 10여개 정권이 존립하고 있었다. 무덕(武德) 4년(621), 두건덕은 형태 부근의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체포되며 그해 장안에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 두건덕이 언제인가 진왕(秦王) 이세민을 쫓게 되었다고 한다. 이세민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서 그를 사찰에 숨겼으며 두건덕을 속여 다른 데로 추격하게 했다. 미구에 이세민은 인사를 하려고 그를 찾았으나 홀연히 오간 데 없었다.

  "똑 마치 연개소문이 이세민을 쫓은 전설 이야기의 복제판 같네."

  실제로 연개소문이 고구려 군사를 인솔하여 이세민의 당나라 군대를 추격한 이야기는 하북성은 물론 동부의 산동성과 남부의 강소성(江蘇省)에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는 훗날 이세민을 하늘이 내린 황제로 분식하기 위해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았다거나 심지어 패배를 전승으로 바꾸는 등 억지로 뜯어고친 흔적이 적지 않다. 어쩌면 두건덕의 이세민 추격설도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따온 것 같다.

  그러나 이세민이 형태 일대에서 두건덕의 부대와 격전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형태의 서남부에는 그때의 유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칠천사의 뒷산에는 이세민의 군대가 주둔하던 진왕채(秦王寨)가 있으며 북쪽에는 진왕호(秦王湖)가 명승구로 거듭나고 있다. 생사의 위험에서 누군가 이세민을 구했던 일도 전설이 아닌 것 같다. 칠천사의 부근에는 어가를 구했다는 의미의 구가촌(救駕村)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현재 아홉 가구라는 의미의 동명의 촌명 구가촌(九家村)으로 불린다.

  칠천사는 이에 앞서 광양산에 있던 고찰이었다. 이세민이 숨어든 사찰은 바로 이 칠천사였다. 이세민은 사찰의 부처가 현신하여 그를 보우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이곳에 부처를 위해 도장을 짓겠다고 발원했다. 그래서 즉위한 후 특별히 위지경덕을 파견하여 광양산에 사찰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명나라 만력(萬曆) 2년의 '사하현중수칠천사전우기(沙河縣重修漆泉寺殿宇記)'의 기록은 이를 견증하고 있다. "(사하)현 서쪽 80리 정도 되는 곳에 옛날부터 칠천사라고 하는 고찰이 있었으니,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대당 연간에 중수(重修)했으며 위지경덕이 현장감독으로 있었으니 지금까지 천여 년이나 된다."

  "우리 집에 있는 사찰의 물건은 이뿐만 아닌데요." 진맥량은 마모가 심한 석비에 아쉬워하고 있는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집의 주인 진생금 옹, 돌집 주변에 주추돌 등 사찰의 유물이 적지 않다.

  진생금 옹의 저택 어귀에는 사찰 옛터의 주춧돌이 있었고 근처에는 용무늬의 장식용 돌조각이 있었다. 기실 칠천사의 옛 비석만 해도 무려 25종이나 발견된 걸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까지 존속했던 천년 사찰에는 유물이 적지 않았다.

  칠천사의 옛터는 산언덕을 하나 더 넘어 동북쪽으로 약 3리 되는 산비탈에 있었다. 도중에 길가에서 옛 우물을 만났고 또 비탈의 밭에서 사찰의 유물을 만날 수 있었다. 허리를 치는 수풀 속에는 사찰의 옛 담과 연자방아, 주춧돌, 기와 등이 여기저기에 시체처럼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칠천사 옛터의 숲속에 연자방아 등 유물이 널려있다.




칠천사의 옛터에 홀로 서있는 명나라 때의 비석.

  사찰 옛터까지 동행한 임씨는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곳 정부부문은 문물을 수집, 보관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나 보네요."

  산비탈의 펑퍼짐한 곳에 명나라 때의 석비가 고독하게 서서 고찰의 옛터를 알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울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더구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비문에 따르면 혜각 선사는 칠천사의 개산(開山) 주지였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되어 이세민과 만나게 되었고 또 이 황실사원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혜각 선사는 종국적으로 귀국하지 않고 당나라에 입적했으며 그의 전기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칠천사의 잔존한 비문은 혜각 선사의 일부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혜각 선사의 이야기는 칠천사의 비석처럼 파편으로 되어 형태의 산야에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문득 농가의 '툇마루' 가녘에 외롭게 자라던 풀 한 포기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올랐다. 칠천사의 주지 혜각 선사가 그 툇마루에 앉아서 천년 사찰의 폐허를 우울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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