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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로부부 “내 인생엔 오직 당신뿐이라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6.13일 11:52

자녀들의 축복속에 백금혼잔치를 치르는 지명룡,방광순로부부

매하구시 지명룡선생 결혼 70년 맞아 백금혼잔치

매하구시조선족들의 축복속에 해방전에 혁명사업에 참가하였고 제1대 매하구시조선족교육사업가이며 민족사업가인 지명룡선생(89세)과 부인 방광순녀사(86세) 결혼 70주년 축하모임이 6월 12일 매하구시조선족호텔에서 진행되였다.

축하모임에는 지명룡선생의 사업동료들과 학생들,매하구시민족종교사무국,매하구시민족문화관,매하구시조선족중학교,매하구시조선족소학교,매하구시조선족로인협회와 각 조선족촌의 간부들이 참석하여 지명룡선생의 결혼 70주년을 축하였다. 70년전 지명룡선생과 방광순녀사는 서로 안면부지의 처녀총각이 부모의 명령으로 결혼하여 지금까지 서로 의지하면서 슬하에 아들 하나,딸 넷을 두고 파란많은 인생길을 헤쳐왔다.지명룡선생의 인생사는 매하구시조선족의 인생사이면서 조선족사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부모의 지령으로 안면부지의 남녀가 부부로

지명룡선생은 1928년 2월25일 한국 전라남도 라주군 영산포읍에서 지씨집안의 둘째로 태여났다.일제의 압박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지명룡선생이 9살때 지명룡선생의 가족은 맏이를 한국에 남겨두고 지금의 류하현 삼원포진 오도구촌 동안툰으로 이주하였다.동안툰에서 썩은 좁쌀과 된장국으로 때식을 이으면서 허기진 배를 달래야 했다.



우리 손잡고 함께 남은 인생 걸읍시다

유년시절 지명룡선생은 동안툰과 25리 상거한 오도구촌의 학교를 다녔는데 가정곤난으로 휴학하면서 공부하다나니 17살나는해에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소학교졸업후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그때의 통화성공립사도학교에 추천받아 시험에 합격되여 입학하게 되였다.이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학교가 헤체되여 지명룡선생은 동안툰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1946년 4월,동북민주련군 리홍광지대에서 류하현 삼원포진에 동명중학교를 건립하여 지면룡선생은 다시 이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9월말에 해방군과 국민당군대간의 전투가 시작되여 지명룡선생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여보 사랑해요!

집에 오니 지명룡선생의 부친이 이미 대상자를 구해놨으니 결혼해야 한다는것이였다.그때는 부모의 말이면 거역할수 없는때이고 인생사는 부모의 지령을 따라야 하는때이니 일언반구도 없이 부모의 말을 따랐다.지명룡선생은 19세나던 해인 1946년 10월 12일 소달구지를 타고 산골짜기에 살고있는 방광순녀사의 집으로 장가들러 갔다.처가집에서도 처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점심을 먹고 소달구지에 신부를 싣고 오면서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였는데 얼굴이 갸름하고 키도 훤칠한것이 마음에 들었다는것이 지금 지명룡선생의 이야기이다.



옛날 제자들과 함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장장 70년간 지명룡선생과 방광순녀사는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파란많은 인생을 살아왔으며 아무리 고달프고 곤난하여도 서로 의지가 되였다.15년전 방광순녀사가 뇌경색으로 앓아 누웠지만 지명룡선생이 극진히 간호한 결과 지금은 생활에 장애가 없이 두 로부부가 함께 산책하고 관광도 다니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있다.

결혼 5일만에 집떠나 혁명에 참가

지명룡선생은 결혼 3일후 처가집을 다녀와서 몸이 불편하여 누워있는데 갑자기 국민당군대가 들이닥쳤다.국민당군대는 지명룡선생의 손을 보자하더니 팔로군이라면서 잡아 가두었다.그때 모두 3명이 잡혔는데 2명은 촌의 간부였다.심한 고문을 받고 저녁에 집에 돌아온 지명룡선생은 국민당군대가 있는한 이곳에 있을수 없다고 단정하고 부모님께 하직을 고하고 갓 결혼한 안해와 작별인사를 한후 팔로군을 찾아 나섰다. 20여리길을 걸어 저녁 9시쯤에 한곳에 도착하니 삼원포동명중학교시절의 군사교원을 만나게 되였는데 매우 반가워하였다.그분은 그때 리홍광지대의 퇸장으로 있었는데 지명룡선생을 리홍광지대무공단에 입대시켜 경위전사로 되였다.경위부대는 40여명으로 구성되였는데 모두 조선족이였다.



매하구시조선족중학교 리정염교장의 축사

류하현이 해방되자 상급에서는 지명룡선생이 나이가 어리고 지식이 있기에 리홍광지대교도대대에 보내여 학습하게 하였다.지명룡선생은 리홍광지대교도대대에서 낮에는 로동하고 밤에는 혁명리론을 학습하게 되였는데 그곳에서 토지개혁강령과 사회발전간사,중국공산당 당사를 학습하게 되였다.학습이 끝난후 조직에서는 지명룡선생을 매하구에 있는 성민주련맹으로 보내였다.해룡현(지금의 매하구시)에 도착하니 성민주련맹에서는 지명룡선생의 서류를 보고 사도학교졸업이라며 지금의 중화진 려명학교로 파견하였다.그때로부터 지명룡선생은 교육사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한생을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조선족교육사업을 위하여 한생을 바치다

1948년 8월 매하구시 중화진 려명학교에 파견되여 교육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지명룡선생은 1949년 9월에는 매하구시 수도진 학교로 전근되여 학교룰 꾸리였는데 혼자서 교과서 없이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교수를 담당하였다.아버지가 해방전쟁시기 담가대로 나갔다가 희생되여 1950년도에 가족을 자신이 교편을 잡고있는 수도진으로 이사시켰다.



손군들의 축복을 받는 로부부

지명룡선생은 1949년 5월9일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1951년 지명룡선생은 매하구시 평등학교 교장 겸 교도주임으로 파견되였다가 1954년에는 매하구시 영승학교 교장으로 파견되였다.이 학교에서 10년간 교장사업하다가 1964년에는 해룡현(지금의 매하구시)민족과 과원으로 전근되여 3년간 사업하면서 조선족학교 건립에 정력을 몰부었는데 그때 매하구시의 조선족학교수가 34개에 도달하여 촌마다 조선족학교가 있게 되였다. 1967년부터는 매하구시교육국 민족과에 전근되여 민족교육발전에 전념하였으며 1968년에는 《5.7간부학교》에 파견되여 후근관리를 책임지기도 하였다.

1969년말 조직에서는 지명룡선생을 지금의 조직부에 해당되는 해룡현정당반공실 간부과에 배치하였다.이곳의 직능은 주로 간부를 고찰하고 선발을 책임지는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고싶어 하는곳이다.사업의 첫 일터가 교육사업이기에 교육사업에 미련을 버리지못한 지명룡선생은 조직에 조선족학교에 가서 사업할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해룡진에 조선족중학교가 없어 학교건립준비중이여서 조직에서는 지명룡선생을 해룡9중의 교장 겸 서기로 파견하였다.해룡9중에 도착하니 교원들의 책걸상도 없었고 교실도 없었다.해룡구역의 촌간부모임을 가지고 현과 진의 령도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한 결과 한족소학교를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조선족중학교를 건립하는 방안을 실현시켜 해룡9중의 교실을 해결하였다.

1971년10월 지명룡선생은 해룡2중의 교장 겸 서기로 전근하였는데 해룡2중이 해룡7중과 함께 교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명룡선생은 원교사를 해룡7중에 넘겨주고 새로운 부지를 선정하여 해룡2중의 교사를 신축하면서 학교교사는 100년을 내다보고 지어야한다는 념원으로 그때 당시 구하기 힘든 철근을 구하여 신축교사에 사용하였다.1978년 매하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인 11중이 건립되자 조직에서는 지명룡선생을 이 학교의 부서기 겸 부교장으로 파견하여 신축교사 사업을 담당하게 하였다. 1982년3월 조직에서는 지명룡선생을 다시 매하구시2중의 당지부서기로 파견하였다.이곳에서 지명룡선생은 1982년 12월말에 리직휴양하게 되였다.

리직하였지만 조선족교육사업을 잊지못한 지명룡선생은 1984년 매하구시조선족직업고중이 설립되자 학교사감으로 초빙되여 10년간 학생들의 숙사생활을 관리하면서 학생들로부터 사랑하는 지할아버지로 불리우면서 여생을 빛내였다.

조선족로인협회건립과 활동에 헌신

한생을 조선족교육사업 발전을 위하여 로고를 아끼지않은 지명룡선생은 리직후 1994년부터 매하구시 산성진구역 로인협회장을 담임하고 각 촌으로 다니면서 로인협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조직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였다.



지명룡,방광순부부의 백금혼을 축하는 매하구시조선족로인협회 축하공연

1995년부터 10년간은 매하구시조선족로인협회 부회장과 회장직을 담임하여 전시의 조선족로인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지명룡선생은 3차례 성급 우수당원,새일대관심선진개인의 영예를 지녔고 해마다 시의 우수당원,우수회장으로 당선되였다.

지금 매하구시에서 조선족로인들은 지명룡선생을 지회장으로, 50대이상의 조선족들은 지명룡선생을 지서기선생님 혹은 지교장선생님으로, 40대좌우의 조선족들은 지명룡선생을 지할아버지로 호칭하면서 지명룡선생을 사랑하고있다.

편집/기자: [ 리창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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