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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42)—불굴의 투사 김산 ②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8.08일 09:27
1927년 9월 9일, 팽배가 농민봉기를 일으켜 창설한 해륙풍쏘베트지구는 광동성 해풍과 륙풍 두현을 포함하고있다. 해륙풍사람들은 교도단에 15명 조선혁명가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동지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광주봉기부대는 로농홍군 제4사로 개편하고 사장은 엽용이 맡았다. 정치와 군사 경험이 풍부한 조선혁명가들도 각자 자기의 임무를 맡고 쏘베트정부사업에 참가하였다.

(권립교수)《1928년초 해륙풍쏘베트구역에 도착한 김산은 해륙풍당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쏘베트구역 보위전투가 시작되자 손에 총을 잡고 싸우다가 8월에야 당의 지시를 받고 향항을 거쳐 1929년 봄에 북경으로 돌아갔습니다.》


1928년 1월 21일, 해륙풍에 중국공산당 동강특위(东江特委) 당학교가 설립되였다. 김산은 학교당위원회 위원으로 교수계획 제정에 참가하였다. 학교에서는 레닌주의리론, 쏘베트건설, 제3국제와 세계혁명, 중국공산당 당사, 군사상식, 선전기술 등 교수내용을 설치하였다.

동강당학교 명단에는 네명의 조선혁명가 이름이 명확히 밝혀져있다.《장북성》은 김산이 이시기 사용했던 가명이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학교의 로동운동사와 공산국제 및 공산국제활동사를 강의했으며 선전사업을 주로 하였다. 다른 조선혁명가 오성륜은 군사지휘부의 성원으로 있으면서 당학교의 군사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이시기 김산은 또 혁명재판위원회사업을 맡아보면서 7명으로 구성된 혁명법정의 일원으로 일했다.

이해 5월에 적들은 다시 10만 대군을 모아 해륙풍쏘베트근거지를 공격해왔다. 거듭되는 전투와 실패속에서 전우들은 모두 헤쳐졌다. 구사일생으로 혜래(惠来)에 도착한 김산은 폭포밑 동굴속에 숨어있는 팽배와 정지운(郑志云)을 만났다. 김산은 팽배의 지시에 따라 향항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나루배를 타고 삼엄한 적의 경계를 피해 산두에 간후 일본화물선 타가야마 마루호를 리용해 향항으로 가게 되였다.

김산은 향항에서 인삼장사를 하고있는 박씨의 도움으로 다시 상해에 가게 되였고 상해에서 김성숙, 오성륜 그리고 박진형제를 비롯한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조선혁명자들을 만났다. 1929년 봄 김산은 전우들과 작별하고 상해를 떠나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시당위원회 조직사를 펼치면 김산은 1929년 5월부터 류청화(刘清华)라는 이름으로 중국공산당 북평시 당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사업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북경에서 김산은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전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을 령도하였다. 그는 북평녀자사범대학 당지부활동을 지도하였고 연경대학, 공과대학(工科大学)의 당사업을 지도하였다.

1930년 4월 중순 북평시당위원회에서는 《5.1》 국제로동절 경축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북평시당위원회의 지도성원인 김산은 선후로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비밀리에 당원회의를 소집하면서 대회준비를 하였다. 여러 대학에서는 학생시위를 하고 대회연설을 하며 선전과 표어를 만들었다.


김산이 자취를 남긴 20세기 30년대 북경대학은 지금의 북경시 5.4대가 29번지에 위치해있었다. 답사팀은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선생을 만나 함께 김산이 활동했던 사적지를 찾아다녔다. 전임 국가경제위원회 기술국 부국장으로 사업했던 고영광선생은 매우 검소하고 성격이 강의한 사람이였다. 걸음이 날렵하고 말수가 적은 그는 술담배를 하지 않고 늘 산책을 하며 또한 수영을 무척 즐긴다고 했다. 정열에 찬 두눈과 검붉은 피부색을 가진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혁명자 김산이 살아움직이는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북경대학 옛터에는 당시 학교청사로 사용되였던 4층 건물이 남아있다. 붉은 벽돌과 붉은 나무로 된 창틀, 문틀로 하여 전반 건물이 붉은색을 띠여 사람들은 홍루(红楼)라고 부른다. 1898년 이곳에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이 있었고 1912년 북경대학으로 고쳤다. 홍루는 1916년에 축조된 공(工)자형 건물이다. 《5.4》운동시기 리대소와 진독수가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모택동도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국의 공산주의를 전파하던 요람으로 간주된다. 김산은 북경의 학생운동을 령도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는 북경 대학생들의 《5.1》절 기념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이곳에서 학생대표를 만나 비밀회의를 하였다. 지금의 북경대학은 1952년에 해정구로 옮겼다.


답사팀 력사고문인 최룡수교수가 홍루를 소개해주었다.


(최룡수교수): 《여기는 북경대학 옛터입니다. 중국 5.4운동시기 리대소, 진독수가 교편을 잡았던 곳입니다. 많은 조선류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조선혁명자들로는 량명, 리륙사 등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30년대 김산이 북경대학 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활동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5.1절 기념활동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김산은 학생대표를 만나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곳은 중국 신문화운동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1930년 4월 20일 《5.1절》 기념대회 준비회의가 북평청년기독교회 강당에서 열렸다. 김산은 북경대학 학생대표뿐만 아니라 기타 대학의 학생대표들을 모아 준비회의를 소집하였다.

홍루에서 남쪽으로 얼마간 걸으면 동단북대가(东单北大街)에 이른다. 그곳에는 중국풍과 융합된 서양식 기독교회건물이 있었다. 기독교 청년들이 많이 활동하던 이곳이 바로 북평청년기독교회 옛터이다. 1930년 조선인 기독교신도들도 이곳에 자주 모였다고 한다. 김산은 이곳에서 기념대회 준비회의를 열었다.

그는 밀정과 경찰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보안사업을 포치하고 회의를 순조롭게 마쳤다. 이튿날 회의에는 김산의 련인이였던 제숙용(齐淑容)이 참가하였는데 경찰들의 습격을 받았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둔 엽전과 석회가루를 뿌리며 경찰에 대항하였고 경찰들이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에 대부분 빠져나갔다.

(최룡수교수): 《이 건물은 북경시청년기독교 옛 건물입니다. 30년대 전문 례배당이 있었는데 조선인들이 많이 리용했습니다. 당시 김산은 북경당조직의 조직부장으로 있었는데 여러 대학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4월 20일에 5.1절 경축준비회의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김산은 모든 문을 닫고 경찰들을 피할 준비를 하도록 하였고 또 구체적인 보위사업을 배치했습니다. 이튿날 다른 일이 있어서 김산은 직접 회의에 참가했지 않았지만 그의 련인 제숙용이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제숙용을 비롯해 50여명을 체포했습니다. 학생들은 미리 엽전, 석회가루를 준비하여 경찰들에 대항하였습니다. 경찰들이 눈을 뜨지 못할 때 여기저기로 도망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김산은 조선인들을 조직해 3.1운동 기념활동을 비롯해 많은 조직, 선전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당조직사에 나오는 류청화는 김산의 가명이다.

북경대학 홍루앞에서(가운데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

북경의 옛 청년기독교건물.

김산의 련인이였던 제숙용.


《5.1》절 기념행사가 있은후 김산은 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에 파견되였다. 1930년의 동북은 그야말로 암흑의 세상이였다. 장작림의 봉건군벌이 통치하고있었지만 도처에 비적이 살벌하였고 일본주둔군이 거리를 횡행하고있었다. 동북에 이주한 많은 조선이민은 각가지 억압과 수탈을 받으며 생활고에 허덕이고있었다.

김산은 심양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대표를 만나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사이의 련계문제를 토의하였다.

(권립교수):《북경시위 조직부장으로 당선된 김산은 중공북방국으로부터 중공과 조공과의 관계 처리문제, 조공당원의 중공가입문제를 도와주라는 특수임무를 맡았습니다. 김산은 길림지역 안동지구의 조공조직을 시찰했고 길림지역에서는 엠알파회의에 참가한적이 있습니다. 엠알파조공은 김산 등의 방조하에 해산을 선포하고 개벌적으로 중공에 가입했습니다.》


김산은 다시 길림으로 갔다. 그는 조선혁명청년동맹대표의 신분으로 길림에서 소집된 중국한인청년동맹(韩人青年同盟) 제2차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길림성 각지 조선공산당대표들이 모인 대회에서는 농민투쟁로선을 확정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선인 농부들을 이끌어 중국농민과 함께 중국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농민투쟁을 진행하기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선인, 중국인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김산의 주장은 80여명 대표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그들의 정치적각성을 높여주었다. 개인적인 분쟁만 하던 사람들은 협조와 단합을 강조하게 되였고 명확한 행동방침이 있게 되였다. 그후 김산은 또 만주조선농민동맹 제3차 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단동으로 가서 조직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7명밖에 없던 단동당지부는 20명 당원을 가진 지하당조직으로 확대되였다.


동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김산은 함께 투쟁하던 중국의 녀혁명가와 사랑을 맺게 되였다. 김산이 《아리랑》 회억록에서 류령(刘铃)이라고 밝힌 그녀의 실명은 제숙용이였다. 제숙용은 리대소가 발전시킨 진보적인 혁명가로서 당시 북평녀자사범학교에서 지하당활동을 하고있었다. 김산은 한차례 비밀회의에서 그녀를 알게 되였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두 혁명가는 서로 의지하면서 사랑을 나누었고 북해공원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손잡고 거닐었다.

홍루를 찾아가기 전날, 답사팀은 향산의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향산공원부근에 김산이 맑스레닌주의리론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다. 북경시 향산 남영자(南营子) 53번지, 기재에는 서산양황기(西山镶黄旗) 남영 13번지로 기록되여있지만 건물은 지금의 향산 남영 11번지로 변해있었다. 최룡수교수는 이곳 사적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곳은 향산공원밑에 있는 향황기 남영 13번입니다. 김산이 북경의 당조직부장을 할 때 제숙용과 함께 이곳에서 강습소를 꾸렸습니다. 김산은 공산당기초지식과 맑스레닌주의리론을 강의했습니다.》


1930년 봄, 중공북평시당위원회에서는 이곳에 당원강습소를 세웠다. 김산과 련인 제숙용은 함께 강습반에서 당기초지식과 맑스주의리론을 강의하였다. 강습반은 조진중(赵震中), 양홍포(杨洪浦), 류정재(刘静斋), 방성오(方星五) 등 많은 우수한 중국인 공산당원을 양성해냈다.

(최룡수교수): 《김산이 북평시당위 조직부장을 했던것은 당사자료에 나옵니다. 1980년도도에 제가 조진중을 만났는데 조진중에게서 남영자라는 주소를 알게 되였습니다. 이 단서에 따라 십여차 찾아왔습니다. 향산판사처에 가서 전문가에게 문의하고 뒤골목의 100세 로인을 만나 문의하면서 남영자 13번이 원래는 청나라병영이고 후에는 소학교가 있었던 자리임을 확인하게 되였습니다.》

당원학습반 자리를 설명해주는 최룡수교수.

당원학습반 사적지 주소번호.

김산이 쓴 소설 《기이한 무기》


당원강습반유적지는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가 발견하였다. 1980년 강습반을 다녔던 조진중로인을 알게 된 최룡수교수는 그에게서 학교주소와 당시 김산과 제숙용이 강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던것이다. 그후 향산부근에서 수십차례 확인을 거쳐 드디여 남영자 13번지를 확정하게 되였다.


이해 김산은 북경에서 염광(炎光)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기이한 무기(奇怪的武器)》를 《新东方》잡지 제1권 4기에 발표하였다. 소설은 사실주의적으로 조선의렬단원 오성륜의 투쟁과 리봉창의 의거를 부각한 작품이였다.

제1차 국내혁명이 실패한후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고 방황하였지만 김산은 드팀없는 신념으로 계속 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실패의 아픈 상처를 안고 단연히 북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당원강습소를 세우고 학생운동을 령도하였으며 당조직을 확대시키는 등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는 계속 간고한 투쟁을 견지해야 했고 뜻하지 않게 들이닥칠 더욱 큰 위험을 감당해나가야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을 당할지 누구도 모르지만 일본침략자들과 싸우고 봉건주의와 자산계급을 대변하는 국민당반동정권과 싸우며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을 항쟁에로 이끄는 투쟁은 멈출수 없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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