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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연변《뢰봉》오늘은 어떻게 지낼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3.01일 09:54
편집자의 말:


3월 6일은 모택동주석이 《뢰봉을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쓴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50년이 지났지만 뢰봉정신은 아직도 살아있고 현시대에 와서 점점 다시 되새기는 열조가 일고있다.

본지는 오늘 80년대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 연변의 《뢰봉》고만길을 다시 취재하고 그당시 연변일보에 실렸던 고만길의 사적을 그대로 전재해 싣는다.


시대를 뛰여넘으며 한기자가 2번 취재한 80년대 연변의 《뢰봉》이 오늘엔 어떻게 지내는지를 보며 《뢰봉정신》을 다시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80년대 연변의 《뢰봉》이 오늘엔 어떻게 지내는지를 보며 <<뢰봉정신>>을 다시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핍한 생활 강철 같은 의지로 병마와 싸우는 고만길


1987년 3월 13일, 연변일보는 1면 톱기사에《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란 제목으로 도문시 교통국 도로관리단 조선족로동자 고만길(당년 34살)이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원한 사적을 실었다.


고만길은 1971년 후 4차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원했고 가는 곳마다 남을 위하여 수두룩한 좋은 일을 하였으며 5차나 본 계통의 선진생산자로 표창받았다.


1987년 3월 10일 중공도문시위와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전 시 문명건설동원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하고 그에게 1등 공을 기입, 동년 8월 7일 연변주당위와 주정인민정부에서 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자기를 잊고 남을 구한 훌륭한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1988년 5월 28일 길림성교통청에서는 전성 교통계통 표창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뢰봉학습우수로동자》란 칭호를 수여하였다.


고만길은 살아있는 연변의 뢰봉이였다.

2월 29일, 필자는 모택동동지가 《뢰봉을 따라 배우자》란 제사를 쓴 50주년, 그리고 성, 주,시 당과 정부에서 고만길을 《뢰봉학습우수로동자》로 명명하고 전 사회적으로 그를 따라 배우는 학습열조를 일으킨 25주년을 기념하여 두번째로 80년대 연변의 《뢰봉》을 취재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 겨우 찾은 고만길이 뇌출혈로 대수술을 받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을줄이야!

언어장애로 하여 겨우 대답하는 그에 따르면 지난해 5월 12일, 그가 왕청-라자구사이의 도로건설공사에서 현지시공을 하다가 급성뇌출혈로 갑자기 쓰려져 왕청현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그는 오른 쪽 팔다리가 마비되였다.

《아무런 후회 없다》


필자는 오전과 밤시간을 빌어 고만길과 그의 안해(림영애)를 두번 인터뷰했다.


고만길네 생활은 진짜 궁핍하였다. 그들는 자기네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하며미안해서 신청을 하지 않다가 최근에야 고만길의 녀동생이 해당부문에 찾아가서 최저생할보조신청을 했단다.


단위가 파산되여 고정된 로임조차 없는 그는 이번 대수술로 5만여원의 현금을 썼단다.


당년에 고만길이 《라성교》 《뢰봉》으로 불리자 그에게는 입당, 입학(주교통학교)의 대문이 열렸다.


그가 3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단위에 돌아와 얼마 안되여 도문시 건설국산하인 시정관리처에서 기술자로 배치받았다. 그런데 개혁의 급물살에 단위가 불황을 겪다나니 몇년간 로임도 못주며 휘청거리다가 나중에는 끝내 파산되였다. 하여 만길이는 58세나이에 로임도 없이 주교통관리소의 계절기술일군으로 초빙되여 림시밥벌이를 하는 신세다.

《지금 큰 병에 걸리고 보니 당년에 그 많은 좋은 일을 한것이 후회되지 않는가?》


《아무런 후회가 없다. 죽는 사람을 보고 누가 살리려고 하지 않겠는가》

드팀없는 그의 대답이다.


《남편이 자기 마음에서 울어나서 한 일인데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오히려 친구들이 모이면 지금도 만길이가 제일이라고 호평한다. 나는 좋은 남편을 만나 나까지 좋은 평가를 받으니 남편한테 약이라도 더 잘 대접하겠다는 결심이 늘 생긴다》


안해의 밝은 대답이다.

강철 같은 의지로

필자는 만길에게 병마와 싸워이기라는 정신력을 주고저 연길성보호텔 정영채회장이 쓴 자서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를 선물하며 책속에 있는 정영채의 중풍치료법과 그의 정신력을 소개했다.

《나도 꼭 이겨낼것입니다.》


만길이는 강철같은 불굴의 의지를 내비쳤다.


필자가 두만강광장에서 그를 만나 그와 함께 천천히 걷다가 4층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올라갈 때 불편한 그를 돕자고 하니 절대 거절하였다. 보기에 어처구니 없는 짚고 끌고 돌고 앉고 서는 서툴은 동작이였지만 그 매 하나의 동작은 그가 자기의 처신에 비춰 오랫동안 고안한 동작이란다. 혼자의 힘으로 후둘거리는 다리를 끌며 4층까지 올라가고 나니 그의 온 몸은 땀투성이가 되여 옷부터 벗었다. 그는 이렇게 매일 오전 오후로 바깥나들이로 신체단련을 한단다. 한달전까지만도 부인이 밀어주는 휠체어로 출입을 했다는데 말이다.

그는 앉아있어도 자기의 왼손으로 쉬지 않고 오른쪽 팔과 다리를 안마한다. 부인의 소개에 따르면 그가 주원치료를 받을 때 몸을 좀 움직이게 되자 복도층계의 손잡이에 의지하여 하루에도 몇번씩 1층부터 12층까지 오르내리며 회복단련을 견지했단다. 그리고 오공촌에 있는 단층집에 실내화장실이 없어 불편하여 시내에 아빠트를 세를 맡게 되였을 때에도 신체단련을 목적으로 일부러 4층을 선택했단다.


누구라도 고만길이 병마와의 싸우는 현장을 직접 보면 25년전 그가 자기를 잊고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남을 구원하는 영웅적 형상이 필름마냥 눈앞에 떠오를것이다.


석자두께 얼음도 하루밤사이에 언것이 아니다.


잊지 못할 은인


고만길네와 고만길이 구원한 아이 림철섭네는 그야말로 서로 잊지 못할 끈끈한 사이였다.


이하는 고만길 부부와 철섭의 어머니 류영희가 하는 말이다.


고만길: 《철섭이네는 지금도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철섭이 아버지(림광)가 한국에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우리 집에 와서 현금을 5000원이나 내놓으며 생활에 보태라고 했습다》 《철섭이를 주자고 사온 운동복도 철섭이가 청남이형님(고만길의큰 아들)을 입으라고 한다며 가져오고…》


림영애:《우리는 그 5000원을 안 받겠다고 거절하다 못해 끝내 받았습니다. 나는 그 돈으로 밀차를 사서 밀고 다니며 뼈를 수구해 팔면서 생활에 보탬을 하였습니다》


류영희:《철섭의 구명은인인데 우리는 절대 못 잊지요. 그때 철섭이가 여섯살이였습니다. 철섭이는 대련민족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모 회사에서 영업경리로 근무합니다. 2008년에 결혼하고 아들까지 있습니다.》


《철섭이는 만길이는 자기가 구원되여 다시 태여난 12월 24일을 잊지 않기 위하여 전화 등 거의 모든 상용번호를 1224로 한답니다. 철섭이는 만길이를 잊을수 없지요…》


고만길은 자기가 남을 위해 한 모든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25년 전 필자는 근 40일간 고만길의 발자국을 추적하면서 근 백여명의 목격자들을 만나 보았다.


그때 목격자들은 《한마디로 고만길은 남을 돕기위해 태여난 사람이다》고 하였다.

고만길의 남을 위하는 정신은 오늘에도 변색이 없었다. 그리고 병마와 싸우는 강의한 그의 의지는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오늘의 고만길은 몸은 비록 불구지만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뢰봉》으로 손색이


없었다.

필자는 80년대 연변의 《뢰봉》-고만길의 신체가 하루속히 강복되기를 기원한다.

오기활 기자

철섭이 동환이와 함께 도문 북강현지에서 기념을 남기다.


편집자 주: 아래의 기사는 1987년 3월13일 연변일보 1면톱으로 실렸던 기사 원문이다.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 조선족로동자 고만길의 이야기




저기 얼음강물속에 아이들이 빠져 허우적거린다..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 사람들의 태도는 저마다 각이하다.


어떤자는 용감히 충격하고 어떤자는 슬금슬금 뒤주춤하며 어떤자는 함구무언하고 구경만 한다.

그는 저어없이 용감히 충격했다.


몸바쳐 남을 구하다


1986년도 저물어가는 12월 24일.


도문시 교통국 도로관리단에서는 안산, 향양, 마패 등 세 양로반의 20여명양로공을 집중시켜 도문-훈춘도로 《K+700m》구간의 길닦이공사를 이날을 막날로 마무리고있었다.


오후 2시 30분경.


현지 시공원인 고만길(34살, 조선족)의 지휘에 따라 양로공들이 마지막 자동차가 실어온 흙을 강변쪽 길옆에 펴면서 도로변을 붓대처럼 곧게 펴고있을 때다.


도문북강 저쪽 남쪽켠에서 일여덟되는 조무래기들이 얼음지치기를 하면서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오지 말아라-》


《강이 얼지 않았다_》


깍아지른 절벽을 에돌아 주먹같이 뚝 뻐여진 굽인돌이를 스쳐흐르는 북강물이 격류를 이루며 흐르는통에 대소한의 엄동추위에도 내내 얼지 않았다.


조무래기들은 미끄럼놀음에 정신을 판데다가 물살소리에 80메터밖에서 소리치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 조무래기들은 도문시제2소학교 학령전 4반의 어린애들이다. 방금 군대놀음을 하고 우두머리 김광훈이 개구리잡이를 가자며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중이다.


거기에는 일곱살짜리 림미선과 남향란이라 부르는 녀자애도 있었다.


어른들은 너도나도 이따금씩 소리치며 달려오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풍덩, 픙덩-》

개구리가 있다면서 얼음판에 엎드려 물밑을 살펴보던 림철섭(6살)이와 리동환(7살)이 물에 빠졌다.


남들과 함께 아이들을 지켜보던 만길이는 불시에 가슴에 불이 닿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이 물에 빠졌다!》


만길이는 다른 생각도 없이 등산복을 벗어 팽개치고 소리치며 20메터나 되는 돌사태를 맹호같이 달아내려 쏜살같이 강변으로 내달았다.


강변에 거의 다달을 때였다. 물에 꺼꾸로 떨어졌떤 동환이가 불쑥 물우에 솟더니 얼결에 물밖에 내놓인 큰돌을 부등켜안고 소리치며 엉엉 울었다.


20메터도 더 넓어보이는 골타르 같은 검은 강물, 수천마리 성난 사자마냥 거픔을 일며 타래쳐 흐르는 강물은 마치도 만길이마저 마구 삼켜버리려는듯한 기세다.

(물살이 너무세다.)


물에 막 뛰여드려던 순간 만길의 뇌리에는 덤비지말자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돌을 놓지 말아라, 내가 건져줄 테니.》


만길이는 소리치며 강옆을 따라 달리는 한편 적당한 위치를 노렸다.


《텀벙!》


만길이는 발에 긴목이 달린 솜구두를 신었다는것도, 손에 일하던 장갑을 꼈다는것도 전혀 잊고 그대로 물속에 뛰여들었다.


3메터, 2메터…


제딴에는 우쩍우쩍 팔을 뽑아 헤염을 친다는것이 물먹은 솜이라 5메터도 못치고 자맥질을 하였다.


선자리에서 발돋음을 하며 숨을 돌리려던 순간 기복을 이룬 모래강바닥이 그를 우묵진 곳으로 끄당기며 준비없는 만길에게 물을 한모금 먹였다. 바로 이 시각 만길의 앞에는 옷 같은 무엇이 떠내려왔다. 아마도 만길이의 달음박속도와 물흐름속도가 같았던 모양이다.


(분명 사람이다!)


철섭이가 물에 떠내려 오는것이다.


만길이는 숨 돌리새도 없이 소리치며 두다리에 힘을 주며 힘껐 솟구치면서 철섭이를 향해 헤염쳤다.


손발이 가다듬고 코와 입에 물이 침습했건만 만길이는 아랑곳없이 덮쳐나가 끈내 철섭이 허리를 껴안았다.

그런데 물속에서 자맥질하며 철섭이를 물밖으로 떠밀던 만길이는 기진맥진한데서 그만 철섭이를 놓쳐버렸다.


(좀 더 내려가면 얼음밑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죽기내기였다. 만길이는 헤염인지 뭔지 이름짓기 어려운 동작으로 또 철섭이를 따라잡고 덥석 그의 발을 잡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이 벗겨지면서 또 놓쳐버렸다. 또다시 숨을 한껏 몰아쉬고 발자맥질을 하면서 손을 한껏 편것이 용을 냈던지 철섭이의 발목을 힘껏 잡았다. 그는 몸으로 철섭이를 떠밀며 가까스로 남쪽 강기슭얼음판에 다가가 붙었다. 다행히도 장갑을 벗지 않은 덕에 손이 미끌지 않고 자기도 강판우에 쉽게 매달릴수 있었다.


물에 밀려 60여메터나 떠내려온 철섭이는 눈동자가 굳어졌고 물을 먹은 배는 배구뽈처럼 불룩했다.


만길이는 숨돌릴 겨룰도 없이 철섭이의 두 다리를 거꾸로 추켜들고 물을 토하게 하고는 인공호흡을 시켰다.


이때 두 어린아이가 울면서 달려왔다.


이 시각 만길에게는 참새다리의 피만한 힘도 태산처럼 믿어졌다. 그는 두 아이더러 철섭이 다리를 높이 추켜들라 하고는 또 물에 뛰여들려 하였다. 아직도 (둘이 있다)는 환각에서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 시각 그에게는 떠내려간 철섭이 신도 사람으로 생각되고 《살려달라》던 동환이도 떠내려오는것만 같았던것이다.


《우에 아이는 건졌으니 들어가지 말라-》


화학공장에 다니는 친구 서창도가 두 녀자애(림미선과 남향란)가 동환이를 당겨냈다고 알려줬다. 이때에야 만길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철섭이를 업으려고 잡도리를 했으나 지각을 잃은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앟았다.


만길이는 두 조무래기의 맥을 빌어 겨우 철섭이를 등에 업고 시내쪽으로 달렸다.


《림철섭이 삽니까?》


울면서 따라오는 조무래기의 애탄 물음은 애처로운 채찍마냥 만길이를 후갈겼다.


(내가 있는 한 철섭이 있고 내 심장이 뛰는 한 철섭이 심장도 뛸것이다.)


만길이는 이렇게 되 뇌이며 힘껐 달렸다.

100여메터쯤 되였을가, 등에 업힌 철섭의 손이 움직이는것 같았다.


《살았다! 살았다!》


만길이는 저도 몰래 소리치며 달음을 재우쳤다.


북강제방뚝밑이다. 만길이는 고개를 꺾고 콩크리같이 무거운 다리룰 끌면서 65도 더 되는 제방뚝을 올리 톱았다. 손톱으로 돌틈사이를 오비고 무릎으로 미끄러운 돌바닥을 벝티면서…


제방뚝을 넘어서까지 1000여메터 달린 그는 도문시방송국 종업원주택구의 한 집에 들어가 철섭이를 맡기고는 다시 강변으로 내 달았다.


제방뚝까지 달려가니 동환이는 지나가던 두 청년의 도움을 받으며 오고있었다. 만길이는 얼른 동환이를 업고 울지 말라고 달래면서 철섭이를 맡긴 집으로 달렸다.


얼마나 지났던지 철섭이는 차츰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집이 어디냐는 물음에 《남산로》라고 어렴풋이 답하였다.


《철섭이가 정말 살았구나!》


만길이는 저도 몰래 소리쳤다. 불시에 온 몸의 근육이 흥분으로 푸들거렸다…


만길이는 그만 김이 빠진듯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후- 쉬면서 자리에 쓰려졌다.


이날저녁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만길이를 위문했다. 그때서야 만길이의 안해 명애가 남편이 강에 뛰여들어 아이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12을 30일, 철섭의 아버지 림광이 두번째로 만길이를 위문하러 갔다가 물에 펴져서 볼품이 없는 만길의 신이며 솜옷을 보고 슬그머니 만길이가 누운 베개밑에 현금 200원을 밀어넣었다.


31일, 만길이는 어머니와 안해, 아들까지 데리고 철섭이 위문을 갔다가 돌아올 때 200원을 그대로 내놓으며 성을 버럭 냈다.


《돈을 생각했다면 얼음물속에 뛰여 들지도 않았겠습니다. 내가 조카를 하나 더 얻은것만 해도 기쁜일인데 뭐 이럴것이 있습니까?》


한 달반이 지났다.


그간 만길이는 지친몸으로 두번 자리에 드러누웠고 손과 발은 얼어서 껍질이 벗겨졌다.


만길이는 신체상의 그 어떤 고통을 어디까지나 참을수 있었고 또 자기가 한 일을 한번 후회하지 않았다.


허나, 만길의 마음은 때때로 개운치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만길이를 보고 《라성교》라 칭찬하며 혀를 끌끌 차는데 이구석 저구석에서 이런 소문들이 떠돌았다.


_만길이가 돈을 2만원이나 받았다오.


-두급 로임이 오르고도 장려로 1000원을 탔다오.


-행운이 좋지, 챤스를 잘 만나서 번신했으니…


-우리도 래일부터 강변에 나가 다니며 물에 빠진 아이가 없는가 찾아 보자구.


사회상에서 떠도는 헛소문으로 지난 음력설에는 그의 어머니까지 아들을 곡해하였다.


사회상의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하여 만길이는 몸에 탈이 나 앓자고 해도 뒤에서 《공로부》에 누워있다고 말할것 같아서 감히 앓지 못했다.


타인들이 구명을 바라는 순간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각이한 충격파를 받는다.


량심적충격, 순간적충격, 아니며 기형적충격을…


그렇다며 본문주인공 고만길은 어떤 충격을 받았을가?


목격자들의 말


《허만길(험한길)이 고마운길(고만길)이 되였군,,,》


《글쎼 이름탓인지 나에게는 험한 일들이 잘 생긴답니다. 죽는 사람을 보고 살려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난 1월 11일 취재중 필자의 유모아에 만길이는 무심결에 말했다.


(말속에 말이 있군…)


이런 령감으로 필자는 더욱 검질기게 달라붙어 말수가 적은 만길이를 끝내 말을 시켜 그말의 선색에 따라 목격자를 찾았다.


2월 6일, 도문시월궁가 1위 2조의 장정구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만길이가 물에서 사람을 구하기는 이번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15년을 지켜온 비밀이 있습니다…》

《1971년 여름이라고 기억됩니다. 어느 날 우리는 숱한 또래들과 함께 오공촌 5대 저수지에 목욕하려 갔습니다.


그날 저수지에서 한참 헤염을 치던 동렬이가 불시에 간질병이 발작해 물속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저수지물 깊이가 다섯키를 넘기에 모두들 물밖에서 동렬이가 간질을 일으킨다며 소리만 칠뿐 겁이 나서 누구도 어쩔바를 몰라했습니다. 이때 먼저 저수지 저쪽으로 헤염쳐 건너갔던 만길이가 웨쳐대는 소리를 듣고 40여메터나 헤염쳐와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렬이를 끌어냈습니다..


만길이는 동렬이의 이 일을 아이들이 알면 놀려준다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지난해에 동렬이가 병으로 죽은 다음에야 우리는 잊어버렸던 비밀을 15년만에 공개하였습니다.>.


2월 9일, 도문시 홍광향 오공촌 주상원의 말이다.


《아마도 1985년 6, 7월로 기억됩니다. 어느 날 저녁에 내가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갔다가 밤 9시경에 돌아올 때 이 앞에서 만길이를 만났습니다. 만길이는 나를 보자마자 <주목수, 사람을 살립시다>고 소리치며 나를 빨리 오라고 하였습니다..》


만길이 말에 따르면 그가 안해 마중을 나왔다가 이곳에서 인기척소리가 나기에 자전거에서 내려보니 수도관을 묻자고 파놓은 도랑에 사람과 자전거가 함께 빠져서 허우적거리고있었다. 도랑의 깊이는 2메터 잘 되고 비물까지 고여서 흙감탕이였다. 만길이가 그를 구하려고 아무리 로삼초사했어도 자전거는 겨우 꺼냈으나 도랑이 좁은데다가 그가 술에 잔뜩한탓에 어쩌는수 없어서 이렇게 나와서 행인을 찾는다는 것이였다.


《나는 만길이와 함께 그 사람을 겨우 건져냈습니다. 흙감탕에서 뒹군후 그사람은 정신이 다소들었던지 집이 오공촌에 있다고 하기에 우리는 그의 집에 찾아가서 그를 안해에게 맡겼지요. 그런데 내가 뒤를 돌아보니 집마당까지 왔던 만길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말해 무엇하랴?


필자는 고만길이 한밤중에 길을 잃고 낭떠리지에 굴러 떨어져 얼굴에 피투성이 된 《연길손님>을 자기집에 모셔와 주인집에서 걱정할가봐 밤 12시경에 6리길을 걸어서 주인집에 손님의 정황을 알려주고 돌아온 일이며 지난해 10월에 월청향 기신 6대 뻐스정류소에서 낯모를 소장사가 뜨개소에게 짓밟혀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소리치며 달려들어 그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아예 생락한다.

이만하면 독자들도 고만길의 인간됨을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석자 두께 얼음도 하루 저녁에 언 것이 아니다.》


그는 15년간에 선후로 다섯번이나 사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냈다.

고만길이 얼음강에 뛰여들어 아이들을 구함은 그 어떤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며 또 그 어떤 챤스를 노린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게으름없이 닦아 온 인간성에 피여난 아름답고 싱그러운 꽃덜기였다.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는 그의 고귀한 인간정신은 그 무슨 때가 지난 말이 아니며 더욱히는 오늘 날의 웃음거리도 아니다.


남을 헐 뜯는것을 일로 삼는 못난이들의 후론은 여하튼 사람들은 인간 고만길을 무한히 경모했다.


남을 돕는것을 락으로


만길이는 남울 돕는것을 무한한 락으로 여기며 가는곳마다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숯불을 지펴주었다.

만길에게는 《동네호주》, 《리발쟁이》, 《수리공》, 《모막이군》 등등의 수두룩한 별호들이 구슬인양 꿰매있다.


필자는 만길이가 걸어온 자취를 따라 수십명의 사람들을 취재하였다.


《아무튼 만길이는 특별했습니다,,,》


도문시 홍광향 송림초당지부서기 허송철은 이렇게 말문을 열며 만길이의 《특별》을 렬거했다.


만길이는 《의무리발사》로 온 동네 남자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그는 로동자로 모집되여 도시에 돌아간 후에도 때때로 리발기를 가지고 와서 온 동네 로인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당년에 집체호정치호장이던 서종준(71살)로인은 만길이가 허태활로인이 세상을 뜨기 이틀 전에 일부러 그를 찾아와 머리를 깍아 주었다고했다.


최옥정로인은 자기가 유리창문을 너무도 부러워하니 만길이가 다른 청년을 데리고 와서 낡은 벽을 몽땅 치고 제손으로 미닫이문과 유리창문을 짜서 달아줬다면서 그 은혜를 잊지못해 하였다.


1979년부터 2년 사이에 만길이는 룡정현 연집향 신광촌에 주재하며서 도ㅡ우도로 개조시공을 하였는데 그때 화룡현 룡수향 농민들이 만길이 소개로 부업돈을 벌었다며 입쌀 한마대를 만길에게 선물을 하였는데 만길이는 그 입쌀마대를 그대로 민공식당에 돌렸다.


월청향 마패촌 최정희로인은 도문시1중에 다니는 두 학생의 밥을 해주느라고 도문에 왔다. 작년 5월에 최정휘네가 세집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때 초면인 만길이가 자기네 집을 넉달간이나 빌려주고 석탄까지 실어다 주면서 마음대로 때라고 하였다고 한다. 최정희로인이 집세로 80원을 만길에게 결산해주니 한푼도 받지 앟더라면서 어떻게 그 은공을 갚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작년에 만길이는 월청향 기신6대에 장기주재하면서 시공을 하였다.


6대 로대장인 박안준의 말에 따르면 지난해 장마철에 논물거도가 아홉번이나 터졌는데 만길이는 번바다 사처로 달아다니면서 가마니를 얻어오고 로력까지 조직하며 보뚝수건로동에 참가 했다며 만길이는 농민들 못지않게 안달아 하더라고 말했다.


단위에서 집분배를 할 때도 만길이는 세집살이를 하면서도 좋은 집을 병으로 않는 다른 직공에세 양보하였다.


실로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듯이 만길이가 다녀간 길 따라 인정미의 꽃이 폈고 그가 앉은 자리에는 그만큼 싱그러운 꽃향기가 가득하였다.


허나 독자들은 아마도 모를것이다. 만길이는 자기집을 가진지도 3년이 되지만 그의 집에는 아직도 창고가 없고 김치움도 없다는 것을.

그가 가증해일가?


만길이는 1978년에 도문시 도로관리단에 전근해온후 근 10년간 외지로 떠다니면서 여러가지 시공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최근 4년간 단위선진일군으로 표창 받았고 지난해에는 도문시 교통국선진사업일군으로 표창받았다.


지난 3월 10일, 중공도문시위와 시인민정부에서는 그에게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하고 그에게 1등 공을 기입하고 로임 한급을 올려주었다.


/오기활

편집/기자: [ 박금룡 ] 원고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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