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다큐 “불멸의 발자취” 펴낸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기자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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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것이라고 꼭 구문이 되는것은 아니다. 최근 조선언어문자규범회의차 연길에 온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부의 김성룡기자를 만나 10년전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펴낸 벅찬 나날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젊은 날의 그 깊은 감명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는 중국 관내에서 반일투쟁에 종사해온 우리 민족 혁명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사적을 다룬 프로그람으로서 방송뿐만아니라 도서로도 출판되여 한때 조선족사회에서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1998년 그가 처음 다큐멘터리를 접촉하게 된 때는 20대의 초보였다. 우연히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사업하는 강룡권연구원을 만나 자전거를 타고 동3성 력사유적지를 답사한 내용을 3시간 넘게 인터뷰를 한것이 첫 계기가 된다.
뉴스를 주요내용으로 하루 한시간 정도 방송되는 조선어방송에서 더구나 초보였던 그로서는 엄청난 분량을 소화하기가 막연하였다. 고민끝에 강룡권선생의 육성을 넣어 답사현지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주인공이 떠나면서 주고간 <<산자의 발길 죽은자의 숨결>>(강룡권 저)이라는 책자의 내용을 결합하여 하루 10분가량의 방송시리즈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그때는 주인공 강룡권선생이 인터뷰를 마친후 자전거를 타고 연변으로 돌아오던중 뇌익혈로 쓰러져 답사의 발걸음을 멈춘 때였다. 그리하여 “자전거 타고 만리 길 고 강룡권선생의 력사답사기”라는 제목으로 1년간 방송된다. 뜻밖으로 그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연변에서는 주변실존인물인 강룡권선생의 “자전거 타고 만리길”이 열점화제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여러 사학자들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피타는 노력과 사학관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특히 청취자들의 감동과 치하의 목소리가 높았다. 고향 연변으로 찾아왔다가 이 모든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 김성룡기자는 방송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후 력사다큐 “혈연의 강들”을 써낸 류연산작가와 마주하게 되며 류연산작가의 육성과 력사현장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다큐시리즈로 담아냈다. 역시 청취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되였고 다큐에 더 큰 보람과 흥미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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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에서의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원이 머물렀던 곳을 답사하고있는 장면.
2005년 세계반파쑈전쟁승리 및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60돐을 맞으면서 또 다른 다큐작품을 물색하고있을 즈음 중앙당학교 최룡수 철학교수를 만나게 된다. 최교수는 80년대 조남기장군을 뵌 자리에서 중국 관내 조선족 독립운동가들과 항일투사들에 대한 연구도 철학연구화 함께 해보라는 부탁을 받고 이미 거물급 력사인물에 대한 연구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허나 그 연구자료들은 그대로 도서관에서 썩고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듣게 된다.
언론인으로 간과할수 없는 단서였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항간에서 무정장군이며 양림, 김원봉, 김구 등 이름과 함께 많은 단편이야기들을 들어왔던 그는 언젠가는 꼭 현장답사로 이러한 추억의 단편들을 한선에 꿰보자고 마음먹었던지라 절호의 기회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당시 조선어방송의 책임자였던 박일선주임 답사의향을 밝혔고 박주임 역시 적극 지지하며 이를 조선어방송부의 주요사업으로 확정하고 물심량면으로 지원했다.
불타는 의욕과 갈망을 앞세운 그는 최룡수교수님을 모시고 중국 관내에서의 조선족혁명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력사답사를 시작한다. 남방의 화로불 같은 열기속에 , 태항산맥의 험산준령, 황토고원의 아칠한 낭떠러지길을 넘나들면서 그들은 지칠줄 몰랐다. 70세에 가까운 최룡수교수는 당뇨로 심한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버텨냈고 김성룡기자는 단계별로 계속 답사를 나갔을뿐만아니라 그외 시간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송프로그람을 제작해 다큐시리즈 “불멸의 발자취”방송을 끊임없이 이어댔다.
두발로 뛰며 완성하는 시리즈들이 전파를 타고 청취자들에게 전해져갈 때마다 열광적인 반향들이 뒤따랐다. 각지에서 애청자소조가 건립되고 방송퀴즈프로에 개입하여 력사인물들의 행적을 알아맞추기도 하고 청취자들끼리 서로 교류의 장도 만들어가면서 민족력사인물들의 “불멸의 발자취”에 대한 애정은 식을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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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화산기슭의 윤세주, 진광화 묘지앞에서 한국 유가족들과 함께.
다큐시리즈 “불멸의 발자취”는 관내 조선족혁명가들의 혁명력사를 처음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작품으로서 인터넷을 통해 또는 책자로도 출판되여 조선족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사학자가 아니여서 깊은 연구가 따라가지 못하고 다만 단서에 따라 관련 이야기들을 전개하였는데 그토록 반향이 클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고 그는 말한다.
사학자들도 이 작품에서 단서를 잡아 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력사인물평전을 쓰는 작가들도 현장답사에 많은 편리를 제공받았다고, “불멸의 발자취”를 보고 태항산답사를 다녀왔다고… 사회 각계로부터 나름의 호평들이 련속부절 뒤따랐다.
처음에는 다만 방송프로를 잘해보자는 의욕과 민족사에 대한 구지욕으로 시작한 일이 전 민족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선전효과를 동반하게 되자 벅찬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일면 필경은 살아있는 생동한 자료가 아니라는 점에서 유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또 전국 각지의 100여명에 달하는 항일전쟁, 해방전쟁 참전용사들을 찾아 “산자의 숨결”을 담은 영상취재까지 하면서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다큐에 이토록 큰 관심을 보이며 갈구를 느끼고있는걸가? 그동안 다큐시리즈에 운명을 걸다싶이 하며 벅차게 뛰여왔던 행적을 되돌아 김성룡선생은 자신의 깊은 감명을 다음과 같이 일축한다. “사람들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어차피 거짓과 허위에 부딪치게 됩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진실로 믿고싶어하고 진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거짓이고 허위였음을 알게 될 때에는 크게 실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상처를 안고 살고있지요. 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싶어하고 진실을 말하려 합니다. 그들의 진실에 대한 추구는 더욱 강렬한것입니다. 진실하지 않은것, 합리하지 않은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참고 지나가는 일들이 적지 않은 가운데 자기 민족 력사만이라도 진실하게 알려 하는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진실을 진실하게 밝힌다는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전거 탄 답사길에서 쓰러진채 영영 일어나지 못한 강룡권연구원이며 <<혈연의 강들>> 집필을 마친 몇년후 50대에 타계 한 류연산작가, “불멸의 발자취” 답사를 끝낸 몇년후 암으로 세상 뜬 최룡수교수 그리고 민족력사 다큐시리즈를 련이어 완성해가며 열심히 뛰여왔던 40대 초반의 김성룡 본인도 수술대에 올라 심혈관대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 고행의 다큐길을 떠올리며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진실로 가는 그 길에는 희생과 헌신, 용기가 따라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있는듯싶었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