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정치 > 정치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중한호조(中韓互助)', 中공산당과 韓독립운동의 력사적 교차점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7.01일 15:56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중·한 문화교류의 해'(2021~2022)가 시작되는 해다. 중국공산당이 창설된 1921년은 중화민족이 국난을 겪던 시기였다. 당시 한민족 역시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 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한국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중국을 거점으로 민족 독립운동의 횃불을 밝혔다.

  항일투쟁의 역사 속에서 중국 공산당원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공동의 적 앞에서 서로 손을 맞잡았다. 형해명(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는 중국공산당과 한국은 그 인연이 깊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림시정부 시기, 특히 중경(重慶) 시기에 주은래(周恩來) 등 중국공산당의 혁명가들은 김구 선생 등 한국 독립운동가와 우의를 다졌다. 이같은 교류와 협력은 중·한 수교 이후 중국공산당과 한국 여야 각 정당과의 우호관계 수립에 기반을 제공해왔다.

  신화통신 기자는 최근 중국 내 여러 력사적 현장을 직접 찾아가 한국 근대 독립운동사 속에서 중국공산당과의 교차점을 조명했다.

  ◇상해-가흥(嘉興), 력사의 우연한 일치

  김승호 주상해 한국 총령사는 최근 홍색 관광버스를 타고 상해의 주요 '홍색 랜드마크(공산당 유적지)'를 둘러봤다.

  김 총령사는 국가 간 교류는 국민 간 마음의 거리에 달려 있고, 마음의 거리는 서로 마음이 얼마나 통하는지에 달려 있다면서 이번 홍색 버스 탑승으로 중국 인민의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축하 인사와 함께 이번 홍색 랜드마크 려행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창당 력사를 리해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 총령사는 공산당의 지도 하에 인민이 함께 분투한 결과 중국이 오늘날과 같은 성과를 거두게 됐다며 상해가 바로 그 분투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김승호 주상해 한국 총령사가 홍색 버스에 오르고 있다. (사진/왕샹 기자)

  1921년 7월 23일 모택동(毛澤東), 동필무(董必武) 등 중국 각지에서 온 초기 공산당 조직 대표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지의 한 석굴문(石庫門∙상해의 전통 건축 양식) 건물에 은밀히 집결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프랑스 조계지의 순경에 의해 회의장이 발각되자 대표들은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중단했다. 이어 8월 초 가흥 난후(南湖)로 이동해 유람선에서 회의를 재개했다.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중국공산당 창당이 정식으로 선포됐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 혁명의 불씨가 타올라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주중 외교 사절단이 지난 6월 16일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날 40여 개국의 주중 외교 사절단이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와 상해시위원회의 초청으로

상해를 방문해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개최지와 기념관을 둘러봤다. (사진/우위 기자)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림시정부 역시 1919년에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수립됐다. 이는 1910년 한일합병 후 처음으로 수립된 망명정부였다. 림시정부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상해 황포(黃浦)구 마당(馬當)로에 위치한 한 석굴문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다. 이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개최지에서 직선거리로 300m도 채 안 되는 곳에 위치했다.

  1932년 4월 29일, 한국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일본 군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그 사건 이후 대한민국 림시정부는 상해에서 철수해 5월 항주(杭州)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홍구 폭탄 의거를 이끌었던 김구는 가흥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김구는 일본군의 추포를 피해 가흥에서 이곳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한때 그는 남호 호숫가 한 척의 배에 몸을 숨긴 적도 있었다. 1935년 가을 김구는 여러 림시정부 요인들을 가흥로 소집해 선상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향후 항일 독립을 위한 계획을 도모하기도 했다.



  절강(浙江)성 항주(杭州)시 장생(長生)로에 위치한 '대한민국 림시정부 항주 옛터(舊址) 기념관'이 2007년 11월 30일 문을 열었다. 사진은 2007년 12월 1일 촬영한 기념관 정문. (사진/신화통신)

  ◇장사(長沙), 공동의 적에 맞선 협력의 장

  대한민국 림시정부는 1932년 항주·진강(鎮江)을 거쳐 남경(南京)으로 이전한 후 1937년 말 장사에 둥지를 틀었다.

  사실 중·한 지식인들은 량국이 힘을 합쳐 외적에 대응해야 하는 필요성을 훨씬 일찍 절감했고, 이에 중국과 한국의 우호단체인 중한호조사(互助社)를 각지에서 결성했다.

  1921년 3월 중국공산당 혁명가인 모택동, 하숙형(何叔衡)은 호남(湖南)성 장사에서 중한호조사를 설립했다. 중한호조사는 일본 침략에 반대하는 한국의 민족 독립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장사 중한호조사는 대한민국 림시정부 선전원이 후난 지역에서 반일 선전 활동을 펼치는 데 물질적으로나 도의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인 김구를 기리기 위한 '김구 선생 장사 진렬관'이 2006년에 장사시 옥록산(嶽麓山) 관광지에서 개관했다.

2006년 4월 4일 한 남성 관광객이 진렬관 내 김구 선생의 조각상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리가 기자)

  우수근 한중글로벌협회 회장은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장사 중한호조사를 비롯한 중국 각지의 중한호조사는 당시 한·중 양국의 항일 공동투쟁에 큰 버팀목이 되였다"며 "대한민국 림시정부 소속 한국인 독립운동인사들도 이를 또 하나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장사 중한호조사의 옛터가 자리한 선산학사(船山學社)는 현재 중국 문물보호 기관의 관리 하에서 외부에 개방됐다. 우 회장은 "한·중 량국의 소중한 우호와 련대의 상징으로서 이 옛터를 한국 사회에도 적극 알려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호남성 장사시 선산학사 옛터의 모습. (사진/장위제 기자)

  ◇중경, 중·한 우호의 력사적 현장

  대한민국 림시정부는 청사를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다 1940년 중경에 이르렀다. 이곳은 1945년 독립하기까지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마지막 중국 청사로 활용됐다. 이 기간에도 중국공산당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 진렬관의 하설(夏雪) 부관장은 신화통신 기자에게 "이곳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이 바로 중국공산당 남방국(南方局) 기관지 '신화일보(新華日報)' 영업부의 옛터"라며 "'신화일보'는 당시 대한민국 림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 상황을 가장 많이 보도했던 언론"이라고 소개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림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부터 중경을 떠나 고국땅으로 돌아갔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주은래, 동필무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자가 림시정부 국무원 전원을 위해 송별연을 개최해 주었다.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 진렬관 전경. (진렬관 제공)

  1992년 8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한국 측 인사들은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를 복원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 주민들의 거주지역이자 상업용 부동산 개발 대상 지역이였다.

  하 부관장은 "중경시 정부는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기업에 보상금을 지급해 이 터를 보존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가급적 원래 형태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를 복원해 1995년 8월 정식 개관했다고 밝혔다.

  2000년 한국과 중경 간 하늘길이 열렸다. 중·한 각 분야 교류가 갈수록 활성화되면서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 진렬관을 찾는 사람도 점차 늘고 있다. 하 부관장은 "2010년 이후 관람객이 크게 늘기 시작해 2019년에 최고 기록을 세웠다"며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한국 유학생 김민희씨가 지난 5월 충칭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 진렬관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많은 한국 관광객이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옛터를 복원하고 보존해 준 중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개관 20여 년 동안 관람객들이 남긴 100여 권의 방명록이 바로 중·한 량국의 깊은 우호교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한국 대통령 역시 2017년 12월 16일 중경을 찾아 림시정부 옛터 진렬관을 방문했다. 그는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대한민국 림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

/신화망 한국어판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67%
10대 0%
20대 0%
30대 17%
40대 5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33%
10대 0%
20대 17%
30대 0%
40대 17%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작곡가겸 작사가 유재환(34) 인기리에 종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린 작곡가겸 작사가 유재환(34)이 결혼을 발표하면서 예비신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앞서 유재환은 자신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개저씨들 나 하나 매장시키려고" 민희진, 울분의 기자회견 어땠길래

"개저씨들 나 하나 매장시키려고" 민희진, 울분의 기자회견 어땠길래

사진=나남뉴스 걸그룹 뉴진스 소속사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어 하이브를 향해 거침없는 막말을 쏟아내 화제가 되고 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공식 석상임에도 민희진은 '개저씨', '시XXX', 'X신', '양아치', ‘지X’ 등 비속어를 쓰면서 현 상황에 대한

"前연인 에세이 출판 금지해달라"…배우 백윤식 2심도 일부 승소

"前연인 에세이 출판 금지해달라"…배우 백윤식 2심도 일부 승소

"前연인 에세이 출판 금지해달라"…배우 백윤식 2심도 일부 승소[연합뉴스] 배우 백윤식 씨가 전 연인이 펴낸 에세이 출판을 금지해 달라고 소송을 내 1·2심 모두 일부 승소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9부(성지용 백숙종 유동균 부장판사)는 25일 백씨

“제게 너무 큰 위로” 작곡가 유재환 결혼, 예비신부 누구?

“제게 너무 큰 위로” 작곡가 유재환 결혼, 예비신부 누구?

작곡가겸 작사가 유재환(34) 인기리에 종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린 작곡가겸 작사가 유재환(34)이 결혼을 발표하면서 예비신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앞서 유재환은 자신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