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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60년]모주석께 두루마기 올리던 그 감격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7.17일 10:08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맞이 특별기획 《기억속의 60년》

국경 1주년 천안문 관례대에 오른 리직휴양간부 고파선생의 추억 스토리

1950년 10월 1일, 국경 1주년에 동북구조선족대표단 일원으로 천안문 관례대에 올라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송경령 등 당 및 국가 지도자들의 검열을 받는 중국인민해방군 륙해공군의 호호탕탕한 행진대오를 바라보며 끝없는 회포와 무한한 감회로 설레이는 가슴을 달래던 조선족청년이 있었다. 영예의 주인공은 바로 당시 19살밖에 안된 길림성 연변문공단 악대의 고응수(고파)였다.

당시 그는 연변문공단 국경 1주년 헌례 연출단 중견배우로 천안문성루 관례대에 올랐고 중국의 56개 민족대표들과 함께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을뿐만아니라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주석께 두루마기를 올리는 증정식에도 참가했다.

일전에 기자는 국경 1주년을 계기로 지난 세기 50년대에 연변문공단에서 모주석께 두루마기를 올리던 감격스러운 이야기보따리와 더불어 진귀한 자료들을 62년간 보물처럼 소중하게 보관하고있는 고파(82세)옹을 만나보았다.

세월의 모진 풍랑속에서 이슥한 황혼의 막바지에 오른 그가 60여년을 거슬러 모주석께 두루마기를 올리던 그날의 그 감격을 옳게 떠올릴수 있을가고 많이도 근심했는데 웬걸! 기억이 너무 또렷하였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는 모습 또한 너무 밝았다.

그는 국경 1주년, 천안문 관례대에 오른 감격을 목책에 적어두었던 그대로 보여주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오전 11시, 중앙인민정부 비서장 림백거가 경축대회의 개막을 선포하자 천지를 진감하는 국가의 주악소리와 례포소리! 모주석을 우러러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뻐 날뛰면서 목청껏 웨쳤다.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 웅장하시고 름름하시며 화애로운 미소를 짓고계시는 모주석! 4억 7500만 위대한 중국인민의 대구성! 중국공산당의 옳고 바른 민족정책아래에 형제민족대가정은 한덩어리로 뭉쳐 붉은기를 추켜들고 충성을 다지며 만세소리 우렁차게 천안문성루에 계시는 모주석을 우러러 기승스럽게 전진, 전진, 또 전진하였다…》

고파옹은 1950년 10월 3일 저녁 7시,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동북구조선족대표들이 모주석께 금기, 두루마기, 한복, 비단천으로 만든 방석을 증정하던 감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등불이 휘황한 중남해 회인당에서 림백거가 사회를 맡았고 모주석께 연변문공단 김동구단장이 두루마기를 올렸지요. 그때 모주석께서는 저와 한줄에 앉아 계셨더랬는데 지척에서 모주석을 우러르노라니 꿈인가싶었습니다. 건국초기여서 연변엔 비단천이 퍽 귀해 김례삼부단장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항미원조전쟁의 포화를 무릅쓰고 평양에 가서 미국비행기 폭격을 피해가면서 어렵게 구입해 가지고 온 비단천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저희들이 북경에 가면서 심양에서 받아가지고 갔댔지요.》

모주석께 올리는 선물을 가운데 놓고 기념사진을 남긴 국경 1주년 동북구조선족대표단(1950년)

직통배기로 말하는 고파옹은 《국경 1주년 동북구조선족대표단은 계대표(计代表) 2명, 수원(随员) 1명, 문공단 40명, 이렇게 도합 43명이였어요. 연변대학 림민호부교장(47세)이 단장이였구요. 전국렬군속대표 김신숙(41)이 부단장이였고 연변한어전문학교 교도주임 반룡해(26)가 대표단 통역으로 따라갔었는데 문공단 백여명 임직원가운데서는 김동구단장(27)을 비롯해 문공단 당지부서기 김동규(24), 음악조 조장 허세록(35,), 농악조 분조장 김성민(27), 합창조 조장 박우(25,), 관현 분조 조장 고자성(29), 무용조 조장 김혜련(19살), 쏘련무 분조장 리종만(20살), 크라니네리스트 백문순(21), 가수 방초선(19), 김인숙(18) 등 40명이 모주석, 주덕, 주은래 등 중앙수장들을 모시고 물동이춤, 부채춤,상모춤을 올렸댔는데 그때 열아홉살이였던 저는 바이올린 반주를 했고 쏘련무를 췄거든요》라고 62년전 국경 1주년에 참가했던 43명 대표들의 성명, 직위, 년령까지도 바로 어저께 금방 있었던 일처럼 얼음에 표주박 밀듯하면서 모주석께 두루마기외에도 한복, 비단천에 룡을 수놓은 방석,<모주석께 경례를 드립니다>는 글발의 금기 등 례물을 올렸는데 그때는 사진기가 없어서 모주석의 그 웅장하시고 름름하시며 인자하신 모습으로 두루마기를 비롯한 례물을 미소를 띄우시고 정중히 받으시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지척에 보면서도 찍어오지 못한것이 한평생 유감으로 남아있다》고 당시 안타까운 마음을 터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0년 10월 5일《인민일보》에 모주석께서 두루마기를 비롯한 동북구조선족대표단의 례물을 받으시는 장면의 사진이 보도됨으로써 그 안타깝던 마음이 위안받을수 있게 되였다.

원로촬영사 황범송옹이 자기가 소장하고있던 진귀한 원판사진을 이날 취재에 동행해 갖고가 일부러 고파선생에게 보여주었다.

연변조선족들이 모주석께 두루마기를 선물로 올리는 장면(1950년)

모주석께 두루마기 올리는 장면의 사진을 보던 고파옹은 《맞아요 맞아! 모주석께 례물을 올리는 이분이 바로 김동구단장입니다!》라고 흥분되여 말하면서 자신이 간직하고있던 모주석께 올릴 례물을 둘러싸고 북경에 가서 찍은 기념사진이며 국무원 총리 주은래 존함이 박혀있는 국경 1주년 만찬회요청장이며 국무원 부총리 우란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유한 등 국경 1주년 국무원 초대위원회 위원장들을 모시고 북경 천단공원에서 남긴 기념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국경 1주년 국무원 초대위원회 위원장들을 모시고 천단공원에서 남긴 기념사진(1950년)

고파옹은 감격의 그 나날이 못견디게 그리웠다고 한다. 그래서 몇해전에 연변가무단을 찾았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지난 세기 50년대 연변문공단의 빛나는 발자취에 별 관심이 없더라면서 기억속의 60여년을 거슬러 긍지로 차넘치는 연변가무단의 력사를 되새기는것은 가히 랑패날 일이 아니겠거니와 거기에서 받는 감격, 고무, 계발 또한 뜻있는 전통교양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풍전에서 가물거리는 추억의 마른 등잔에 기름을 넣어주고 바야흐로 꺼지는 심지를 돋궈주며 감격의 그날에로 격정의 발동을 걸어주는 기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무작정 늘이고싶어하면서 그는 찬란했던 자기의 간단한 력사를 꺼내기 시작했다.

1931년 음력 2월 8일, 부산 락동강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고파(高波)는 원명이 고응수(高应守)였다. 여덟살에 부모손에 이끌려 두만강을 건너와 안도 명월구에서 소학시절을 보내면서 제법 노래 춤, 연극에서 장끼를 보였고 돌격나팔을 꽤 잘 불었던 그는 중학시절 연길시제2중학교 관악대에서 바레동을 불었다. 그러다가 1947년 10월, 조선의용군 3지대 정치부 선전대에서 연변으로 군모집을 나온 대장의 눈에 쏙 들어 문예병으로 뽑혔다. 그때 할빈에 주둔하고있던 3지대에서 주덕해가 정위였고 당시 갓 결혼한 주덕해와 한 울안에서 선전대에 있으면서 악대의 중견인 백고산한테서 바이올린을 열심히 익혔고 조득현한테서는 백로씨야무용을 배웠던게 큰 밑천이 되였다.

하여 3지대 100여명 선전대원가운데서 20명안에 들어 1949년 2월, 당시 동북구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임직한 주덕해동지가 민족사무처 정치부문공단을 토대로 연변문공단을 창립하고저 정치부문공단 단장 김태희, 부단장 조득현 등 20여명 대원을 인솔하여 연변으로 나올 때 렬차에서 주덕해동지와 프럼프를 즐기면서 동행하여 연변문공단에 편입되였다. 그후 100여명 연변문공단 단원가운데서 40명이 선정된 국경 1주년 헌례연출단 일원으로 뽑혀 1년 반 고강도 훈련을 거쳐 기량을 가일층 제고,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주석을 모시고 출연한 악대에서는 바이올린 반주를 했었고 무용에서는 쏘련딴스부분의 쏠로를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중국인민의 대구성이신 모주석께 올리는 연출에서 주요배역이였다면 연변문단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였을것이고 천안문 관례대에 올랐고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다면 사회에서 인기가 굉장했을텐데 모주석께서 주신 세벌의 의복까지 선물로 받아안은 고파의 기쁨이야말로 꿈에도 잊지 못할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있는것은 퍽 자연스러운것이다.

그래서 고파옹은 《모주석이 주신 의복을 입고서》라는 62년전의 색이 바랜 흑백기념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고파옹의 감격의 년대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 않았다. 국경 1주년 감격의 여파에 들떠서 문공단에만 붙박혀있지 않고 《혁명을 끝까지 하자!》는 모주석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자주 대중속에 심입, 화룡 이도구 룡포촌으로 내려가 악대도 세우고 야학교에서 농민들에게 글귀도 틔워주며 몇달씩 고락을 같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악대를 춰세워달라고 간청하는 부근의 서성중학교에 발목을 잡히는바람에 남들은 평양음악무용대학 류학을 꿈꾸고 중앙음악학원 등 연수의 기회를 노리고있는 1952년, 결연히 연변문공단을 떠나 서성중학교에 음악교원으로 내려가 수십년 뿌리를 박고있다가 도문시5중에 전근한후 공회사업을 마감으로 17년간 도문시로인협회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리직휴양간부라는 명예장 하나만 가진 요모양, 요꼴이라고 자세를 퍽 낮추었다.

했지만 기자가 안데 의하면 미상불 곡절도 없지는 않았다. 시골중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은 《남들은 애써 연변가무단으로 들어오려 하는데 당신은 스스로 조건이 악렬한 시골로 찾아가려 하오?》라고 만류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연변가무단에서 나를 수요하지만 시골에서는 더욱 나를 수요하오!》라고 자기의 굳은 결심을 표시하였다. 했기에 1973년에 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공회 제5차대표대회에 고작 시골의 음악교원이였던 고파선생이 화룡현의 유일한 교원으로 참석한 영예를 지닌것이 아니겠는가!

모주석이 주신 의복을 입고서(1950년)

고파는 시골학교 소속 현시에서는 모주석이 선물하신 의복을 입고 남긴 흑백기념사진 한장, 세계청년축전에서 바이올린 금상을 거머쥔 거물급 스타 백고산선생의 뛰여난 제자였댔다는 만만찮은 과거만으로도 그 지역의 명인으로 떠있기에는 충분해서 거의 해마다 있게 되는 화룡현문예회연에서 평심위원장으로 추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것이 중앙민족학대학 예술학원 방하찬교수를 비롯하여 그가 양성한 숱한 제자들은 중국조선족사회에 쫙 널려 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빛을 뿌리고있었다.

21살 한창 나이에 음악교실이 따로 없는 시골학교에 자진한 고파선생은 학교에 그냥 방치되여있는 스산한 건물의 빈공간을 련습장소로 리용, 탕개를 늦추지 않고 계속 바이올린 기량을 닦았기에 1959년 10월 1일, 연변가무단 국경 10주년 헌례연출단에 앞자리로 초빙이 되여 1년간 호적을 연변가무단에 붙이고 본격적인 집중훈련에 참가, 피타는 노력으로 아쟁, 얼후 등 조한족 현악기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여 대회주최측의 결정에 따라 국경 10주년 헌례연출에 참가한 소수민족중 다섯개 소수민족의 무용 노래 반주를 연변가무단 악대가 도맡은 국경 10주년 헌례연출에서 고파는 바이올린은 물론 아쟁, 얼루로도 한몫 톡톡히 했다.

53년전에 있었던 국경 10주년 헌례연출 그 감격을 그는 이렇게 떠올렸다. 《국경 10주년 행사 일환으로 류소기부주석,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중앙수장들이 참석한 국무원 무도만회에 연변가무단 배우들이 초대받았거든요. 류소기부주석을 비롯한 수장들의 무도파트너는 연변가무단 녀배우들이였고 무도반주는 연변가무단 악대가 도맡았지요. 그때 체격이 미끈한 39세의 류소기부인 왕광미가 앞뒤로 많이 출면을 하면서 류소기주석을 시중들더라구요. 류소기주석께서 추시는 무도곡은 짧은 곡을 연주하도록 규정이 돼있었는데 류소기주석께서는 연변가무단 배우들과 무도를 즐기시면서 한복저고리에 매여있는 옷고름이 참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진의원수, 하룡원수도 춤을 굉장히 잘 추시더라구요. 장족가수 차이단줘마가 서장민요를 불렀는데 반주를 연변가무단 악대가 했습니다.》

고파옹은 몇해전에 있었던 연변주로간부당구대회에 참가하여 연변문공단 창립초기에 악대에 함께 있었던 작곡가 동희철선생을 같은 당구선수로 경기장에서 만났었다고, 동희철선생이 룡정고급중교 음악교원일 때 자기 옷을 빌려입고 결혼식을 올렸었는데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을 상빈으로 보내는 조선족 잔치문화풍속습관에 받들려 동희철선생이 색시를 맞으러 갈 때 결호상빈으로 따라갔댔다고 하였다.

《50년대초에 연변문공단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외에 고응수라면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고파라면 연변의 조선족중소학교에서는 특급음악교원이여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거요》라는것이 고파옹에 대한 저명한 작곡가 동희철옹의 가식없는 말이다.

바로 60년전, 화룡현 서성중학교로 전근하면서 고파로 개명한 까닭을 물으니 리유는 극히 간단했다. 사회주의 새 중국에서 그토록 미워하는 적대국인 자본주의 〈남조선〉에서 달고온 께름직한 이름 그대로 나라 미래 기둥감들 앞에 나설 용기가 없을만큼 그때는 그 이름이 그렇게 싫을수가 없더란다.

도문시제5중학교에서 공회사업을 하다가 리직휴양후 도문시로인협회 비서장으로 있은 17년간 고파선생이 이끈 도문시로인연출단은 그가 창작한 문예작품으로 연변주로인문예회연에서 수차 우수창작, 우수종목상을 안아왔다.

현재 도문시로간부국 활동실에서 당구로 80청춘 닐리리를 여유작작하게 부르고있는 고파옹은 당년에 연변문공단에서 고락을 같이하던 선배님과 동료들 특히는 국경 1주년, 국경 10주년 헌례연출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두만강가에 파티라도 벌여놓고 서로 만나 정을 나무며 회포를 시원히 풀고싶다고 소원을 밝혔다.

고파옹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소망이 인터넷길림신문의 메시지를 타고 하루속히 둥글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편집/기자: [ 류일석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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