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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농민폭동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4.09일 09:05
반년 사이 680여차 폭동 일으켜

봉건세력 타격 토지혁명

단행

중공동만특위 건립

“‘8.1길돈폭동’을 뒤이어 연변 각지에서는 련이어

폭동이 일어났는데 ‘5.30폭동’이 일어난 1930년 후반년에만 하여도 크고 작은 폭동이 선후로 680여차나 일어났습니다. 촌마다에 폭동위원회가

건립되였고 농민들은 ‘폭동! 폭동! 또 폭동!’의 구호를 부르면서 열광적인 기분으로 투쟁에 림했습니다. 이러한 폭동은 모두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일어났는데 목적은 토지혁명의 실현과 유격대와 유격근거지의 창건에 있었습니다. 력사에서 이 폭동을 ‘간도농민폭동’이라고

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에서의 그번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제2차 ‘좌’경로선의 영향하에서 범한 ‘좌’경모험주의였고 투쟁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중외반동세력에 대해 여지없이 타격했고

광범한 군중들 속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심각히 심어주었으며 공산당의 기층조직은 물론 공청단, 농민협회, 반제동맹, 반일회 등 군중단체가 크게

확대되게 하였는바 튼튼한 군중기초와 간부기초를 닦아놓았다고 지적하였다.

1930년 9월 20일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료여원은

성당위에 〈동만의 길돈철도연선 각 현을 순시한 데 대한 사업보고〉를 제기, 25일 료여원의 보고에 근거하여 만주성위에서는 ‘지시편지’를 발부하여

동만특위를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안도, 무송, 화전, 액목, 장백 등 10개 현을 동만특위에서

령도하기로 결정했다. ‘지시편지’는 동만의 금후 중심임무와 책략 및 조직건설, 선전 등 문제를 상세히 천명했다.

10월 10일, 료여원과 양림은 성당위의

‘지시편지’를 지니고 연변에 와 중공연화중심현위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지시편지’를 전달했다. 회의에서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건립했다. 특별위원회는

료여원, 양림, 왕경, 주건, 류지원, 리용, 리용국 등 7명으로 구성, 료여원이 서기를 맡았다. 조직부장을 왕경, 선전부장을 주건, 교통부장을

리용, 비서처장을 라일, 청년부장을 리용국, 부녀부장을 리인활이 맡았다. 성당위의 지시정신에 좇아 연변지구의 반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회의에서는 중곡동만특별위원회 군사위원회를 설립, 양림이 군사위원회 서기로 되였다. 위원회는 양림, 류지원, 송국서 등 3인조로 구성되였다.

성세호대한 폭동

1930년 9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우경사상을

극복’ 하고 ‘토지혁명을 심입 전개’ 하며 ‘쏘베트정권을 건립’하고 ‘지주의 일체 토지를 몰수할’것을 중공동만당조직에 지시하고 돈화와 연변의

유격대를 정돈하여 ‘홍군 제44군을 창건’하며 ‘각지에서 유격전쟁을 벌릴’ 것을 호소하였다. 동만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성당위의 지시와 호소를

관철하여 전 동만적으로 되는 ‘추수폭동’을 성세호대하게 벌였다.

9월,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군중들은

당조직의 지도 밑에 건립된 ‘폭동위원회’와 ‘행동위원회’의 조직하에 봉기를 일으키고 친일주구와 악질지주들을 청산, 그들의 가옥을 불살라버렸으며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적의 거점에 폭탄을 던지고 현금, 무기 등을 탈취하였으며 지주, 부농, 고리대업자들의 토지문서, 소작계약, 고리대문서

등을 불살라버렸다. 10월에는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489명 군중이 유격전에 참가하여 일제주구 33명을 처단, 악질지주의 가옥 29채를

소각하였으며 반동문서들을 불 사르고 지주의 곡식창고를 열어 빈고농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었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는 당시 《조선일보》1931년

4월 12일에 실린 간도농민폭동에 대한 기사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작년 1년 동안에 조선인 공산당원이 길림내에서 폭동을

일으킨 피해조사가 성내 각 현정부로부터 길림성정부에 도달한 정보에 의하면 작년 1년 동안에 공산당의 폭동사건의 피해 상황은 아래와 같다.

길림성 간도의 연변은 폭동의 중심지였는데 사건이 한번

발생(‘5.30’ 폭동)하자 뒤이어 일어난 것은 실로 680회, 사방자160여명으로 금후도 그 운동이 어데까지 미칠는지 예측할 수 없다.

투쟁가운데서 각지에서는 쏘베트정부, 혁명위원회 등을

건립하고 적위대, 적색유격대를 창립하였다. 중공연화현위원회에서는 평강구에서 연화현혁명위원회를 내오고 농민협회를 조직하였다. 혁명위원회 산하에

토지부, 군사부를 두고 토지혁명과 유격대, 적위대건립을 지도하였다. 각지 당조직의 노력 밑에 중공동만특위산하에 유격대, 연화현혁명위원회 산하에

적색유격대 그리고 라자구, 평강, 개산툰, 삼도구와 길돈 등 지구에 8개 무장대오가 조직되여 홍군의 창건을 위한 무장탈취, 군자금모집 등 투쟁을

벌였다.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

기세 드높은 대중폭동은 일제와 지방정부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이미 있는 400여명의 경찰외에 조선으로부터 106명 경찰을 보충받고 군벌정부와 야합하여

대‘토벌’을 감행했다. 중국군벌정부에서는 9월 25일에는 또 ‘길림성비적토벌사령부’를 새로 앉히고 일련의 반공조례와 〈법규〉에 관한 훈련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2개 퇀의 병력을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 배치하여 폭동을 탄압하게 하였다.

1930년 6월부터 6개월간 일제는 전후 34차에

걸쳐 880명의 혁명군중을 체포하였는데 19명의 한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인 혁명간부와 농민들이였다. 이번 대탄압에서 일제간도총령사관에서

접수한 체포된 인원은 1200여명(군벌정부 군경이 체포한 중요인원도 인계받았음)이였다. 반동적이고 친일적이며 부패무능한 군벌정부는 체포한

조선인혁명가들을 일제의 요구 대로 일본령사관에 넘겨주었다. 하여 일제는 연변의 내정을 공개적으로 간섭하여 1200여명의 ‘피고자’들을

재판하였다.

이번 탄압사건에서 1200여명은 일본령사관의

령사재판권에 의하여 초심을 거쳤는데 초심중 갖은 혹형을 자행하였기에 10명이 옥사하였다. 600명은 무죄석방되였으나 수개월 내지 1년의 옥고를

치렀고 갖은 혹형을 받았으며 석방 이후에도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올라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나머지 430명은 서울에 압송되였다. 일제는

430명의 ‘수인’을 40여차에 걸쳐 압송하였고 공판에 수요되는 총포, 작탄, 칼, 석부, 석괴와 선전삐라, 문건 등 5000여건을 2대의

트럭에 꽉 박아싣고 서울에 송치하였다.

서울형무소에서는 그들을 ‘예심취조’하였는데

‘예심취조’중 강렬모 등 20여명이 중병으로 옥중에서 죽었거나 보석되여 집으로 돌아와 사망되고 그외의 1명은 보석중이여서 예심에 참가 못하고

나머지 390명이 24가지 죄명으로 예심종결을 끝마쳤다. 그중 백규찬 등 118명이 ‘면소처분’을 받고 1932년 12월에 석방되였으니 실제상

2년의 옥고를 치른 셈이였다. 결국 그외의 272명이 재판에 회부되였다. 그런데 공판에 회부된 이후 강경모 등 10명이 옥사하고 그외 4명은

중병으로 재판장에 나올 수 없어 결국 출정한 이는 260명이였다.

일제는 피고들을 취조하는 한편 서울에다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재판소를 보수하느라고 3년 동안 애를 썼다. 드디여 1933년 9월 25일 이들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였다. 이처럼 규모가 큰

‘대사건’의 판결은 조선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있은 사건이였다. 이번 ‘간도폭동’판은 대체로 18차에 걸쳐 진행되였는데 재판소는 이미 보수되였으나

서대문 형무소에서부터 재판소까지 피고들을 압송하는 것이 놈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였다.

1933년 9월 22일, 23일, 24일

《동아일보》에 련재된 보도에 의하면 상기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동골목을 빠져서 재판소에 이르는 로정에는 종로경찰서 경관 50명이 총동원되고 그것도

부족하여 서울시 각 경찰서에서 100명의 경찰을 더 동원하여 도합 150명의 경찰과 일본헌병대가 출동되여 이른아침부터 비상경계를 실시하여 물 샐

틈 없이 경계망을 늘여놓고 피고들을 뻐스 한대에 20명씩 7~8대의 뻐스에 실어 2차에 나누어 압송하였는데 공판이 18회나 되다 보니 모두

36차를 래왕하였다 한다.

공판이라야 형식에 불과하여 피고측을 변호하는 변호사는

있을 수 없고 다만 검사들이 ‘죄상’을 공소하고 재판장이 심문하면 피고들이 답변할 뿐이였다. 놈들은 폭동의 현상만을 렬거하여 이른바 ‘살인,

방화, 강도, 절도, 총기취체위반’ 등 24가지 달하는 ‘예심취조죄상’을 피고들에게 들씌웠다. 그러나 리동선, 주현갑, 고하경 등 혁명가들은

공판장을 일제침략자들의 침략죄행을 성토하는 장소로 삼고 떳떳이 항변하였다.

공판에서 사형받은 이들로는 리동선, 최관옥, 로창호,

김광묵, 김동필, 류태순, 김응수, 고하경, 민창식, 지련호, 박금철, 김봉돌, 조동률, 리성철, 귄태산, 허완진, 박동필, 김룡운, 리종립,

김금난, 박익섭, 주현갑 등 22명이고 무기도형을 받은 이들로는 김명원, 박봉현, 차병철, 안응손, 김준걸 등 5명이였다.

1936년 7월 20일과 21일, 22명의 혁명자들은

〈적기가〉를 부르면서 적들의 교형장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의 결말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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