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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이제 정말로바람을 피우지 않겠죠?

[기타] | 발행시간: 2014.03.08일 10:45

[한겨레] [토요판] 가족 / 엄마의 마지막 관용

▶ “사랑 있는 노예로 살 수는 있어도 사랑 없는 왕비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야.” 얼마 전 종영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남편의 불륜에 상처받은 아내(김지수)가 했던 말입니다. 엄마·아내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남편의 불륜은 마음과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됐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의 어머님은 관용을 베풉니다. 부모를 이해할 수 없던 어린 아들은 어른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가족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역술인을 찾아 신수나 토정비결을 보곤 한다. 승진이 될지, 자녀의 학업은 어떨지, 가족의 건강은 무사한지 등을 소상히 묻는다. 엄마와 나의 관심은 오랫동안 딱 한 가지에 집중됐다. “올해는 아빠가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요?” “어떤 여자가 아빠의 곁에 있나요?”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올해에는 나아질 거다, 쉰여덟이 돼서야 잠잠해질 거다, 집터가 사람이 들어오면 내보내는 곳이니 굿을 해라…. 정말 굿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만큼 이 문제는 우리에게 절실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여성 편력은 수십년간 대단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린 나도 눈치채고 체감할 정도로.

밤 9시가 되면 나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오늘은 술 적게 드시고 집에도 일찍 들어오셔야 해요!”라고 엄마의 바람을 대신 전했다. 아버지는 일찍 들어오지 않았다. 11시가 지나자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는 나를 깨워 말했다. 인터넷뱅킹에 접속하라고. 실시간으로 나오는 결제 내역을 확인하고, 전화할 당시의 목소리와 주변 상황을 되짚으며 아버지의 위치와 동태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 차를 끌고 나갔다. 간혹 운이 좋아(?) 모텔에서 나오는 아버지와 낯선 여자를 발견할 때면 어머니는 분해 잠에 들지 못했다. 종종 맥주 두 병을 앞에 두고 나한테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생활이 일상이 되자 나는 아버지의 하루가 매우 단순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녁식사를 하고, 유흥업소를 가고, 모텔에서 투숙. 드라마에서나 보던 불륜 남성들의 라이프를 옆에서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밤이 돼도 들어오지 않는 아빠

엄마는 카드기록을 뒤지더니

차를 끌고 나가 아빠를 찾았다

모텔에서 나오는 아빠 볼 때면

엄마는 분해서 잠들지 못했다

성폭행 혐의로 구치소 가면서

뻔뻔한 외도는 마침표 찍었다

새사람 되어달란 부탁 통했나

아빠는 조금씩 달라졌고

우린 지금도 가족으로 산다

아버지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별일 없이 지나가는가 싶은 밤이면 큰 소리가 났다. “네가 인간이니? 너랑 만난 이후로 내 속이 썩어 들어간다. 네가 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니? 나 호강시켜 주겠다 할 때는 언제고, 어떻게 이렇게 끝이 없니!” 어머니의 하소연 앞에 아버지는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나 너한테 해준 거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러는 너는 뭘 얼마나 나한테 대단하게 해줬다고 그러는데? 너도 나한테 해준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다 무엇이 깨지는 소리가 나거나, 폭행이 일어날 것 같은 조마조마한 상황이 오면 나는 황급히 방문을 열고 소리치며 울었다. “넌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말에도 손발이 닳도록 빌며 목 놓아 운 뒤에야 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이렇게 해야 싸움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불륜은 갈수록 뻔뻔해졌다. 학원으로 마중 온 아버지는 나를 차에 태우고 가다 갑자기 아는 사람이라며 어떤 여자를 태웠다. 그분은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했지만, 그 길은 택시가 자주 오지 않는 곳이고 시간도 늦은 밤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동승했던 그는 알고 보니 아버지의 내연녀였고, 원래는 같이 차를 타고 왔지만 나를 생각해 시간차를 두어 뻔뻔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이지만 이미 부부가 아니었다. 서로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며 던지는 폭언 속에 행복했던 기억마저 사라져 버렸다. 어느덧 나는 부모님의 이혼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잠시 아버지와 별거하긴 했지만 금세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모자 둘이서 살기엔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나는 점점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혼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비난하고 경멸하던 사람과 함께 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식은 상처받고 외로워하고 있는데 그걸 방치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어머니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 부모님은 모두 재혼이셨다. 두 분 다 자식을 낳았지만 첫 결혼에 실패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사업이 부도나자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이혼을 선택했고, 두 아이도 남편 집에 두고 나왔다. 아이까지 떼어놓은 어머니는 재혼을 하고 나를 낳으면서 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고 싶으셨을 거다. 힘들어도 내가 클 때까지 참고 아버지가 변하기를 기다리며 견뎠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보려 했지만, 그러기엔 내 현실은 너무 불행했다. 어린 내게는 여전히 이런 결혼생활이 유지된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아버지는 불륜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놓지 못했다.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이 집을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집을 떠나기 위해 기숙사가 있는 전국단위 선발 자율고 입학을 목표로 삼았다. 독립은 공부에 가장 큰 동기를 부여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 외로움 따윈 없었다. 나는 밤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고 잠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잠깐의 여유도 없이 이내 집에서 어머니의 울음이 섞인 전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빠가 누구를 때렸어.” 처음엔 정말 단순한 폭행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마를 날 없던 어머니의 눈물 탓에 나는 곧 진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친한 분을 성폭행하려 했던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런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았다는 것 자체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고 아버지는 구치소에 수감됐다.

나는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밀어내려 했다.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거리감을 뒀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슬픔과 수치스러움을 뒤로하고 피해자에게 대신 사과했다. 내 자식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마지막 관용을 베풀었고 합의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극적으로 아버지가 나오시던 날, 아버지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그 울음의 진정성을 의심했지만, 부디 새사람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선고 당시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아버지는 가끔씩 법원에 들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씻을 수 없는 인생의 오점 앞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실패라고 규정했다. 나에겐 ‘자신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달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대신 나서 수습했던 어머니에게 평생 속죄하고 봉사하겠다고도 말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아직 가족으로 함께하고 있다. 이젠 나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으려 한다.

아버지를 용서하려는 스무 살 아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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