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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봉사로 교육자의 신앙 지켜 -흑룡강8.1농간대학 남도국 전임부교장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6.21일 15:07



  어느덧 30여년 세월이 흘러 지났다. 그동안 그는 해마다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였고 또 많은 학생들을 사회로 진출시켰다.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으면서 그의 얼굴과 이마에는 깊숙한 주름이 잡혔고 윤기나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려 앉았다. 교직원들에게 그는 착실하고 근면하며 청렴하고 개척정신이 있는, 군중들의 애대를 받는 령도였고 학생들에게는 자애롭고 존경하며 믿음이 가는 스승이였고 조직의 평가에는 사리 밝고 덕행과 업무능력을 겸비한 훌륭한 간부였다. 그가 바로 흑룡강8.1농간대학 남도국 전임 부교장이다.

  교육사업에 참가한 30여년래, 남도국은 변함없는 신념과 열정, 당의 교육사업에 대한 충성과 본직업무에 대한 애착심을 갖고 평생을 교학과 과 학연구사업에 바쳤다. 그는 책임과 봉사로 한 교육자의 인생신앙을 해석해나갔다.

  남도국은 1949년 7월 24일, 흑룡강성 밀산현 흥개향 동광촌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남규종, 어머니 리정희는 자식을 훌륭한 인재로 키울 일념으로 해를 이고 밭에 나갔다가 달을 지고 집에 들어오면서 부지런히 일했다. 1955년, 남도국은 부모를 따라 밀산현 화평향 동명촌으로 이주했다. 1956년 7월, 동명소학교에 입학했고 1962년 9월, 밀산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 가정난으로 매일 12리 되는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비오는 여름철이면 책가방을 메고 다리를 걷어올리고 두손에 고무신을 들고 진흙길을 질척질척 걸었다. 눈내리는 겨울은 더욱 어려웠다. 령하 30도를 넘는 엄동설한에도 살을 에이는 듯한 눈보라를 무릅쓰고 새벽 일찍 학교로 떠났다. 손발이 얼고 얼굴과 귀가 얼어 터진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1966년 6월, 고중일학년 때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폭발했다. 학교는 정상적인 수업을 정지했고 교정은 랑랑한 글소리 대신 “반란에 도리가 있다”라는 노래로 바뀌였으며 학생들은 책가방 대신 '어록' 가방을 멨다. 꿈에도 그리던 대학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1968년 9월, 19세 남도국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화평공사 동명대대로 귀향해 만년필 대신 삽과 호미자루를 잡았다. 동란의 시대는 그를 고험했고 또 그를 육성시켰다. 생산로동에 참가한후, 그는 허심하게 농민들을 따라 배워 농사일을 손에 익혔으며 농업지식 책들을 읽었다. 낮에는 힘에 부치는 일을 했고 저녁이면 회의에 참가했다. 매일 저녁 밥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회의장소에 도착해 사원들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국제국내 형세를 강의하였다. 남도국의 량호한 정치소질과 표현에 근거해 대대당지부에서는 60여명 청년중 남도국을 대대단지부서기로 선거했다. 중임을 맡은 남도국은 조직의 신임과 광대한 청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단지부 사업을 착실히 해나갔다. 농민야간학교를 꾸리고 사상정치와 법률상식, 문화지식과 농업기술을 가르쳤으며 문예선전대를 조직해 사원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히 했고 축구대와 배구대를 조직해 청년들의 기백을 떨쳤다.

  1969년 2월, 현인민무장부기층간부훈련에 참가해 군사리론을 학습하고 대렬훈련, 사격훈현에서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다. 훈련이 끝난후, 현무 장부에서는 남도국을 현무장기간련(基干连) 제3패 패장으로 임명했다.

  1970년 5월 1일, 남도국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70년 11월, 문화대혁명으로 전면 정지되였던 고등학교 학생 모집이 다시 시작되였다. 모집대상은 본기 고중졸업생이 아니라 농촌, 공장, 부대, 기관과 사업단위에서 2년이상 실천단련이 있고 표현이 돌출한 청년들이였다. 군중들이 추천하고 상급령도에서 비준하고 학교에서 심사해 모집했다. 그해 상급 유관부문에서는 밀산현에 17명의 명액을 주었다. 문화대혁명중 대학교에서 제일 처음으로 록취한 공농병대학생이였다. 현유관 부문에서는 화평공사에 한명의 명액을 주었다. 당시 농촌청년들 가운데는 도시에서 내려온 소수의 지식청년 외 대부분이 귀향지식청년이였다. 귀향청년들로 말하면 로동자로 추천받거나 군대에 입대하거나 대학교에 입학하는것이 농촌을 벗어나는 유일한 출로였다. 대학에 가야만 공장기술자, 교원 혹은 정부기관 간부로 되여 '철밥통'을 얻을수 있었고 상품량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경쟁이 심했고 모두가 눈을 밝혀 대학에 추천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당시 화평공사에는 14개 대대가 있었다. 매 대대에서 사상각오가 높고 로동표현이 좋고 군중속에 위신이 있으며 뿌리가 붉고 묘가 바르며 고중학력이 있는 후선인 한명을 선거하고 그중 가장 우수한 사람을 선발했다. 14대 1의 치렬한 경쟁속에서 남도국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유일한 후선인으로 선발되였다.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 목단강사범학원에서 발급한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다. 제1기 공농병대학생이 탄생되였다. 력사에 기록할만한 대사였다.

  남도국은 날듯이 기뻤다. 배낭을 메고 학교로 향하는 남도국의 발걸음은 나는 것 같았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서 제일 처음 본 것은 “환영합니다. 3대혁명속에서 온 공농병대학생들!”이였고 그외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으로 대학을 개조하자!”, “대학에 입학해 대학을 관리하자”, “인민들이 대학에 추천했으니 대학에서 인민을 위하자!” 등 프랑카드였다.

  농촌의 간고한 환경에서 단련받고 육성된 남도국은 얻기 힘든 배움의 기회라는 것을 심심히 느끼면서 열심히 배우고 고심히 련마해 고향과 사회에 보답하려 결심했다. 대학에 입학한후, 얼마 안돼 학원에서는 그를 수학계 당총지부위원(数学系党总支委员)과 71년급 수학반 당지부서기로 임명했다. 개학해서 얼마 안되여 반급에서는 한차례 정황료해시험을 치렀다. 그번 시험은 동학들의 문화저력을 모두 시험해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30점도 못맞을 때, 남도국은 '로3계'의 우세를 발휘해 일약 높은 점수를 따냈 다. 시험후,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득이양양했고 성적이 차한 학생들은 자비감을 느끼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도국은 반급의 당지부서기로서 학생들에 대한 정치, 사상공작 임무를 담당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성적이 차한 학생들을 도와 함께 진보했다.

  학교의 교학질서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았고 과정설치와 교수과목도 계통적이 아니였으며 각종 학습자료도 엄중히 결핍되여 학습에 애로와 곤난이 많았다. 남도국은 정상상과외의 모든 시간을 침실과 도서실에서 보냈다. 목마른 사람 물을 찾 듯이 지식의 바다에서 영양을 흡수했다. 1974년 7월, 남도국은 3년간의 유쾌하고 긴장한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였다. 기초가 좋고 성적이 뛰여났기에 본교에 남아 지식을 가르치고 인간을 육성하는 교수생애를 시작했다.

  1976년 7월, 남도국은 학원당위의 위임을 받고 사학계 부주임 직책을 맡게 되였으며 교수를 하는 한편 행정관리공작을 하게 되였다.

  1977년 2월, 남도국은 목단강사범학원에서 흑룡강성 8.1농간대학으 로 전근했다. '4인방'을 분쇄한후, 전국 고등학교는 정상적인 교학질서를 회복했다. 전국적으로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고 대학학제와 교수대강을 새롭게 작성했다. 새로운 형세하에 사회상에서는 공농병대학생들에 대해 일부 편견이 생겼고 공농병대학생들은 주위 사람들의 부정당한 눈총을 받기도 했다. 특정된 력사환경과 조건하에서 공농병대학생들은 광대한 군중들의 추천과 선발을 통해 입학했고 그 시대의 우수한 사람임에 손색이 없었다. 문화적 수준차이와 학제와 대강이 정규화되지 못한 것은 객관적 문제였다. 남도국은 객관적으로 랭정하게 자신의 우세와 렬세를 분석했다. 자신에 대한 정확한 판단, 분석의 기초상에서 계통적으로 대학본과 과정을 자학하기 시작했다.

  대학본과 5년 과정을 자학한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1977년 10월, 흑룡강성문교반(黑龙江省文教办)에서는 할빈사범대학, 흑룡강대학에 위탁해 '문화대혁명'후, 학교에 남아 교학하는 젊은 교원들에게 수학, 물리 전공전업 연수반을 조직했디. 남도국은 행운스럽게 성고 등학교 수학계 청년교사 연수반에 합격되였다.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안해와 한살도 안되는 어린 딸을 두고 그는 할빈사범대학 수학계 연수반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할빈사범대학에서는 청년교사 연수반에 대해 특별한 중시를 돌리고 수학계의 우수한 사자력량을 배치해 교수를 진행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남도국은 반급의 반장과 반당지부서기 직무를 겸임했다. 남도국은 자신의 학습임무를 원만히 완수하는 동시에 반급의 사업을 착실하게 해나갔으며 학원지간, 학원과 교원간의 '련락원' 작용을 충실히 해나갔다. 연수반에서 그는 선후해 '수학분석' (数学分析), '고등대수' (高等代数), '미적분방정' (微分方程), '복변함수론' (复变函数论), '실변 함수론' (实变函数论), 개률론 (概率论) 등 수학본과 과정을 전공했다. 일년간 학습에서 문화과 공부에 노력했을뿐만 아니라 로교원들의 우수한 교수방법과 풍부한 교수경험을 참답게 배웠다.

  1978년 9월, 남도국은 진수를 마치고 귀교했다. 흑룡강 8.1농간대학에서는 기초부(系)를 설립하고 78명 교원으로 구성된 수학교연실, 물리교 연실, 화학교연실, 외국어교연실, 체육교연실을 건립했다. 당시 수학교연실 주임은 남도국에게 농기계(农机系) 78년급 학생들에게 세학기의 '고등수학'을 강의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신입생 개학까지는 20여일 시간밖에 없었 다. 짧은 시간내에 한학기 교수안을 완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였다. 남도국으로 말하면 한차례 고험이였다. 그는 교수안을 쓸 때마다 로교사들에게 교수안 정체설계와 사로를 회보하군 했다. 강의후기와 총결을 짓는것도 잊지 않았다. 교수중에서 나타난 우점과 결점을 찾아내고 후기를 적음으로써 금후 강의에 참고를 제공했다. 그는 매 수업시간마다 선인들의 풍부한 경험을 자신의 실제 강의에 체현했고 연수과정에서 배운 선생님들의 좋은 방법을 모방하기에 힘썼으며 선인들의 경험과 자신의 주관능동성을 결합하기에 노 력했다. 총적으로 1년 반동안 78년급 농기계반 '고등수학'을 가르치면서 좋은 효과를 거두었고 령도들의 찬양과 학생들의 호평을 받게 되였다.

  1980년, 남도국은 또 농기계반 80년급 230교시수의 '고등수학' 강의 임무를 접수했다. 기본상에서 교수안을 보지 않고도 류창하고 조리있고 숙련되게 강의를 할수 있었다. 그는 학교의 배치에 따라 전교 청년교원들에게 교수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1982년, 강사직함을 수여받았다. 1983년 1월, 기초부주임으로 승진했고 기초부교학행정공작을 관리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수업만 하고 과학연구를 결부시키지 못한다면 교학질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연구를 교수과정에 침투시켜야 했다. 이는 사회생산과 과학기술발전의 기본요구이며 고등학교현대화 교수과정의 돌출한 특점이였다. 과학연구와 교수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일보 교수질을 제고하기 위해 1984년 3월, 상해화동대학에 파견되여 '범함분석'(泛函分析), '위상기하학' (拓扑学)을 전공하고 교학과학연구의 선제방법과 현대수학 방법론 등을 배웠다. 연수기간 경상적으로 화동대학 수학계 석사연구생론문답변, 박사연구생론문답변에 참가해 앞으로 과학연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했다.

  1985년, 연수를 마치고 귀교한 후, 선후로 6개 과학연구과제 사업에 참가했다. 그중 실험설계(试验设计), 데이터처리(数据处理), 컴퓨터시뮬레이션(计算机模拟), 수학모형구축(建立数学模型) 등을 구체적으로 책임졌다. 그는 선후해 '콩의 물수요 규률과 고산관개의 연구'(大豆需水规律与高产灌溉的研究), '삼강평원 식용균 생태환경과 산업규획연구' ( 三江平原食用菌生态环境与产业规划的研究), '삼강평원 농업기후 동태 예측연구' (三江平原农业气候动态预测研究), '전자기파 토양온도계 연구제작' (电磁波土壤温度仪研制) 등 4개 과제를 책임지고 연구했다. 그중 '콩회색반점병 류행예측과 치료연구'(大豆灰斑病流行预测与药剂防治的研究) 과제는 흑룡강성교육위 원회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수여받았고 '학도식 과당교수개혁' (学导式课堂教学改革)과제는 흑룡강성 우수교수성과 2등상을 수여받았다. 그가 집필한 18편 과학연구론문은 학교, 성, 국가급 학술간행물에 발표되였고 우수론문 성과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1997년 3월, 그가 집필하고 흑룡강성과학기술 출판사에서 출판한 279만자에 달하는 저작 '수학모형과 농업기상예측' (数学模型与农业气象预测)이란 책은 다년간 예측과학연구와 수학의 농업중에 서의 창조성응용을 종합한 책이였다. 저작은 그가 30여년간 수학과 과학 연구를 결합한 결정체였고 수준의 비약과 승화를 보여주는 책이였다.

  교수질을 진일보 제고하기 위해 '고등수학'(高等数学), '고등수학자학 지도' (高等数学自学指导), 'Fuzzy수학강좌' (Fuzzy数学讲座) 교재와 교수 참고서를 집필했다. 1985년부터 심입해 교수방법을 모색하고 대담히 과당 교수개혁과 탐색을 진행했으며 과학적교수관리수단과 방법을 연구했다. 1989년에 발표한 '학도식 과당교수개혁' 론문은 학교급 일등상을, '금을 주는가, 금술을 주는가' (给金子还是教点金术) 론문은 성우수교수성과 1등상을 수여받았다.

  몇년래 남도국은 석자강단에서 전과생, 본과생, 연구생들에게 '고등수학', '확률론' (概率论), '선형대수' (线性代数), 'Fuzzy수학' (Fuzzy数学), '무한극한수와 무한극한리론'(超穷数与超穷论法), '생물수학' ( 生物数学), '회색계통리론' (灰色系统理论), '조합수학' (组合数学), '류행상의 미적분' (流行上的微积分) 등 9개 과정을 강수했다. 1978년부터 그의 강의는 줄곧 학생들의 호평과 령도들의 표양을 받아 왔으며 그가 맡은 교학질량은 학교 평가에서 계속 우수항렬에 들었다. 1988년 1월, 남도국은 기초부주임 (正处级)으로 임명되였다.

  1991년 9월, 남도국은 처장급간부훈련반에 참가해 10개 과목과 17개 과정의 학습임무를 원만히 완수했다. 1992년 7월, 성위당교에서 돌아온 후, 흑룡강8.1농간대학 기률검사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였다. 비록 공작강위와 직무는 변했지만 열심히 배우고 탐구하는 습관과 정신만은 변함이 없었다. 열심히 등소평리론을 학습하고 심득을 썼으며 과학적리론으로 자신의 사업을 지도했다. 반부패투쟁과 결합하여 '특색리론'을 학습, 토론, 연구했고 엄숙히 기률을 집행하는것과 “3가지 유리” (三个有利于)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기률검사공작을 학교개혁과 학교발전을 위해 복무하게 했다. 경상적으로 기층에 심입해 조사연구하고 군중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으며 교육을 선행으로, 예방을 위주로 하는 방침을 견지하고 당성, 당풍, 당기률과 렴정교육을 진행했다. 학교당위를 협조해 당풍렴정건설과 책임제를 락실하고 유관부문과 배합해 학교사업의 공개화를 완성화하고 심사위원회를 방조해 행정주요령도들의 리임심사제도를 규범화했다. 기률검사 위원회서기로, 또 교수로 매년 80교시의 본과생 '고등수학'을 강의해야 했고 40교시의 연구생 '회색계통리론'을 강의해야 했으며 당위선전부, 통전부기관당위서기 직무도 겸했다. 업무량이 많고 임무가 중했지만 언제나 직접 문제를 처리했다.

  기률검사위원회서기로서 그는 직접 기층에 심입해 방법을 생각하고 사로를 개척하고 난관을 돌파했다.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랭대, 조소, 인신공격도 받았고 집유리창을 들부시우는 일도 당했지만 실사구시하고 공평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요구했고 종래로 가족과 친척들을 위해 리익을 도모하지 않았다. 1995년, '전국교육계통우수기률검 사간부' (全国教育系统优秀纪检监察干部) 칭호를, 1998년, 흑룡강교육청 '전성교육계통우수기률검사간부'(全省教育系统优秀纪检监察干部)칭호를 수여받았다.

  2002년 5월, 남도국은 흑룡강성8.1농간대학당지부서기 겸 기률검사위원회서기로 임명되였다. 학교당위와 령도들의 분공에 의해 구체적으로 학교선전부, 통전부, 학생처, 학교단위, 기관당위기률검사위원회 사업을 책임졌다. 전에 비해 업무량은 많이 증가되였지만 시종 교수업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2007년, 성위에서 흑룡강성8.1농간대학 지도부성원을 다시 조정했다. 남도국은 학교 부교장으로, 학교당위위원으로 승진했다. 주요하게 학교발전 계획처와 초생취업처(招生就业处)의 공작을 책임졌다. 1992년부터 2007년까지 15년간 학교정치사상공작 임무를 담당했고 2007년부터 2009년도 직전까지 행정공작에 종사했다.

  그가 책임진 여러 분야에서 학생모집과 취업처 공작은 고등학교공작중의 '입구'와 '출구'로서 관건적인 부문이였다. 그의 노력으로 흑룡강8.1농간대학은 매년 학생원천이 충족하고 질과 량을 보장하고 제때에 록취임무를 완성해 성학생모집반과 성교육청의 표양을 받았으며 흑룡강8.1농간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률도 현저히 증가되였고 졸업생 취업률이 95%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남도국은 1979년부터 선후해 5차례 학교급 모범당원으로 평선되였고 6차례 학교급 우수교사, 선진공작자로 평선되였으며 학교 우수과학성과 1등상을 수여받았고 흑룡강성우수교수성과 2등상을 수여받았다. 여러차례 성국영농장총국 모범당원, 성농장총국 모범사상정치공작자, 성우수공작자, 흑룡강성교육계통 우수검찰간부, 전국교육계통 우수검찰간부, 계서시민족단 결진보모범으로 당선되였다. 흑룡강성고등학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대표단을 령솔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했고 흑룡강성 고등교육대표단 성원으로 서유럽 10개 나라를 방문했다.

  남도국은 고등학교 교육사업을 열애했고 사업터에서 묵묵히 정성을 기울이며 30년이란 춘추를 보냈다. 그는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하면서 사회와 조국이 수요하는 높은 소질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돌출한 공헌을 했다.

  /맹고군 저, 리철준, 피금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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